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을 시작으로 <도전! 지구탐험대> <세계테마기행> 등 해외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왔다. 첫 여행 에세이이자 술 기행서인데, 어떻게 출간하게 되었는가? 10년간 해외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 민속 증류주를 접할 기회가 많았고, 그 이야기를 지인들과 함께 나누는 과정에서 출판 제의를 받았다. ‘술 기행’이 아닌 ‘다큐멘터리 촬영’이라는 중요한 목적이 있었기에 취재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촬영이 끝난 저녁에 카메라를 내려놓고 지역 사람들과 나누는 술 한잔은 ‘진짜 여행’이었다. <스피릿 로드>는 그렇게 시작됐다.
특별히 전통술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있는가? 난생처음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취재를 갈 때 선배가 그라파를 사오라고 부탁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유럽에는 각 나라를 상징하는 전통술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당시엔 입도 대지 못했고, 한참 후인 2004년에 ‘그라파’라는 도시를 직접 찾아 어렵게 그 맛을 보았다. 위스키보다 가격은 훨씬 저렴하면서 맛은 더 좋더라. 이후 그라파처럼 그 나라나 그 마을을 대표하는 전통술에 관심이 높아졌다.
“좋은 술이란 이야기가 가장 풍부한 술”이라고 책 에필로그에 썼다. 어떤 지역에서 한 민족이 살아온 이야기의 정수精髓라고 표현했다. 좋은 술일수록 풍부한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전통술은 역사를 이해하는 큰 네트워크다. 수단의 도시 와우에서 수수로 만든 전통 증류주 ‘아라기’를 만났다. 음주가 불법인 모슬렘 국가에서 지역 사람들과 함께 아라기를 나누어 마시며 술이 종교보다 오래됐겠구나 생각했다. 한국의 개성에도 ‘아라기’라는 술이 있는 걸 아는가? 이름의 뿌리를 좇으면 그 근원은 ‘아랍’이다. 인류 최초의 증류주가 아랍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아랍에서는 ‘아락(아랍어로 농축이라는 뜻)’, 터키에선 ‘락기’로 불린다. 우리나라에 ‘아라기’라는 술이 존재하는 이유 또한 아랍과 교류했기 때문이리라. ‘알코올’ 또한 아랍어에서 왔는데, ‘(눈 화장 등에 쓰는) 고운 가루’라는 뜻의 ‘알 쿨Al Kuhl’이 어원이다.
루마니아의 빨링꺼, 수단의 아라기, 브라질의 아구아르디엔떼 등 책을 통해 참 다양한 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각국의 전통술 대부분을 맛본 셈인가? 전혀! 술은 엄청나게 방대한 문화이고, 나는 극히 일부만 시음했다. 운이 좋게 각국의 전통술을 많이 접할 기회가 있었을 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무장 해제하고 친구가 될 수 있는 메신저 역할, 술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그렇다면 이번에 책에 소개하지 못해 아쉬운 전통술이 있는가? 몽골의 마유주. 말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 술이다. 몽골에 촬영 갈 때마다 마실 기회를 노렸는데, 아쉽게 그러지 못했다. 방송 취재 위주이다 보니 개인적 시간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늘 안테나를 곤두세우고 있지만, 가끔 인연이 닿지 않은 술도 있다.
“농가의 소녀들이 맨발로 포도 알갱이를 으깨던 현장의 냄새. 식도를 타고 달리는 불길, 머리를 풀어헤친 발레리나의 광기 어린 춤 같은 과일 향기” 등 술맛을 묘사한 내 문구가 인상적이다. 맛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형체니까. 다행스럽게도 내가 이야기를 표현하는 일을 계속하다 보니 절로 비유가 되더라. 현장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경험하는 술맛만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니다. 시간과 사람, 분위기와 상황 등 복합적인 결과이기 때문에 맛을 느끼는 자세도 남다를 수밖에!
여러 술 중에 루마니아의 빨링꺼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여전히 유효한가? 가장 사랑하는 술이다. 당시 마신 술을 맛보려면 루마니아 산골 마을까지 다시 가야 한다. 산골에 사는 할머니가 본인의 과수원 과일을 마차로 나르며 만든 순도 높은 귀한 술이다. 5L를 겨우 챙겨 왔는데, 현재 3L 남짓 남았다.
책의 첫 장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아포리즘 “좋은 술이 없는 곳에 좋은 삶이란 없다”로 시작한다. 여행지에서 술은 어떤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가? 취재를 하면 자연스레 그 지역을 참 좋아하게 된다. 한국에 돌아와도 문득문득 그립다. 그럴 때마다 그 나라의 음악을 들으며 전통술을 마시면 순간 이동하는 착각에 빠진다. 여행에 술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기왕이면 지역 주민을 만나야 제대로 여행했다고 생각한다. 그때 그 나라의 술을 곁들이면 환상의 궁합이 따로 없다.
취재 목적이 아닌 순수한 ‘여행’은 자주 하는 편인가? 늘 여행을 꿈꾸지만 자주 못 간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여행. 아! 그건 꿈이다.
여행 에세이 <스피릿 로드>, 시공사 다큐멘터리 PD이자 오지 여행 전문 PD로 불리는 탁재형 씨의 음주 기행기. 나라 밖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특별한 경험은 그 나라의 술을 마셔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직접 경험한 총 스물여섯 가지 전통술 이야기를 풀어낸다. 13년간 해외를 떠돈 이 술 좋아하는 프로듀서는 말한다. “세상은 넓고, 맛있는 술은 많다!” |
장소 협조 비플러스엠(02-336-7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