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는 원래 제목이 ‘어린 백조’였다. 온갖 고생을 하다 어느 날 자신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행복해진 백조 이야기를 써놓고, 독자가 삶의 반전을 눈치챌까 봐 안데르센이 뒤늦게 제목을 ‘미운 오리 새끼’로 바꾸었다고 한다.
‘오리’라는 애칭을 가진 가족 상담 전문가 엄정희 교수도 안데르센처럼 <오리의 일기>라는 동화를 썼다. 무려 48년간 자신의 일기장에 조용히 써온 ‘삶’의 기록으로, ‘많은 시련을 겪어도 결국 인생이란 행복한 것’이라는 교훈을 전하는 어른을 위한 ‘동화’다.
서울사이버대학교 가족상담학과 교수이자 지난 5월 퇴임 이전까지 유통업계의 혁신적 CEO로 홈플러스 그룹을 이끈 이승환 회장의 아내. 이는 사람들이 그녀를 행복한 백조로 여기게 하는 날개다. 그러나 엄정희 교수의 인생에도 미운 오리 새끼처럼 힘겨운, 절망의 폭우에 쓸려 내려간 반전이 세 번이나 있었다. 그 모든 찰나가 48년, 즉 반백 년간 써온 일기장에 기록되었는데,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낡은 일기장이야말로 그녀가 삶의 이치를 성찰하고 백조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게 해주는 진짜 ‘날개’이다.
1974년 10월 29일 - 오늘은 엄마하고 승한 씨하고 셋이서 시내에 나가 그의 양복을 맞추고 내 약혼반지를 샀다. 국화꽃 모양의 이 반지가 참 좋다. 오늘 밤만은 엄마 허락을 받고 끼고 자야겠다.
사랑 일기 자아와 진리를 고민하던 여고생의 일기가 첫사랑인 ‘승한 씨’를 만나면서 사랑과 설렘, 환희와 행복의 일기로 변했다. “형편이 좋지 않은 집에 시집가면 고생한다”는 지인들의 충고를 듣고 혼자 울다가도 승한 씨가 건넨 작은 차돌 두 개에 배시시 웃는, 그야말로 사랑의 계절이었다.
삐칠 때마다 입을 쭉 내민다고 데이트할 때 승한 씨가 붙여준 별명이 ‘오리’. 자신을 ‘도기 doggy’라고 부르던 승한 씨는 결혼 후 삼성 그룹의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바쁜 일과에도 오리를 지극히 사랑했다(오리와 도기의 애틋한 사랑과 에피소드는 39년이 흐른 요즘도 일기의 주요 내용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극진한 사랑의 환희와 그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극대한 절망. 그 고통의 간극을 눈물로 오가며 5년간을 보냈다. 온갖 노력을 했는데도 월경을 해 대성통곡한 날, 아이 없이도 행복하기로 약속하자며 남편이 아내를 다독이던 날, 아기를 주시지 않아도 지금의 행복에 감사하며 살겠다고 5년간의 투쟁 끝에 비로소 하느님께 마음을 낮추던 날이 일기의 3막에 남아 있다.
1979년 4월 1일 - 승한 씨! 빅뉴스가 있어요. 나 당신의 아기를 가졌어요. 기분이 어때요? 난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뻐요. 당신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 밤도 벽을 보고 혼잣말로 “승한 씨 안녕.” 인사해야겠어요.
엄정희 교수가 48년간 쓴 일기장.
거실 장식장에 놓인 오리와 도기. 오리와 도기는 부부가 서로를 부르는 애칭이다.
가족 일기 해외 주재원으로 런던에 간 도기와 떨어져 산 지 한 달이 되던 1979년 4월 1일, 혼자 병원에 간 오리는 드디어 임신 소식을 들었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도착하는 편지를 숱하게 주고받고, 도기가 떠난 지 6개월 만에 오리도 배 속 아이와 함께 런던 공항에 도착했다. 아들 성주와 딸 현주까지 낳은 4년간의 영국 생활에는 가족에 대한 감사, 양육의 행복, 삶의 경이에 대한 탄복이 넘쳐났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큰아들 성주가 초등학교 체육 시간에 넘어져 의식을 잃고 대학병원의 중환자실에 실려 가기 전까지, 오리의 일기장에는 삶이 곧 축복이요 축복이 곧 삶이라는 내용이 가득했다.
1986년 5월 29일 - 이 모든 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다니… 나는 매일 매일 어둠의 터널을 헤매고 있다.
의식을 잃고 1년을 중환자실에 있던 아들 성주가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리고 오리의 일기도 끊겼다. 그토록 경외하던 하느님께도 등을 돌렸다. 입술을 삐죽 내미는 오리가 아니라 깊은 상처로 숨조차 쉴 수 없어 입을 닫아버린 오리가 되었다. “생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수 있을까.” “조금이나마 나를 위로하고자 적어본다.” 1년쯤 지나 겨우 펼친 일기장엔 여전히 고통과 절망의 절규만 기록했다.
1988년 3월 어느 날은 의식을 잃어 병원에 실려 갔다. 희미한 의식에, 눈물을 닦는 도기를 보았고 유치원생이 된 현주가 엄마를 살려달라고 목 놓아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핏줄처럼 날 사랑해주는 승한 씨 그리고 너무도 귀여운 딸 현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오늘을 살아보자.” 그렇게 깨어난 오리는 일기장을 펼쳐 다짐을 적었다. 그러나 지쳐버린 심신은 사랑하는 아들 성주가 살던 시간에 머물러 좀처럼 돌아올 용기를 내지 못했다.
1988년 4월 6일 - 위 내시경을 했다. 위암이라고 한다. 성주를 떠나보낸 후, 난 이미 기쁨도 슬픔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나 보다. 위암 선고를 받았는데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으니 말이다.
애도 일기 친정어머니와 함께 간 병원에서 암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도 전혀 슬프지 않았다. 아들의 죽음에 오리가 가진 슬픔을 다 써버린 듯했다. 수술하고 항암 치료를 하면서 일기장에서 성주를 만났다. “생일이면 성주는 늘 키를 재곤 했는데, 올해 벌써 만 아홉 살인데 성주는 얼마나 자랐을까?” “현주가 9시에 꿈나라로 가고 나면 엄만 말할 상대가 없게 된단다. 이럴 때면 성주, 나의 아들 성주 네가 더욱더 그립구나. 보고 싶어 밤마다 베갯잇을 적신단다.” 3년 동안 독백을 하듯 일기를 썼지만, 성주를 떠나보낸 지 4년째 되던 해에는 그마저도 중단했다. 이 모든 슬픔과 고통을 속으로 삭이며 가족을 지켜야 했던 도기는 몸과 마음에 중병을 앓는 아내를 사랑으로 지켜내느라 고군분투했다. 해외 출장을 자주 가는 도기는 지구 어디에서든 오리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냈다. 아들과 이별한 지 7년째, 항암 치료를 받은 지 5년째 되던 1993년 괴로움의 터널에서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다고 오리가 스스로 깨닫도록 해주기까지 도기의 사랑은 지극했다. 충만하고 충실했다.
1999년 10월 11일 - 오리에게 나는 제일 미남도 아니고, 제일 멋쟁이도 아니고, 제일 부자도 아니지만, 사랑하는 오리를 만났기에 세상에서 제일 행운아랍니다. 내가 힘 있게 일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내 옆에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도기가 오리에게 숄을 선물한 일상의 에피소드와 사랑의 카드를 기록, 보관한 오리의 일기장.
연애 시절 도기가 오리에게 준 차돌 두 개는 40여년 간 간직해온 이 가정의 3대 보물 중 하나다.
치유 일기 결혼 23년 차 되던 해에는 딸 현주가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다. 딸은 대륙을 횡단하는 러브레터로 엄마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사이 삼성건설의 대표가 된 도기는 경영학에 이어 도시공학 박사 과정까지 밟으면서도 마치 ‘와이프 사랑해주기 경연 대회’에 나온 사람처럼 열심으로 오리를 예뻐해주었다(라고 1998년 3월 24일 일기에 쓰여 있다).
삼성유통이 영국 최대 유통 회사인 테스코와 합작해 탄생시킨 홈플러스의 초대 CEO가 된 도기는 예술 경영에 매진했고 가족 사랑에 더욱 헌신했다. 존경받는 회장님과 의젓한 따님. 그들이 손수 만든 편지, 카드, 선물을 붙여놓느라 오리의 일기장은 늘 배불뚝이였고, 슬픔이 비워지는 자리에 행복이 서서히 채워지면서 감사와 안식을 누리는 아름 다운 세월이 다시 시작되었다.
2005년 11월 25일 - 두목님에게 보내는 각서
1. 절대로 건강 해치지 않고 공부하겠습니다.
2. 즐기면서 공부하겠습니다.
3. 음악회, 연극 등 문화생활에 동참하겠습니다.
배움 일기 “사람은 연약해서 자기가 아팠던 만큼 딱 고만큼만 남을 품을 수 있다 했던가…”라고 일기에 쓴 날, 오리는 상담학 박사 과정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불임의 고통, 아들과의 이별, 암 선고와 투병 등 험한 길을 헤쳐나왔으니 자신이 아팠던 고만큼 남을 품을 수 있을 듯했고 그 믿음으로 결혼 30년 차, 남은 은퇴한다는 나이에 대학원 신입생이 되었다.
오리의 건강을 염려하는 남편에게는 각서를 쓰고 나서야 겨우 허락을 받았다. 바쁜 중에도 예술 감상만큼은 소홀히 하지 않는 남편의 문화생활에 성실히 동참하겠다는 아부 문항까지 써넣은 이 각서도 2005년 일기의한 페이지에 남아 있다. 다음 해, 결혼 1년 차 새내기 주부가 된 딸은 하버드 대학원을 졸업했고 그토록 바쁜 일정에도 도기는 와튼 MBA 코스를 마쳤다. 그야말로 온 가족에게 배움의 계절이 무르익었고, 배우고 노력하는 만큼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이루어가는 축복의 시간이 되었다.
2013년 2월 20일 - 각 신문에서 승한 씨 은퇴 기사를 싣고 있었다. 이제 현업 일선에서 은퇴하여 타이어를 갈고 사회봉사, 그리고 한국의 경영 이론과 경영 모델을 글로벌 스탠다드로 만들고 싶어 하는 새로운 비전을 향해 내딛는 그를 응원한다.
비전 일기 열정적인 CEO로 일한 남편의 은퇴 선물로 48년간(그중 39년은 남편이 일기의 주인공이다) 쓴 일기를 모아 책으로 펴냈다. <오리의 일기>. 가정주부로, 유명 CEO의 아내로, 상담 전문가로 살아온 48년의 기록은 한 가족의 역사, 한국 경영사의 자료, 한국 근대사의 한 토막, 그리고 기록 문학의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인생의 세찬 폭풍우가 놓고 간 선물은 놀랍게도 폭풍우보다 더 큰 평안이었다”라고 소회하는 오리. 그는 요즘 도기와 함께 새로운 내일을 준비하는 중이다. 연거푸 물어봐도 겸손하게 수줍게 말을 삼갔지만, 독자는 2013년 2월 20일의 일기를 읽으며 <오리의 일기> 후속 편을 눈치챈다. 무너져가는 가족과 부부를 위한 상담과 조언, 한국의 경영 이론 세계화에 헌신하기 위해 오리와 도기가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유쾌한 장면으로 채워질 ‘오리의 일기’ 제9막.
- 가족 상감 전문가 엄정희 교수 인생 8막 39장에 담긴 치유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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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뜻하지 않게 고통의 터널을 만나게 된다. 도면도 출구도 없는 암흑에 이르렀을 때 48년간 쓴 일기가 “은혜는 겨울철에 가장 많이 자란다”는 치유의 말로 엄정희 교수를 다독여주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