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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궁금해요] 사진가 배병우 씨 그에게서 퇴화하지 않은 것


붓 대신 사진으로 그린 소나무
<행복>은 표지에 상업적 이미지가 아닌 국내외 작가들의 순수 작품을 소개합니다.‘다음 달엔 어떤 작품을 감상할까’하는 기대에 매달 <행복>이 오는 날을 기다린다는 구독자가 많지요. 몇 년 전부터 좋아하는 표지를 액자에 넣어 감상하도록 정기 구독자 중 원하는 분께 텍스트 없이 인쇄한 표지를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독자들께 좋은 작품을 감상용으로 선물하려던 차, 드디어 창간 26주년을 맞아 사진을 한국 현대 예술의 중심으로 이끌어낸 배병우 작가가 찍은 소나무 사진을 표지로 채택하고 모든 독자께 별도의 감상용 프린트를 선물로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영혼이 담겨 있으며, 스스로 사물을 사물 이상의 것으로 만드는 힘이 배병우 사진의 특징인 듯싶다. 그의 소나무는 흡사 중력을 거스르고 꿈틀거리면서 솟아오르는 뱀같이 동물적이며, 땅 밑에 있는 대지의 에너지를 대지로 옮기고 있다.’ 전시 기획자 김영민 씨의 평론처럼 비평가들은 그의 소나무 작품을 자연이라는 사물이상으로 포착해낸 작가적 진화론으로 풀이합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먹의 바림이 만든 농담과 붓의 억양으로 완성한 힘찬 수묵화로 보이니 붓과 카메라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든다는 점에서는‘작가적 진화론’이 타당합니다.

하지만 헤이리의 작업실로 찾아가 삼복더위에 오수 대신 조수와 맹렬하게 탁구 치는, 주방에 서서 제자뻘인 손님 앞에 생존 요리 한 상을 멋지게 차려주는 ‘현상’을 보며 <행복> 독자께 ‘작가적 진화론’ 대신 ‘그에게서 퇴화하지 않은 것’을 설명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외국에서 먼저 인정받은 소나무 사진
흙의 대지에서 난 농산물을 진열해 파는 가게를 상상해보지요. 대지의 기운을 깨닫는 데 자신 있던 한 농부는 흙에서 쑥 뽑아낸 당근을 그대로 진열했습니다. 그 옆에는 디자이너가 형이상학적 무늬로 디자인한 총천연색 케이스에 담긴 당근도 있지요. 도시 생활로 텁텁한 흙냄새에 무감해지고 강렬한 색채에 반응하게 된 주부들이 포장된 당근 먼저 장바구니에 담아가니, 흙 당근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외국의 초원에서 자라 흙냄새를 잘 분별하는 주부가 우연히 이 당근을 보았습니다. 흠 없이 묵직한 게 대지의 에너지가 충천해 보였고, 날렵하게 쭉 뻗은 모양에서 뽑아낸 농부의 숙련함이 느껴져 그 당근을 그의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래서 무명의 당근이 유명의 당근이 되었지요. 예컨대, 이 당근이 곧 배병우 작가의 소나무 사진 같습니다.

배병우 작가는 1984년경, 30대 무렵부터 소나무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단원 김홍도나 겸재 정선의 한국적 그림에 관심이 많았고, 그림에 등장하는 소나무에서 한국의 미를 느꼈다고 하지요. 그때부터 전국의 소나무란 소나무는 다 찍었고, 처음 1년은 10만 킬로미터씩 답사한 끝에 천년 고도 경주의 소나무가 최고라는 답을 얻었습니다. 경주의 왕릉 주변엔 반드시 소나무가 자라는데, 이 소나무는 죽은 이의 영혼을 안식시키려 심은 것으로, 베어버리는 나무가 아닌 경배의 의미가 깃든 나무입니다. 그때부터 작가의 나이테가 6학년 4반으로 진학한 지금까지, 그는 30여 년간 소나무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소나무 사진이 세계적 명작으로 인정받은 것은 50세가 다 되어서였지요. 자연이 숭고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찰나와 대면하는 감동으로 수묵화인지 사진인지 셈하려는 관객의 기계적 사고가 일시 정지되는 배병우 작가 사진의 가치는 한국이 아닌 외국 미술계에서 먼저 인정했습니다. 색채와 의도로 진화하는 대신, 자연을 대하는 감각의 퇴화를 막으려고 30년간 한길로 쉬지 않고 걸어온 그의 작품에 그제야 비로소 한국을 포함한 세계인이 경의를 표하게 된 것이지요.


배병우 작가는 전남 여수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미대에서 디자인을 공부했고 최근까지 서울예대 사진과 교수로 재직했다. 한국의 자연, 특히 소나무 시리즈로 유명해졌으며 오름과 바다, 종묘와 창덕궁, 스페인의 알람브라 궁전 등을 작품에 담았다. 프랑스 3대 고성 중 한 곳에 초대받은 그는 국내에서 진행 중인 여러 가지 작업을 마무리하는 대로 그곳에 머물며 왕궁 깊은 곳에서 오래도록 자란 소나무를 렌즈에 담을 계획이다.

걷고, 치고, 기대하다
인류가 퇴화하는 사이, 자신만은 퇴화하지 않도록 배병우 작가가 일평생 붙드는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걷기’이지요. 그는 자신이 경주에서 중국 시안까지 순례하고 돌아와 <왕오천축국전>을 쓰고 다시 시안을 향해 10년간 걸은 혜초 스님 이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걷는 사람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소나무를 찾아 자연으로 나가면 나는 육체 노동자예요. 산으로 한 걸음 더 올라갈 수 있느냐 더 내려올 수 있느냐에 따라 작품이 좌우되니까요.” 이 이야기는 그의 사진의 명확한 정체성과 유명함 때문에 “배병우 이후에는 소나무 사진은 찍을 수 없게 되었다”고 푸념하는 사진가들에게 일갈합니다. 어스레한 새벽녘 운 좋게 모양 좋은 소나무를 만난들 퇴화한 다리와 깊이 없는 자연 이해 능력으로 대작이 탄생할 리 만무하지요.

인터뷰를 위해 방문한 반나절, 그는 좀처럼 앉지 않았습니다. 수시간 탁구를 쳤고, 서서 요리를 했고, 다시 탁구를 치고, 생명수라 부르는 맥주한 병으로 땀을 식히고 또다시 탁구를 쳤습니다. 인터뷰 전날엔 제주의 바다를 찾아 걸어 다녔고 인터뷰 다음 날에는 신안 가거도를 또 걷는답니다. 그러니 하루쯤 편히 쉴 만도 한데 서서 탁구를 치고 또 칩니다. 소나무를 찾아 걸어 다닌 건 30년, ‘탁구 잘 치는 사람이 왕’인 동네 탁구장 두 곳과 탁구대를 가져다놓은 헤이리의 작업실에서 탁구를 친 건 15년째입니다. “사냥과 채집을 하던 원시인은 하루에 15km씩 걸어 다녔는데 지금 서울사람은 출퇴근길에 700m나 걸을까요. 그러니 그사이 인류의 체력과 다리가 얼마나 퇴화했겠어요.” 그의 말처럼 인류는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걷는 능력의 퇴화를 빛의 속도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인도와 자전거 도로는 좁아지고 자동차가 가는 길만 계속 넓어지니 퇴화 방지를 위해 전진할 곳이 원시인들이 사냥과 채집을 하며 누비던 숲일 수밖에요. 배병우 작가는 30년간 숲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그 사이 채집한 소나무와 오름, 바다 사진의 수는 얼마나 많을까요. 그러나 그중 그가 직접 임금께 진상하듯 암실에서 분별해 간택하는 작품은 세계미술계의 컬렉터가 앞다투어 소장하고 유명 도시의 미술 경매에서 높은가격에 낙찰될 만큼 극소수입니다. 그러니 그의 소나무 사진은 다리의 퇴화를 막고 육체의 노화를 이기고 자연의 기운을 통찰하며 30년간 채집한 배병우 사진의 ‘정수 중 정수, 진액 중 진액’이지요.

그 진액을 <행복> 독자가 가정에서 소장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흔쾌히 허락해주신 배병우 작가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는 그가 경주의 소나무를 찾아가기 이전인, 작가 인생의 기원전부터 <행복>과 맺은 우정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 특별한 선물을 계기로 독자 여러분도 그의 작품을 가까이 두고, 작가와 우정을 쌓으시길 바랍니다. 유럽 컬렉터의 초대와 전시 개최 준비로 벨기에와 프랑스의 고성에 머물며 채집할 새로운 소나무 사진을 <행복> 독자께 조만간 다시 소개하기를 기대합니다.

글 김민정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