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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강진이 씨 가족 일기 그리는 엄마
일기는 개인의 메모이고 가정의 유산이자 넓게는 동시대 삶의 기록이다. 소박한 글과 정겨운 그림으로 일기를 쓰는 강진이 작가의 작품에는 그녀의 생이 있고, 가족의 삶이 있고, 같은 세월을 사는 우리의 추억이 들어 있다.


“아이들이 자랄 때까지 저는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어요. 대신 동화 일러스트 작업을 했는데, 그림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답답해 아이들을 재우고 짬짬이 일기를 쓰지 않으면 내 존재가 없어질 것 같았죠.”

초등학생 때부터 일기를 쓴 강진이 씨는 미대생에서 어머니로 역할이 변한 후에도 한결같이 일기를 썼다. 초등학생의 삐뚤빼뚤한 그림일기가 미술학도의 완숙한 스케치 일기로 바뀌었고, 아이를 가졌을 때는 그 어느 때보다 고운 서체와 아름다운 문장으로 태교 일기를 써 지금 보아도 놀랍다. 아이들이 자라 강아지처럼 나가 놀 때는 메모지를 가지고 다니며 짧은 여행 일지처럼 일기를 썼다. 아이들과 산책 가서 나뭇잎을 만지는 장면, 첫아이가 중학교 교복을 입은 모습을 보고 감동한 일 등을 간단히 스케치하거나 순간의 감정을 메모하는 방식이다. 집에 돌아와서 그 메모를 일기장에 옮겨 쓰거나 바쁜 날엔 메모지를 찢어 일기장에 붙인다. 신문에서 내 의견과 비슷한 글을 발견하면 이를 오려 일기장에 붙이기도 하고, 친구들과 공유하는 SNS에 올린 내용을 그대로 썩혀두기 아까워 조용히 일기장에 옮겨 적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의 일기 쓰기가 그의 생애에 걸쳐 지속되고 있다. 

일기장에서 발견한 ‘나’ “5년 전쯤, 우연히 옛날에 쓴 일기를 읽으며 ‘결혼하고 아이 낳고 내 인생이 참 순조로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태어나 돌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성장하면서 힘들 때도 있었죠. 하지만 어려웠던 감정과 상황이 일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도 그때를 잘 넘겨 현재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일기의 힘이죠.”

오랫동안 막힌 터널처럼 답답하던 그림에 대한 갈망에도 그즈음 빛이 스며들었다. “추억과 기억이 담긴 일기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려보자”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따랐더니 편집자의 요구에 맞춰 삽화를 그리던 때의 딱딱함이 사라지고 ‘살아 있는 인생’의 유연한 이야기와 화풍이 그림 속에 녹아들었다. 지난 5월에 가나아트 스페이스에서 열린 개인전은 긴 터널에서 벗어난 작품을 세상에 선보인 자리. 일면식도 없는 관람객이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혼자 와서 그림을 보고 간 어떤 이는 아이를 데리고 다시 찾아오고, 방명록에 장문의 글을 남긴 사람 등 큰 호응을 얻었는데, 이는 그림이 감상하는 이들의 일기장이 되어 옛 추억을 현재로 데려왔기 때문일 테다.


1 ‘별과 나 그리고 딸, 딸’, 24×41cm, acrylic on canvas, 2013.
2 ‘페인트 칠’, 33.2 ×24.5cm, acrylic on canvas, 2013.
3 ‘원피스’, 24.2×24.3, acrylic on canvas, 2013.


일기를 낭독하는 아이들 엄마가 일기 쓰는 습관을 들이면 아이들도 일기를 쓰며 자란다. “사회생활을 해보니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는 것이 참 중요하더라”는 아빠의 요청으로 강진이 씨 부부와 두 딸은 큰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부터 중학교 3학년이 된 지금까지 매주 일요일 밤 가족회의를 한다. 가족이 모여 각자 일기를 발표하는 시간이다. 아이들이 일기를 발표하고, 아빠는 책에서 본 좋은 문장이나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글을 발표한다. 강진이 씨는 아이들이 어릴 때 쓴 엄마의 일기를 낭독하는데, 때론 생경해하고 때론 창피해하며 아이들은 타임머신을 탄 듯 자신의 어린 날을 여행한다.

중학생이 된 딸들이 최근 프라이버시 보호를 주창하며 일기를 발표하는 것을 꺼리자 일기 대신 관심이 가는 ‘어떤 것’을 설명하는 설명글 발표로 방식을 바꾸어 7년째 가족회의를 이어가고 있다.

“일기 쓰고 그림을 그리며 ‘나’를 찾으면서 아이들에게 감정적으로 소홀해졌습니다. 사랑이 식는 게 아니라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던 시선에 여유가 생겨 저와 아이들의 삶 양쪽에 다 숨통이 트이는 거죠.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니 아이도 엄마도 스트레스가 줄었어요.”

매일 쓰는 일기는 자신과 가족을 관찰하는 힘을 키워주기도 한다. 의도가 아닌 습관이 길러주는 통찰력이다. 예를 들어 큰아이 이준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선생님이 아이가 내성적이라고 걱정했지만, 부모는
오히려 우리 집 장녀는 말을 재미있고 엉뚱하게 하는 아이라고 판단했다. 받아쓰기 공책을 가리켜 “엄마, 선생님이 깍두기 노트 사오래요”라고 말하거나, 잔설이 남은 산을 지나면서 “산에 눈 누릉지가 남았어요”라고 말하거나, “다람쥐가 겨울잠을 자며 맛있는 걸 꿈꾸려고 해요”라고 하던 아이의 신기한 말을 엄마의 일기장에 ‘날것’ 그대로 기록해놓은 덕분이다. 얼마 전에도 엄마와 대화를 하다 “배고픈 사람 앞에 김치찌개 갖다 놓은 것 같잖아요”라고 기막힌 비유를 하는 아이의 말솜씨에 탄복해 일기를 썼다. 그 일기를 모아 이준이의 기발한 어록 노트를 만들었다고 하니 아이의 인생에 이 얼마나 값진 선물인가!


1 ‘호피무늬 잠옷’, 27.3×22cm, acrylic on canvas, 2013.

일기는 가족의 역사 지난 5월에 연 개인전에는 강진이 씨의 그림, 실제 일기 구절 그리고 이준이의 미니어처 작품을 함께 전시했다. 그래서 전시 제목도 <엄마와 딸이 함께하는 이야기-일기>라고 붙였다.

“아이가 일곱 살 때 우연히 미니어처 전시회에 데려갔는데, 그런 걸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찰흙을 사주었는데 다양한 재료를 원하기에 집짓기 나무 세트도 사주었어요. 그런데 안내서에 나온 대로 집을 안 짓고 제멋대로 나무를 잘라 가구를 만들더라고요. 자기가 좋아하는 피아노, 엄마가 그림 그리는 책상 같은 것을요. 미니어처 사이트를 찾아보며 제 맘에 드는 것을 혼자 만드는데, 점점 실력이 향상돼 꼼꼼하고 정교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면 놀라워요.” 강진이 씨 집 한쪽에 놓인 장식장에는 이준이가 만든 미니어처가 가득 놓여 있다. 엄마가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2차원의 캔버스에 그려낸다면, 이준이의 미니어처는 3차원으로 승화시킨 일기다. 누구와 의논하거나 의도하지 않았지만 일기 쓰는 좋은 습관이 딸에게도 엄마에게도 감정의 환기구가 되는 특별한 취미이자 특기를 만들어준 셈이다.


2, 4, 5 메모를 붙이거나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일기장. 3 ‘돌잔치’, 27×34.7cm, acrylic on canvas, 2013.
6 그날 입은 옷이 마음에 들어 그려 놓은 대학 시절 일기장.
7 딸 주이준의 미니어처, ‘엄마의 책상’, 13.5×14×8cm, 혼합 재료, 2012.


주제가 비슷하고 방식이 다르니, 함께 전시해보면 어떨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는 아빠는 홍보 담당을 자처했다. 아내 그림의 밑그림을 몰래 자신의 SNS에 소개하고 그림의 중간 과정, 완성 단계를 업데이트했다. 전시 팸플릿이 완성되자 딸의 작품도 함께 전시한다는 특별 안내문을 직접 제작해 지인들에게 발송하는 세심함도 발휘해 가족을 놀라게 했다. “일기를 쓰면 모든 시절이 위대한 순간으로 기억되는 듯해요. 돌이켜보니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순간이었네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것을 지난 일기를 읽으며 깨닫게 되죠. 좋았던, 억울했던, 슬펐던 감정이 어우러져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 일기는 ‘잘 겪어낸 기록’이고, 그래서 일기를 쓰면 감사하는 마음을 선물로 얻는 것 같아요.” 일기를 쓰며 ‘나’를 찾고 일기를 전시하며 ‘우리’를 확인한 가족. 일기는 가족의 문화유산이고 가족 역사의 박물관이다. 그 속에 채울 소장품이 이리도 많으니 이 가족의 미래는 그 얼마나 풍족하고 행복할 것인가.

일기장에 글쓰기가 어려울 때 먼저 그림을 그려보세요.
강진이 씨는 일기장을 펼쳤는데 쓸 내용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는 오늘 하루 가장 좋았거나 혹은 힘든 장면을 간략하게 그려보라고 권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림이 글을 불러온다. 혼자만 보는 일기장이니 그림 실력을 고민할 이유가 없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날이면 추상화 같은 그림이 될 수도 있고, 어느 날은 명확한 정물 한 컷이 하루의 이야기를 대신 할 수도 있다. 그림도 글도 정 안 되는 날에는 차트를 적듯 점을 찍고 간단하게 그날의 주요 일정을 메모해보자. 갑자기 기억을 더듬어야 할 때 메모만 보아도 그날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다.
글 김민정 기자 | 사진 이명수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