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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기울여 들어보니]사진가 구본창 씨 나의 사진은 행복한 기억
이상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종로구 통의동에 자리 잡은 류가헌이라는 갤러리에서에서 벌어진 일이다. <구본창의 행복한 기억>이라는 제목이 걸려 있지만 정작 전시회장에 작가의 작품은 한 점도 없단다. 어떻게 이런 발상이 가능했을까?


무릇 전시회란 작가가 침묵 속에 벼려온 작품으로 하여금 화려한 조명 속에 웅변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예술적 성취와 세계관을 제도적으로 과시하는 행위다. 그런데 이름난 작가가, 그것도 회갑 기념전에 자신의 작품이 하나도 없는 전시회를 열다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갤러리로 향하며 나는 동양화의 화법 가운데 하나인 ‘홍운탁월법烘雲托月法’을 떠올렸다. 정민 교수의 <한시미학산책> 으로 널리 알려졌듯 이것은 수묵화에서 검은 먹으로 흰 달을 그리는 모순을 해결한 기법이다. 채색화라면 노란색 물감을 붓에 묻혀 맵시 있게 둥근 점 하나 찍으면 여실한 달이 되겠지만, 먹은 칠하는 순간 달이 아니라 어둠이 된다. 지혜로운 옛 화가는 달을 색칠하는 대신 주변을 검게 칠하여 달을 드러내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저것을 칠하는 것이다.


독일 친구 악셀 바이어가 1982년에 촬영해준 사진. 구본창 제공.


사진을 통해 만난 인연들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의 친구를 보라고 했던가? 이 전시회에서 사진작가 구본창 씨가 달이라면, 그와 관계를 맺어온 주변 사람들과 사물들은 그를 드러내는 바탕이 되고 있었다. 전시장에는 구본창 씨가 선후배 작가들과 교환한 사진, 전시회 포스터,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그림엽서, 심지어 전자메일 인쇄물까지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약속 시간에 딱 맞게 도착한 나는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달의 주변이 아니라 다짜고짜 달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풀잎 같은 머릿결, 지적으로 보이는 검은테 안경, 하회탈에서 빌려온 듯한 눈매,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얀 치열, 다소 야윈 듯하지만 그래서 청년처럼 보이는 그에게로 향했다. 사진작가이자, 전시 기획자이자, 예술 경영자이자, 교육자로서 한국 현대 사진의 확고한 토양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 바로 그이, 구본창 씨다.
“독특한 시도인 것 같습니다. 전에도 이런 시도가 있었나요?” “외국에서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없었던 것 같아요.”
“이 전시를 기획한 까닭은 무엇인가요?” “회갑 기념전까지 내 작품 세계가 어떻다고 보여주는 것보다 그동안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를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나한테는 사진을 통해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이 제일 값지고 행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술가가 자기 작품의 수월성을 과시하는 것보다 자신을 있게 한 주변 인연에게 공을 넘기는 태도는 다소 낯설다. 자존심 강한 예술가들은 대개 광장에서 불화하고, 골방에서 소통하는 자들이 아닌가? 저이는 어떻게 자신의 작품 세계를 지키면서 ‘매너남’이라는 별명을 얻은 ‘관계의 달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을까?

생애 가장 행복하던 시절 그이가 본래부터 관계의 달인은 아니었던 듯하다. 1953년 섬유업체를 운영하는 부모 슬하에서 육 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난 그이는 무척 수줍고 내성적인 소년이었다고 한다. 남 앞에 잘 나서지도 못할뿐더러 자신을 칭찬받을 거리가 없는 사람으로 알았단다. 그가 남들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뛰어난 형제들 때문이었다. 훗날 초대 OECD 대사와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한 형, 故 구본영 씨와 현재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동생 구본철 씨는 최고 명문 학교를 최고 성적으로 휩쓰는 영재들이었다. 공부 잘하는 형에게 콤플렉스를 느끼던 소년 구본창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화단의 꽃을 관찰하거나 장독을 묻느라 파헤친 마당에서 나온 오래된 그릇들이 그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말 없는 사물과 교감하는 법을 배웠다. 이것은 훗날 그이가 작가가 되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소년은 남달리 시각적 자극에 민감했다. 양모를 수입하는 아버지가 외국에서 가져온 샘플 북의 무지갯빛 색채에 흠뻑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다. 외국 달력과 브로슈어, 성냥갑 등 자잘한 것을 모으는 수집벽은 이때부터 생겨났다. 가족들에게 사내 녀석이 그런 걸 모으느냐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형이 받아보던 잡지 <라이프> <타임>을 통해 외국의 문물을 접했다. 연세대 경영학과에 진학했지만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라 집안 분위기 때문이었다. 졸업을 하고 대우실업에 취직했지만, 곧 직장 생활을 할 체질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회식 자리에서 노래하는 것도 싫고, 남들 이야기에 보조를 맞추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습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6개월 만에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을 떠났다. 1979년 독 일로 건너간 그이는 함부르크 국립조형미술대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유학 생활은 그이의 하늘에 오래도록 드리 워 있는 먹구름을 벗겨갔다.
“처음으로 내 삶이 행복하다고 느꼈습니다. 독일에서는 신기하게도 한국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단점이 모두 장점으로 바뀌었습니다. 예민하고, 섬세하고, 여성적인 감수성을 교수님이나 학생들이 모두 경이롭게 지켜봤습니다.” 물 만난 고기와 같았다. 그림이든 판화든 과제물을 제출할 때마다 관심과 호평을 받았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빙산으로 치면 평생 물속에 가라앉아 있었을 내 재능을 찾아낸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뻤으니까요.”


독일 유학시절부터 지인과, 동료와, 스승과 주고받은 서한들과 소장품을 전시한 구본창 씨. 친필로 직접 제목을 달아 주었다(아래). 전시 작품 중에는 그가 20년간 사용한 낡은 카메라 가방도 있다.



‘사진가’가 되다 내성적인 그가 ‘관계의 달인’으로 거듭난 것도 독일 유학 시절부터였다. “지금 전시한 것들 중에 1983년에 받은 중요한 편지가 한 통 있어요. 그 인연을 생각하면 참 신기합니다.” 독일에서 무작정 사진을 공부하던 그이는 어떻게 해야 사진작가로 데뷔하는지도 몰랐다. 1980년 어느 날, 한국에서 온 동아일보를 보고 ‘동아 국제 사진 살롱전’이라는 콘테스트가 있는 걸 알았다. 입상을 꿈꾸며 작품을 출품했다.
“그때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갑자기 귀국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동아일보사에 제 한국 연락처를 알려주었습니다.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나니까 연락이 왔어요.” “입상이 되었군요?” “아닙니다. 나중에 심사장에 가보니 제 작품은 탈락되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용건인즉, 독일 사람이 심사위원으로 왔는데 당신이 와서 통역을 해줄 수 있느냐는 거였죠.” 통역을 하다가 신구대학교 사진학과에 계시던 홍순태 교수의 눈에 띄었다. 첫눈에 재목을 알아본 홍 교수가 가끔 연락을 하라고 일렀다. 독일에 건너간 뒤 카드를 보내드렸다. 그게 인연이 되어 1983년, 홍 교수가 유학 중인 그를 국내 사진전에 초대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로서는 고마운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1985년 귀국했을 때 신구대학교에 시간 강사 자리를 내주신 분도 그였다.

“제가 그분 덕을 보려고 한 것도 아니고, 고작 카드 한 장을 보낸 인연이 그리 되었습니다.”
“우리 어머니 표현대로라면 ‘남의 눈에 꽃으로 보이고, 남의 눈에 잎으로 보이는’ 매력이 있나 봅니다.”
“그러게요. 제가 인덕이 있어요. 다른 인연을 얘기해볼까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무렵이었습니다. 평소 내 작품에 대해 평가를 받고 싶어 하던 독일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흔쾌히 찾아오라고 해서 만났습니다. 좋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내 작품 세계가 변화를 겪었지요. 그 사람이 또 함부르크에 있는 자기 친구를 소개해주었어요. 제가 귀국한다니까 그 사람이 부탁을 하나 해요. 도쿄에 자기가 함께 일하고 있는 에이전시가 있는데, 거기 들러 인사말 좀 건네고 가라는 겁니다. 그때는 직항이 없어서 도쿄를 경유해야만 했어요. 일본에 들러서 미국인 에이전시 로버트 커센바움Robert Kirschenbaum이라는 사람을 만났어요.”

이번엔 그 미국인의 눈에 꽃으로 보였다. 단 한 번의 우연한 만남에 상대방에게 자신을 각인시킨 것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막막하게 지내던 그이에게 연락이 왔다. 일본에 세계적 사진작가 1백 명을 초대하는 행사에 그이를 불 러준 것이다. 쟁쟁한 작가들이 호텔에 모여서 각자의 작품으로 슬라이드 쇼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아는 이 하나 없어 뒤에서 쭈뼛거리던 그이는 막상 그들의 작품을 보니 슬며시 용기가 생겼다. 준비해 간 자기 작품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뜻밖의 호응을 얻었다. 미국 작가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네가 미국에 오면 우리는 굶겠다”라고 극찬을 한 것이다. 다음 날 세미나에서는 예정에 없는 특별 순서로 발표도 했다. “한국에서 작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불안감을 떨치고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이 되었지요.”

커센바움과 맺은 인연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단다. 1998년에는 전 세계 박물관 큐레이터나 관장이 모이는 행사에서 한국 사진을 발표할 기회를 주었다. 그이는 국내 작가 10여 명의 작품을 소개했고, 세계에서 온 사람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들은 앞다투어 한국 작가를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인연이 2000년 이래 미국과 덴마크, 호주 등에 한국 작가들이 이름을 알리는 발판이 되었다. “사진가 김아타 씨도 2000년에 함께 미국에 가서 눈에 띄어 스타가 되었지요.”

그 뒤로 해외에서 유학만 하고 돌아오던 학생들도 국제적 행사에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적극 활용 할 줄 알게 되었다. 비로소 그이의 대인 관계 비밀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작은 인연’이라도 소중히 가꾸는 것이 비결이었다. 작은 인연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대한 관계의 사슬이 되어 그이가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쳐나갈 사회적 장을 마련해주었다.

“원만한 대인 관계와 고독한 개인 작업을 병행할 수 있었던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는지요?”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게 하나 있어요. 절대 남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죠. 누구든 업신여기지 않고 한결같이 대하라고,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최대한 도움을 주려고 애썼습니다. 반면에 나를 지키려는 노력도 해왔어요. 저는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2차, 3차 같은 자리에는 안 갑니다. 고백하자면, 명절이나 연말연시에는 외국에 나갔다고 거짓말하고 전화를 아예 꺼버리곤 합니다.”
최선을 다해 남을 돕지만,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생활 공간에 들어오는 것은 철저히 선을 긋는단다.이런 엄격한 기준이 그로 하여금 한국 사진계에 일인다역을 할 수 있게 해준 바탕일 것이다.

사진가 구본창 씨 손에는 항상 손바닥만 한 카메라가 있다. 프레임을 통해 보는 세상이 곧 그의 역사가 된다.


사진은 사유의 확장 사진 평론가 진동선 씨는 “구본창을 빼놓고서 한국 현대 사진을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척박하던 한국 사진의 모습을 그나마 오늘의 모습으로 있게 한 장본인의 한 사람이 바로 구본창 씨다. 한국 사진의 현대성을 평가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별도로 치자. 그러나 최소한 오늘의 우리 사진이 취미가 아닌 예술의 한 장르로 당당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는, 또한 오늘날 우리 사진가들이 인접 분야 작가들과 지성과 감성을 나란히 견줄 수 있는 확고한 예술적 토양을 쌓은 데는 누구 못지않게 그의 공이 컸다”라고 평하면서, 사진작가이자 교육자이자 전시 기획자이자 예술 경영자로서 그이의 위상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사진만의 매력이 있다면요?” “기록성이죠.”
“호모사피엔스만의 특성이겠지요? 동물이나 식물이 화석처럼 의도하지 않은 기록을 남기기도 하지만, 인류는 동굴 벽화나 암각화가 보여주듯 원시시대부터 당대의 경험이 소멸하는 것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방식으로 문화와 예술을 구축해온 것 같습니다. 저는 사진에 문외한이지만 사진 또한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너머’를 지향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진 한 장은 시간적 찰나, 공간적 단편, 사물의 표면을 인화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감상하는 것은 무한히 확장하는 ‘너머의 시공’인 것처럼 보입니다.” “좋은 작품일수록 그렇지요.”

나는 인터뷰 전 그이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거침없이 확장되는 세계와 마주쳤다. 가령 낡은 집의 회벽을 포착한 ‘시간의 초상’에서는 무채색 명암으로 가득한 화면 하단에 가로지른 짙은 색 나무가 때론 대지로, 때론 대양처럼 보였다. 그 위에 얼룩진 회벽은 바람 가득한 하늘이 되고, 벽에 난 실금은 천둥과 벼락이 되었다. ‘집’이라는 인간의 제한된 거처가 ‘우주宇宙’라는 궁극의 집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대양’에서는 돛단배 하나 없이 코끼리 살갗 같은 바다의 피부만 보여준다. 하지만 그 피부는 심연을 담고 있었다. 무수한 어족의 유영이 보이는 듯했다. ‘백자’ 시리즈의 달항아리는 아예 시렁을 박차고 둥실 떠올라 초승에서 그믐으로 저만의 궤도를 돌고 있었다. 사진은 피사체의 표면만 드러낼 뿐인데 사진작가는 어떻게 ‘너머’를 보여줄 수 있는가? 그림이 여백을, 시가 행간을 지향하는 이치와 같을 것이다. 작품 가운데 새롭고, 화려하고, 복잡한 피사체가 아니라 오래되고, 소박하고, 단순한 피사체가 자주 눈에 띄었다. 낯선 것을 낯설게 보여주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여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이의 작품 속 낯익은 사물들이 낯설게 보이는 까닭은 ‘너머’를 감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감하는 삶이 좋다 “작가로서 가장 재미있고,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생각지도 않은 뜻밖의 작품이 만들어질 때가 재미있어요. 국내외 작가들과 사진을 주고받으면서 느끼는 교감도 굉장히 좋습니다. 작품 활동 못지않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보람도 큽니다. 가능성 있는 학생을 칭찬해주고, 그 친구가 힘을 받아서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무척 행복한 일입니다.”
그이는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분당에서 광명역까지 가서 KTX와 무궁화호를 갈아타고 학교가 있는 경산 하양읍에 강의하러 가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이의 삶의 키워드는 역시 ‘관계’와 ‘소통’처럼 보인다. <구본창의 행복한 기억>전은 그이가 평생 구축한 ‘관계의 인드라망’이다. 사람은 화두로 깨치지만 관계에 닦인다고 한다. 은둔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광장과 암실을 오가며 걸림 없이 소통하는 그이는 한 사람의 수행자이자 잘 닦인 구슬처럼 보인다. 홍운탁월의 귀한 인연들이 서로를 닦으며, 비추며 한국 현대 사진의 한 시대를 엮어내고 있었다.

글 이은석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