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정을 중심으로 ㄷ자 형태의 건축은 전면 유리창으로 이뤄져 빛이 자유롭게 드나든다. 자연광에 취약한 도서를 고려해 서가는 빛의 각도에 따라 일광에서 물러난 곳에 설치했다.
시간에 따라 태양이 움직일 때마다 빛은 뺨에서 손으로, 손에서 책 속의 문장으로 옮겨간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면 하늘이 천 평이다. 책장을 넘기면 그 안에 담긴 생각이 내 머릿속에 고스란히 저장되고, 몸은 금세 녹진녹진해진다. ㄷ자형 건물에 빛이 떨어지면 전면이 유리창인 도서관 내부는 빛으로 가득 찬다. 창가에 앉아 온갖 책을 옆에 쌓아놓고 책장을 찬찬히 넘기며 온종일 머무르고 싶다. 빛과 그림자, 책과 고요가 뒤덮인 명상의 공간, 바로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다. 도서관에 들어와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빛이라면 그다음은 가지런히 정렬된 책이다. 책장의 각 선반에는 책이 70% 정도만 채워져 있다. 각기 다른 책 높낮이가 만들어내는 리듬과 책장이 주는 여백의 조화가 지극히 평온하다. 책에 눌리는 공간이 아니라, 책과 어우러진 공간이다.
1만 1천5백 권의 책을 만나다 한국 정서와 도시 감성이 공존하는 땅, 가회동 북촌마을에 자리한 도서관은 이름 그대로 디자인을 주제로 특화한 공간이다. 실용적이고 모던한 현대 디자인의 시작이라 불리는 바우하우스Bauhaus 이후의 디자인 관련 도서 약 1만 1천5백 권이 꽂혀 있다. 현대카드 디자인랩을 비롯해 뉴욕 현대미술관 수석 큐레이터인 파올라 안토넬리Paola Antonelli, 알렉산드라 랜지Alexandra Lange, 저스틴 맥거크Justin McGuirk가 북 큐레이터로 동참했다.
“영감을 주거나(Inspiring), 문제의 답을 제시하고(Useful), 다양한 범위를 포괄해야(Wide-ranging) 한다. 또 해당 분야에서 영향력을 갖춰야 하며(Influential), 한 권으로 충실한 콘텐츠를 담고(Through) 있어야 한다. 더불어 심미적 가치를 지닌(Aesthetic) 시대를 초월한(Timeless) 책이어야 한다”라는 원칙에 따라 큐레이팅을 했다. 특히 전체 장서의 약 70%가 국내에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은 도서라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포토 저널리즘 매거진 <라이프LIFE>와 인테리어 전문지 <도무스 DOMUS>를 비롯해 2천7백여 권의 희귀 장서와 디자인 역사에 손꼽히는 정기간행물 등 국내외를 막론하고 쉽게 만날 수 없는 귀한 책들을 그야 말로 모셔왔다.
그 배경에는 1년 반 전에 꾸린 세 명의 디자인 라이브러리 프로젝트 팀이 있다. 글로벌 북 큐레이터가 북 리스트를 작성하면 그것을 조사하고 현실화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었다. 디자인 서적을 소장한 국내 모든 도서관과 일본, 유럽, 미국 내 주요 도서관의 소장 도서 선정 절차를 철저하게 조사했다. 그들이 분골쇄신한 노고가 1년 반 만에 빛을 발한 것이다.
1 원형 테이블을 두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책에 대한 영감을 주고받도록 했다.
2 도서관 전용 아이패드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찾고자 하는 책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
3 1층 전시장에는 현재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비주얼 작업을 선보여온 무크지 <비져네어VISIONAIRE>를 전시 중이다.
자연광이 잘 비추는 2층 도서관 내부. 최욱 소장이 디자인한 얇은 철판 테이블 위에 희귀 장서가 놓여 있다.
2층 도서관의 핵심은 ‘집 속의 집’이다. 책과 오롯이 일체가 될 수 있는 공간.
책이 중심인, 책 읽는 사람이 아름다워 보이는 공간
“디자인이란 새로운 삶의 양식과 의미를 만들어내고 전달하는 것이며, 사람이 만든 창조물의 근원적인 영혼이다.” 스티브 잡스는 디자인을 창조의 근원이라고 말했다.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는 그 근원을 찾는 통로 같은 곳이다. 건물을 디자인한 원오원One O One 건축의 최욱 소장은 시각적 끌림을 줄여 책과 책 읽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공간을 만들려고 했다. “공간을 백색으로 꾸민 것은 빛을 가장 잘 받아들이는 색이기 때문입니다. 책 외에 스트레스를 주는 어떤 색도 배제했어요. 이곳은 책이 주인공인 공간입니다. 최소한의 것을 변경해 기능을 보완했습니다. 의도가 드러나지 않는 디자인이라 할 수 있지요.”
국내외를 대표하는 디자인 관련 정기간행물이 놓인 카페와 전시 공간이 있는 1층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면 본격적인 도서관 공간이 펼쳐진다. 전면 유리창을 빙 둘러 자리한 공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공간을 가로질러 자리한 ‘집 속의 집’. 아이들이 골방에 아지트를 꾸며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것처럼 집 속의 집에서 책을 마주하면 책과 오롯이 일체가 된다. 몰입의 최고조가 되는 완벽한 공간이다. 희귀본 장서 옆으로 놓인 넉넉한 사이즈의 철판 테이블은 큼지막한 도서들을 편하게 볼 수 있게 한 최욱 건축가의 배려다.
3층은 규모가 가장 소박한 서재로 ‘사진’ 관련 서적이 놓여 있다. 그 옆으로 현대카드 정태영 사장이 이 도서관의 명당이라 소개한 작은 방이 있다. 옛 궁의 왕세자를 위한 공간인 기오헌奇傲軒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기오헌은 ‘큰 야망을 갖되, 겸손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일까, 타인의 방해를 전혀 받지 않는 이곳에선 볕이 내리쬐는 법당 안에 홀로 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이 부드러운 몰입을 통해 얻는 지적 풍요로움은 그 어느 곳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행복이다.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책 여덟 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이 넓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골라 봐야 할까?
시각 예술 전문가 여덟 명이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에서 발견한, 이들의 오감을 자극한 책 여덟 권을 소개한다.
1 광고 기획자 김성철 씨 추천
<인디 브랜드Indie Brands>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에서 만난 는 클리너, 쿠키, 초콜릿, 향수, 티셔츠, 팝콘, 콜라 등 서른 개의 카테고리 아래 1인 기업이나 10여 명의 직원이 있는 작은 기업이 어떻게 브랜드를 만들어가는지 보여준다. 시장성, 경쟁 구도, 전략보다는 창업자나 팀원들이 브랜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해나가는지 이야기 한다. 제품 자체를 소개하는 글이 부족한 것이 아쉽지만, 서른 개의 브랜드를 만나면서 얻는 영감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브랜드를 대하는 브랜드를 만들어간다. 생각을 전달하는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 BIS Publishers.
2 <행복> 아트디렉터 김홍숙 씨 추천
그래픽 디자인 서적 <루발린LUBALIN>
그림이나 사진 없이 글자만으로 표지를 아름답게 디자인하고, 주제를 적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항상 숙제다. 글자가 의미 전달 수단에서 벗어나 이미지로 기능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세계적 타이포그래퍼 허브 루발린Hurb Lubalin이다. 글자 형태를 주제에 맞게 변형하고 타이포그래피의 형식적 한계를 극복한 실험적 시도, 시각적 충격과 메시지 전달의 탁월함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뉴욕 태생의 디자이너 허브 루발린이 사진식자라는 테크닉을 통해 20세기 가장 성공한 서체로 꼽히는 아방가르드 서체를 어떻게 창안했는지 알 수 있다. Adrian Shaughnessy.
3 북 디자이너 이나미 씨 추천
‘펭귄 클래식Penguin Classics’ 시리즈
영국 앨런 레인Allen Lane이 설립한 펭귄 북스의 ‘펭귄 클래식’ 시리즈. 1946년 첫선을 보이며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이후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진화를 거듭한 펭귄 클래식이 20년 만에 21세기 버전을 다시 만들었다. 책 표지를 보시라. 양감과 질감을 최대한 살리면서 무게는 최소화해 ‘고전’이 지닌 아날로그적 감성을 극대화했다. 책을 갖고 싶은 마음, 읽는 즐거움을 극대화한 디자인을 자랑하는 참 아름다운 책이다. Penguin Classics.
4 그래픽 디자이너 조현열 씨 추천
<루프트한자 + 그래픽 디자인 Lufthansa + Graphic Design>
독일 항공사 루프트한자의 그래픽 역사를 모은 책. 나는 항상 책 내용을 살피기 전에 책 무게, 종이 질감, 냄새, 제본 그리고 마지막으로 텍스트와 이미지 구성을 살핀다. 이 책의 첫 느낌은 ‘단단함’이었다. 건조하면서도 둔탁한 느낌의 ‘독일스러움’과 1920년대부터 현재까지 루프트한자의 그래픽 디자인 역사가 그 무게를 더했다. 1백 년 가까이 유지하는 그들의 정체성이 놀라울 따름이며, 그들만의 집요함과 고집이 느껴지는 단단한 책이다. Lars Muller Publishers.
5 디자인디렉터 백성원 씨 추천
<이탤리언 디자이너스 엣 홈 Italian Designers At Home>
이탤리언 디자이너의 집이 아니라 집에서의 이탤리언 디자이너다. 그들이 말하는 집에 관한 이야기, 즉 일상(삶의 방식)과 강박(철학 또는 취향), 추억(역사)을 담았다. 이탈리아 디자인 르네상스를 이끈 위대한 디자이너 23인이 그 주인공으로 에토레 소트사스, 알레산드로 멘디니, 미켈레 데 루키, 마리오 벨리니, 스테파노 지오반노니 등 이탤리언 디자이너 올스타 총집합이다. 디자이너의 집이 그들의 디자인을 빼닮았을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들에게도 집이란 공간은 ‘보여주기 위한 곳’이 아닌 ‘살기 위한 곳’이다. verbavolant.
6 북 큐레이터 알렉산드라 랜지 추천
<디터 람스Dieter Rams: As Little Design as Possible>
디터 람스의 대표 작품을 다양한 관점으로 소개해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아카이브의 사진 자료, 과거의 광고들, 제품을 실루엣만으로 단순화한 기호에 이르기까지 이 모노그래프는 디터 람스의 작품을 한 개인의 예술적 감수성은 물론, 더 광범위한 영향력의 산물로 조명한다. 디터 람스와 함께 작업한 많은 협업자, 브라운Braun사의 오너들이 기여한 부분도 함께 다룬다. 보다 비평적으로 선별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디터 람스의 작품을 시각적 면과 역사적 면에서 깊이 있게 조명한다. phaidon.
7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북 큐레이터 팀 추천
건축 전문지 <도무스 DOMUS>
1928년에 창간한 이탈리아 건축 디자인 잡지 <도무스>는 지난 85년간 혁신을 거듭하며 세계적 전문지로 독보적 위치를 점해왔다. 건축과 디자인에 관한 한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한 바이블과 같은 존재. 이탈리아 디자인의 전성기를 거쳐 20세기 말까지를 집대성한 <도무스> 전권 9백59권은 국내 최초인 동시에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희귀 컬렉션이니 놓치지 말자. 다른 경쟁 잡지들이 폐간을 하는 와중에도 처음처럼 생동감과 세련됨을 잃지 않고 실시간으로 당대 디자인계 소식을 전달한다.
8 사진가 김용호 씨 추천
포토 저널리즘 매거진 <라이프LIFE>
최초의 사진 전문 잡지 <라이프> 매거진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역사를 담았다. 기록으로의 사진적 기능을 넘어 지구 반대편 이야기를 전달하며, 단 한 장의 사진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가장 잘 실천했다. 로버트 프랭크, 유진 스미스와 같이 당대 최고로 손꼽히는 사진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라이프> 매거진 전권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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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협조 현대카드 사진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