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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 제안서] 전주 소리 여행 느릿느릿 걷고 호사롭게 먹고 신명 나게 웃다
팔작지붕이 오목조목 내려앉은 전주한옥마을에 들어서자 나지막한 담장 너머 천리향 향기가 떠다닌다. 시간이 멈춘 마을, 고즈넉한 길을 느릿느릿 탐닉하며 1박 2일의 시간을 보냈다. 전주 막걸리에 홍어전을 곁들여 명창이 노래하는 마당 창극 <천하 맹인이 눈을 뜬다>까지 관람하니 눈과 귀가 모두 호사다.


심 봉사를 맡은 왕기석 명창, 심청 안숙선 명창의 감동적인 소리 한판 들어보시길! 황 봉사 역의 이순단, 뺑덕이네 김성예 명창의 감초 연기도 볼거리다 .

고즈넉한 한옥마을 골목.


이상이 담긴 땅, 전주 하늘은 천 평이고, 땅은 말랑말랑하고, 바람은 부드럽다. 높은 건물이 없으니 조금만 고도가 높은 곳에 서면 한옥의 안뜰이 내려다보인다. 사방이 오밀조밀한 골목길에는 삼삼오오 여행자들의 탐색이 이어진다. 흐벅진 야생장미가 기와 담장을 타고 청명한 하늘과 오롯한 대비를 이루고, 한옥의 널찍한 대문 사이로 바람이 넘나든다. 기온은 꽤 높은 편이지만 처마 밑에 앉으면 금세 시원해진다. 그렇게 전주는 아름다웠다. 정갈하고 품위 있었으며 허물이 없어 사람들이 경계를 내려놓고 이곳저곳을 들렀다. 조선 전기의 학자 서거정은 그의 책 <공북루기拱北樓記>에서 전주를 “아조선근본지지牙朝鮮 根本之地(우리 조선의 근본이 되는 땅)”라 예찬했다. 또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전주를 “토양이 비옥하고 물자가 풍성해 살기 좋은 땅”이라 칭송했다.

골목길 탐닉 “어라, 벌써 길의 끝자락이네?” 한옥마을의 대로변을 따라 걸으니 서울의 인사동 못지않게 길이 짤막하다. 전주문화재단의 송은정 팀장은 전주한옥마을의 본모습을 보기 위해선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에 들어서니 대로변의 웅성거림은 차츰 잦아들고 귀가 열려 작은 벌레의 울음소리도 낭창낭창 들린다. 새로 지은 한옥 사이사이에는 세월의 더께가 가득 내려앉은 낡은 문짝의 한옥도 있다. 관광지처럼만 보이는 이곳이 실은 오랜 시간 터를 잡고 살아온 주민의 터전이다. 한옥 체험 문화 공간 ‘삼도헌’의 이근영 실장의 말에 따르면 한옥마을이 조성된 것은 1920~1930년대였다. 일본인의 세력 확장에 반발한 전주 시민이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만들기 시작했고, 1960년대 이후에는 전국의 집 장사꾼이 모여 한옥을 지어 분양했다. 전북 최고의 명문 중·고등학교가 밀집한 탓에 익산, 군산 등지에 사는 부모들이 자녀를 유학시키면서 종갓집처럼 규모가 큰 한옥들 사이사이로 방 두세 칸짜리 작은 한옥들이 들어섰다. 한옥마을의 큰 집과 작은집의 오밀조밀한 구조는 이때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옛것과 새것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아련한 감성이 곳곳에 흐른다.

1, 5 한지 수첩, 전통 부채, 목판 인쇄 체험 등 한옥마을 곳곳에는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이 많다.
2 기와와 전돌을 소재로 만든 전주한옥마을의 옛 담장은 골목길의 운치를 더한다.
3, 4 마당 창극을 시작하기 전에는 솜씨 좋은 어머님들이 직접 만든 잔치 음식과 전주 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
6 풍물패와 연기자들의 흥겨운 연주와 노래로 마당 창극이 시작된다.

7
풍남동 부녀회가 이틀간 준비한 푸짐한 잔칫상은 공연 전에 즐길 수 있는 별미.


내 몸이 기억하는 문화 체험 전주한옥마을을 알차게 즐기려면 네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도심의 속도와는 다른 공간이니 느릿느릿 걸어야하고, 나무·바람·된장찌개·찻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도록 오감을 열어야하고, 내 삶에 깊숙이 스미도록 무언가 하나를 만들어가야 하며, 전주 소리문화관에서 열리는 마당 창극을 보며 소리에 취해야 한다.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 마당 창극 <천하 맹인이 눈을 뜬다>는 그것을 모두 만끽할 수 있는 기특한 공연이다. 전통문화 체험과 잔치 음식 맛보기, 공연 관람이 한 장의 티켓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후 5시가 되자 서둘러 전통문화 체험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소리문화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완판본문화관에서 목판 체험을 하기로 했다. 전주는 학자가 많아 책이 잘 팔렸고 한지가 대량생산되었으며 목판을 제작하기 위한 목재와 기술력이 우수했다. 한글 대중화 교육이 가장 융성하던 곳도 전주다. 서민들의 요청으로 판매한 방각본이 많이 간행된 역사를 보더라도 전주의 서민 문화가 얼마나 발달했는지 알 수 있다. 완판본(전주에서 발간한 옛 책과 그 판본) 한글 고전소설인 <춘향전>을 그대로 복사한 체험용 목판에 먹물을 바르고 직접 한지에 찍어보았다. 언뜻 보기엔 책을 넘기는 것만큼 쉬워 보이지만, 먹물을 균등한 압력으로 차근차근 바르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먹물이 약간 뭉치기는 했지만 제법 그럴싸한 인쇄물이 나왔다. 여러 장의 한지를 한 장 한 장 엮어 제본까지 하면 목판 인쇄 체험은 마무리. 내손으로 야무지게 만든 책이라 소장하는 즐거움도 남다르다. 부채, 목판, 풍물, 다도, 막걸리 내리기, 한지 수첩 만들기 등 일곱 가지 전통문화 체험중 한 가지를 골라 체험할 수 있다.

막걸리 들이켜며, 마당 창극에 울고 웃다 이번 전주 여행에서 가장 고대한 건 마당 창극이다. 판소리가 어르신이나 즐기는 문화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솔직히 공연을 보기 전에는 <심청전>을 배경으로 했으니 무대도 뻔할 것으로 생각했다. 정오가 되기 전에 좌석이 매진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궁금증이 생겼다. 마당 창극은 짠 내 나는 서민의 삶을 구수하게 솎아주고 위로하던 조선의 인기 드라마였다. 그 안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잔치 음식이 아닌가! 공연 시작한 시간 전인 7시부터 풍남동 부녀회가 이틀 내내 준비한 잔칫상이 펼쳐졌다. 남색 치마에 꽃분홍 저고리와 모자로 곱게 차려입은 어머님들은 음식 만들기가 고돼 다신 안 한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2년째 음식 준비를 도맡아 하고 있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음식들을 쳐다보는 내 입으로 홍어전 세 점이 훅 들어왔다.
“겁나게 맛있제. 마이 묵어부러!” 각종 전과 떡, 약과, 수육, 도토리묵, 수박 등과 함께 시원한 전주 막걸리가 한가득 차려졌다. 음식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자, 야외 마당이 왁자지껄해졌다. 전라도 어머니들의 손맛이야 의심할 나위가 있을까! 목 넘김 좋은 전주 막걸리와 맛있는 음식, 사람들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와 살랑살랑 부는 저녁 바람의 기운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앞에서 뒤에서 옆에서 달려오는 풍물패와 함께 배우들이 우르르 무대 아래로 내려와 흥을 돋웠다. 시원스러운 목청과 심장을 울리는 타악기의 어울림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엉덩이가 들썩이는 것 같다. 누군가 손을 낚아챘다면 어깨를 들썩이며 한바탕 춤도 췄을지 모른다.
명창의 소리를 이렇게 가까이 들어본 적이 있던가! 심청을 연기한 안숙선 명창과 심 봉사를 맡은 왕기석 명창의 소리는 모든 세포가 집중할 정도로 흡입력이 있었다. 더불어 무대를 휘어잡은 것은 뺑덕이네 김성예, 황 봉사 이순단 명창이다. 해학과 유머가 가득한 몸짓과 소리는 관객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공연 기간에 따라 출연진이 다르다). “아이고 아버지, 여태 눈을 못 뜨셨소~” 하고 심청이가 흐느끼며 길고 긴 독백에 이어 심 봉사가 “청아~!”하고 눈을 뜨는 장면에서는 고요한 관객석에 훌쩍이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조금 쑥스러운 일이지만, 나 또한 그 절절하고 서러운 가락에 흠뻑 빠져 눈물을 주르륵 흘렀다. 화려한 퍼포먼스를 펼치는 풍물팀과 비보이 맹인까지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열정적 무대였다. 가족 모두 즐길 수 있는 무대로 오랫동안 추천할 것 같다.


8, 10 한옥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는 삼도헌.
9 원하는 날짜에 맞춰 편지를 전달하는 느린 우체통.


진짜 전주 여행은 한옥 숙박 체험 한옥 숙박을 포함한 ‘전주소리 여행 스페셜 패키지’를 신청하면 전주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한옥 ‘삼도헌’에서 머물게 된다. 천리향나무가 은은한 향기로 인사하는 이곳은 사방이 바람길이다. 창문을 열면 담장 너머 초록 덩굴과 하늘이 그대로 시선에 박히고, 툇마루에 앉으면 정갈한 고요와 만난다. 그 옆으로는 대한 제국 황실의 마지막 후손 이석 선생이 실제로 살고 있는 승광재가 있어 종종 어르신과 인사를 나누게 된다. 안채와 사랑채, 별채가 구분되어 있으며 종종 판소리와 국악 연주 등을 감상할 수 있는 작은 음악회가 열린다.
한옥마을에는 1백여 개의 한옥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대부분 개인이 운영하는 곳이라 분위기도 제각각이지만 전통을 살리면서 편의를 현대화한 한옥이다. 전주에서 한옥 숙박을 하지 않으면 전주의 속살을 반만 경험하고 가는 것과 같다. 전주에 오시거든 한옥에서 보내는 밤을 놓치지 말기를! 달빛이 충만하게 비추는 안뜰에 앉으면 시간이 멈춘 것 같다. 그리고 하루가 너무 짧다고 느껴졌다. 이토록 매력적인 전주에 다시 오는 날에는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주인장이 있는 한옥에 오래 머물고 싶다. 그리고 옛것의 아름다움과 한옥이 주는 아련한 정서를 만끽하리라.

전주 소리 여행 스페셜 패키지
매주 토요일 오후 8시에 열리는 마당 창극 <천하 맹인이 눈을 뜬다> 관람(10월 5일까지)과 함께 한옥 1박, 전통문화 체험, 잔치 음식 그리고 아침 콩나물국밥까지 즐길 수 있는 스페셜 패키지다. 2인 커플과 4인 가족에게 제공하며 가격은 각각 11만 5천 원, 18만 원. 패키지가 아니더라도 공연 입장권(2만 5천 원) 한 장으로 공연 관람과 전통문화 체험, 잔치 음식 을 즐길 수 있으며, 보호자 동반 미취학 어린이는 무료다.
예매 1588-1555 문의 및 예약 063-283-0223

후회하지 않는 한옥마을 주변 맛집 추천!

반야돌솥밥
들에서 나는 곡식과 채소로 밥을 짓는다는 뜻의 반야돌솥 밥은 돌솥밥의 원조. 시원한 모주 한 잔 곁들이면 나랏님 밥상 부럽지 않다. 주소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2가 1156-6 문의 063-288-3174 전주왱이콩나물국밥 전주 특유의 기후와 토질때문에 생기기 쉬운 풍토병을 달래고 순화시키는 음식이다. 속풀이 시원하게 해주는 말간 국물에 펄펄 끓이지 않아 후루룩 먹기 좋은 별미다.
주소 전주시 완산구 경원동 2가 12-1 문의 063-287-6980

베테랑칼국수 1977년에 문을 연 칼국수와 만두 전문점이다. 통들깨와 김을 잔뜩 얹어 나오며 면은 얇은 편이라 먹기 편하다. 콩국수는 고운 빙질의 얼음 가루에 콩가루가 잔뜩 얹어 나오는데 설탕을 듬뿍 넣어 달곰하게 먹는 것이 포인트. 이토록 진한 콩물을 먹어본 적이 없다.
주소 전주시 완산구 교동 85-1 문의 063-285-9898

외할머니솜씨 여름엔 팥빙수를, 겨울엔 단팥죽을 파는 빙수 가게다. 빙질은 거친 편이지만 흑임자 가루와 큼지막한 찹쌀떡이 올라간 옛날 흑임자 팥빙수는 그 크기도 푸짐해 두 명이 먹어도 충분하다.
주소 전주시 완산구 교동 113-4 문의 063-232-5804

 
취재 협조 전주문화재단(063-283-9225) 

글 신진주 기자 | 사진 이경옥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