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복 받아라, 마음으로 그래 박정희 할머니(91세)
한 손에 든 하얀 수국처럼 박정희 할머니의 미소도 풍성하다.
남들은 손주 생기고도 할머니라고 불리는 게 싫다는데 난 안 그랬어요. 마흔쯤 됐을 때인가, 남편이 소아과 의사였는데 환자들이 자기 아기 데리고 와서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해” 이러면, 난 “할머니한테 오렴” 그랬어요. 좋았어요. 남편이 의사였지만 편한 삶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난 그러고 싶었으니까. 그 사람과 삶을 경험하고 싶었으니까. 돈의 노예처럼 사는 의사는 싫었으니까.
아주 진짜 좋은 결혼이었고 행복했어요. 그래도 평생 가장 행복했을 때는 아이들 키울 때였어요. 스물셋부터 서른셋이 될 때 까지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어요. 그런데 우리 딸들이 사춘기 시절에 나를 보고 그러는 거예요. “엄마처럼 고생하려면 뭣하러 시집을 가, 난 고생하고 싶지 않아” 이렇게요. 그런데 난 안 그랬어요. 아이들 눈에는 엄마가 흙강아지처럼 일만 하는 것으로 보였을지 몰라도 정말 행복했어요. 그때가 내 인생의 피크였어요. 그 조그만 아이도 기도와 식도가 헷갈리는 일은 없어요. 젖을 넘기고 숨을 쉬고 호흡하고 사랑하는 남편의 아이요, 내 아이였어요. 양쪽을 다 닮아서 보는 이마다 저희 어멈 아범을 똑닮았구나 하고 얘기해주면, 암 행복하고말고. 그 덕에 TV에도 나가고 내 이름을 단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라는 책도 내고 대접 많이 받았지요. 내가 그린 그림으로 전시도 하고 그림을 사 가는 사람도 있고요.
1 그림 직접 그리고 동화도 직접 써서 만든 육아일기. 이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자녀들 이름이 보인다.
2 평안 수채화 교실의 풍경. 할머니가 좋아하는 배추그림이 보인다.
작년에 넘어져서 거동이 좀 불편해졌어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내가 정말 할머니가 됐구나 하고 생각해요. 모습도 처량한 것 같고. 슬퍼요. 그런데 항상 슬프진 않아요. 손주가 열한 명에 증손주도 여덟 명이나 되고, 온 가족을 합하면 마흔한 명이나 되잖아요. 내가 날마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식구들이에요. 그 안에 사춘기를 겪는 고뇌에 찬 아이도 있고, 취직 못 한 백수도 있을 테지만 슬프게 보지 않아요. 네가 오죽 잘 알아서 물결을 타고 가겠니, 하는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죠. 죽음이 두렵진 않아요. 우리 친정 부모님, 시부모님 모두 돌아가실 때 편안했어요. 좋아 보였어요. 깊고 단 잠을 주무시는 것 같았지요.
꽃을 원래 좋아했어요. 별것도 아닌 것이 냄새를 풍기면서 사람을 끌어들여. 남편이 병원 하던 자리에 수채화 교실을 수십 년째 하고 있지만 여전히 수강료는 5만 원만 받아요. 그림 그리고 싶은 사람이 돈 없어도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그랬더니 수강생들이 꽃을 항상 사다 줘요. 사람들이 여전히 소녀 같다는 얘길 해줘서 고마워요. 왜 그러나 생각해보니, 이렇게 인터뷰 같은 걸하면 내 사진을 찍잖아요. 내가 사진발이 잘 받아요. 아직도 꿈이 있어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어딜 가나 사람들이 나를 챙겨주니 고마워요. 엊그제 우체국에 갔을 때도 한 청년이 길 미끄럽다고 계단에서 손을 잡아줬어요. 자꾸 신세만 지게 생겼는데 갚을 길이 없거든. 그래서 염치없이 받기만 해요. 변명 같지만 맘속으로 그래요. 너 복 받아라.
그러니까 내 나이가 좋아요 이기옥 할머니(90세)
직접 만든 꽃무늬 코듀로이 치마와 카디건이 예쁘다고 했더니, “내가 그림 그리는 사람이잖아” 라는 답이 돌아온다.
혼자 살아도 바쁘네요. 빨래도 하고 음식도 해야 하고, 뽀득뽀득 청소해놓으면 좋잖아요. 일이 좋아서 사람은 부리지 않아요. 기어 다니면서라도 할 참인데요? 거의 매일 근처에 사는 딸이 아침을 먹으러 오고, 아들 내외도 일주일에 한 번씩 밥 먹으러 와요. 그래서 EBS의 요리 강습을 보면서 노트에 적기 시작한 게 두 권이 넘었어요. 같은 음식이라도 다르잖아요. 시대에 따라서도 다르고.
어릴 때는 문학소녀가 꿈이었는데, 결혼하고는 완전히 애들 뒤치다꺼리하느라고 정신없이 살았어요. 우리 집 양반 돌아가시고 나서 그림을 시작했어요. 건강이 나빠져서 단전호흡 배우러 문화센터에 다니다 보니, 강좌가 많더라구요. 이호철 선생의 소설 작법 강좌를 신청하고 나오다 보니 전시실에 수채화 전시가 있었어요. 나도 저거 그냥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수채화반에 들어갔어요. 용감하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내가 꼭짓점이었어요.12시쯤 출발해서 문화센터 도착하면 1시부터 5시까지 그려요. 그 이상은 체력이 안 돼요. 다닌 지는 10년쯤 됐어요. 딴 걸 그만큼 열심히 했으면 면허도 따고 유단자 됐을 텐데 그게 그렇게 어렵네요. 그림도 보자기도 뜨개질도 하여튼 굉장히 열심히 해요. 다들 제가 고생 한 번 안 한 줄 알지만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내 팔자가 왜 이래?’라고는 생각 안 했어요. 긍정적으로 생각했지요.
나처럼 환경이 좋은 노인이 별로 없거든요. 이렇게 살면서 노후를 어떻게 살아라 하는 것은 교만이자 다른 분들에게 실례란 생각이 들어요. 그저 수채화 교실에 가면 내가 거기 앉아 있기만 해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줘요. ‘내가 지금 육십인데 팔십까지 그리면 아직 나도 잘 그릴 수 있는 시간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시겠지요? ‘아, 골동품도 쓸 데가 있구나’ 하고 생각해요.
1 벌써 두 권째 쓰고 있는 이기옥 할머니의 EBS 요리 강습 노트.
2 직접 염색하고 바느질해 만든 조각보. 지난해에는 전시도 했다. 이젠 아크릴 물감으로 조각보를 그려보고 싶다고.
3 볕이 좋은 날이면 그림 그리다 바느질 하다 책을 읽는다. 신문 서평란에 궁금한 책이 실려 있으면 아들에게 부탁해 사달란다. 아흔에 시작하는 인문학이라니, 젊다.
꿈이 뭐냐고 물으면 노인들은 대개 답을 잘 안 하잖아요. 제 꿈은 올봄에 저 화단에 벽돌을 한 장만 높이는 거예요. 전에는 황폐하던 화단에 꽃을 심어놨더니 지나던 사람들이 즐거워하더라구요. 그걸 내 손으로 할까, 사람을 부를까 궁리하는 걸 즐기지요. 삶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나 매일 생각해요. 이제는 몸이 자꾸 안 좋아지는 걸 느끼니까 일상적으로 생각하게 돼요.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니까 욕심 없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다 보면 잘 수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시간 나면 시장이나 대학로를 다녀요. 지금 산에 가봐야 춥기만 하고 ‘민정시찰’을 하지요. 요즘 젊은 애들은 어떡하고 지내나 하고. 대학로 가면 별별 게 다 있잖아요. 내가 말은 안 섞지만 걔네들 걷는 모습과 얘기하는 걸 들으면서 관찰을 해요. 이 세대는 이렇게 사는구나 하고. 웃기죠? 내가 좀 웃기는 할머니예요. 학생들 보면 괜히 짠해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게 돼요. 사랑으로 모든 층을 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내 나이가 좋은 거예요.
남겨둬야 남는 게 있지, 안 그래요? 홍옥순 할머니(89세)
오늘은 배우처럼 연기 한번 하시라는 주문에 활짝 웃으시는 홍옥순 할머니.
팔 남매를 낳았어요. 우리 영감님이 형제가 없어서 어려서부터 형제 있는 사람이 부러웠대요. 어릴 때 자기가 누굴 건드리면 여럿이 덤비는데, 그게 너무나 싫었대요. 딸을 낳으니까 아들을 하나 더 낳아야 하지 않겠냐고. 그랬더니 아들 하나에 딸만 일곱이 됐어요. 안식구 생각은 안 하시더라고요. 어떤 때는 잠이 안 올 때도 있지만, 요즘은 잘 자요. 팔이 좀 아팠는데, 셋째가 손가락 발가락만 꼼지락거리는 운동을 가르쳐줘서 했더니 며칠 만에 나았어요. 잠도 잘 오고. 그 운동을 알려주고 싶네요. 다리 아픈 거야 뭐, 이 나이에 다리 안 아프면 어른이 아니죠. 내가 좀 긍정적이에요. 영감님이 화내도 토 달지 않고 “그러믄요”이랬어요. 그 한마디로 가정이 평안했지요. 그래서 사위들이 저를 ‘글어머니’라고 불렀어요.
원래도 부지런하지만, 애들이 여덟에 열두 식구인 데다 시아버님이 한복을 입으셔서 한복 바느질하느라 바빴지요. 일꾼들이랑 가족들 밥해 먹이느라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었어요. 하루에 한 말씩 한 달에 세 가마니나 밥을 했는데, 밥만 먹을 수 있나요. 반찬도 해야지. 그걸 딸들이 다 보고 자랐어요. 나도 사랑 많이 받고 자랐어요. 어머니가 아들 오 형제에 나를 낳아서 그렇게 아끼셨어요. 밤에 잘 때면 봉선화 물 들여주고, 5월에는 창포 삶은 물을 내놨다가 꼭 머리를 감겨주셨어요. “여자는 머릿결이 고와야 돼” 하시면서요.
1 바늘쌈 대신 두루마리 휴지에 바늘을 꽂아둔 모습이 재밌다.
2 쓰다 만 몽당연필을 한가득 모아놓았다. 방에는 항상 스케치북을 펼쳐두고 그림을 그린다.
3 배운 적 없어도 한복 바느질하던 꼼꼼함으로 수를 놓았다. 하도 예뻐서 자녀들이 달력을 만들어줬다.
예순다섯쯤에 한글학원에 가서 한글을 배웠어요. 넉 달밖에 못 다녔지만. 글씨 쓰는 게 좋아서 뭐든지 쓰고 싶은 거예요. 일기를 쓰기 시작했지요. 그림은 일흔 살쯤부터 그렸어요. 그림 그려서 애들한테 하나씩 주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어요. 거기에 그 아이 특징을 적어 넣었지요. 천생 여자라든가 만들기를 좋아했다라든가. 다 그려놨더니 아이들이 액자에 넣어서 걸어주고 전시회도 열어주고 수첩이랑 달력으로도 만들어줬어요. 그걸 사람들이 사주기도 하고요.
생각해보면 지금이 제일 행복해요. 영감님 살아생전에도 좋았지만, 지금은 혼자 사는 재미가 있어요. 내 맘대로 하고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고 책임이 없잖아요. 영감님 보냈을 때도 울지 않았어요. 내 할 도리를 다했으니까요. 외롭거나 쓸쓸하지 않아요. 아이들도 자주 찾아오고 혼자 사는 재미가 있거든요.
어딜 가서 살아도 항상 꽃을 심었어요. 공주에 살 때는 동네에서 ‘꽃 많은 집’ 이러면 우리 집을 얘기하는 거였어요. 꽃은 그냥 내버려두면 안 피어요. 정성을 들여야 ‘피어주는’ 거죠. 겨울에도 거실 문을 열어둬요. 베란다에 둔 화분들이 추울까 봐서요. 언젠가 영감님이 그랬어요, “당신, 참았던 말 한번 해봐.” 그걸 새삼스럽게 뭘 해요 그랬더니,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말없이 살았느냐?”고 해요. 그래서 몇 마디 했더니 12시가 됐더라구요. “점심 드셔야지요” 그러면서 “당신이 알면 됐어요” 그랬어요. 어떻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아요. 말 안 하고 남겨둬야 남는 게 있지, 안 그래요?
그림 그리니까 다시 살아 한숙자 할머니(84세)
“모자가 잘 어울려요?” 꽃을 들고 곱게 모양새까지 신경 쓰는 한숙자 할머니가 봄날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림 잘 그린다고 칭찬하면 좋아요. 근데 부끄로와. 젊은 사람도 아니고…. 우리 막내딸이 많이 도와줘요. 이렇게 제목을 지었으면 좋겠다 하고 얘기도 해주고. 밤낮으로 바쁜 아인데 고맙지요. 여든 살 맞아 생애 첫 전시회도 열고, 작년 봄에 우리집에서 세 번째 전시도 했어요. 뭐가 예쁘다고 전시까지 하느냐고 그랬는데, 다들 그림 한번 보자 하더라고요. 좋다고 하니까 딸한테 맡겼어요. 우리 막내딸이 전시 기획을 다 해요. 사람들이 그렇게 칭찬해주고 기뻐해주니 나도 뿌듯하지요.
손녀딸이 그림을 공부해요. 훌쩍 커서 이제 대학교 기숙사에서 지낸다고 물감을 정리해 버리려고 하더라고. 그게 참 아까웠어요. 그래서 그 물감 가지고 그림을 한번 그려봤죠. 걔 동생이 장애가 있거든요. 엄마는 일하느라 바빠서 내가 대신 아이 돌본다고 정신이 홀딱 거기 가 있었는데, 이제 다 커서 앞가림하니까 시간이 생기더라고요. 그게 계기가 된 거예요. 그전에는 그림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일찍 결혼해 살림만 하고 살았거든요. 사남매 키우고, 우리 남편은 내가 마흔다섯 살 때 황망하게 죽었어요. 그게 참 한스러워! 인사도 못 하고 보낸 게. 나이 먹고 할머니 되는 거야 당연한 일이고…. 인생 뭐 대수롭다고, 애들한테 많이 못 해줘 미안하지요.
1 캔버스와 타일 등 다양한 소재를 이용해 그림을 그린다.
2 할머니의 화장대 위에는 오래된 결혼사진과 사남매와 함께 찍은 가족 사진이 놓여 있다.
3 요즘 할머니는 식물과 꽃 세밀화를 연습한다. 꽃은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소재다.
4 침대맡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손에 쥐는 그림 도구.
예순아홉에 나한테 갑자기 뇌출혈이 왔어요. 초겨울 즈음이었는데, 나무 손질하다가 집으로 들어오더니 헛소리를 하더래요. 우리 딸이 이상하게 생각해서 바로 집에서 응급 치료 받고 병원에 입원했어요. 큰일 날 뻔했지요. 그다음에 우울증도 오고 자폐 증세까지 오더라고. 3년간 말도 잘 안 했어요. 너무 오래되어 이제 가물가물하네. 꽃도 그리고 새도 그리고 물고기도 그리니까 말수도 많아지고 기분도 참 좋아지더라고. 시간이 나면 그리고 또 잠시 잊고 있다가 생각나면 다시 그리고 그래요. 그림을 한번 제대로 그리면 밖에서 누가 떠들어도 관심이 없어요. 오래 앉아 있으면 다섯 시간도 있고요.내가 이북에서 왔거든요. 황해도 해주가 고향이에요. 여자 형제들이랑 부모만 남고 두 남동생과 배 타고 내려왔지요. 우리 배가 옹진에 있거든요. 배 가지고 넘어오라고 그래가지고 밤에 몰래 나왔어요. 열아홉 살에 내려와서 이제껏 한 번을 연락도 못하고. 여자들이라 연락하면 혹시라도 잘못될까 조심스러워가지고. 네네, 사무치게 그립지요. 그림에도 그렸어요. 어릴 때 아버지가 포목상을 했거든요. 장사꾼인데 참 그림을 잘 그렸지요. 삼촌도 그렇고. 생각하면 내가 아버지를 좀 닮은 것 같아요.
이제는 우리 손주들이 내 손 붙잡고 전시장 구경도 시켜주고 좋은 그림책 있으면 따라 그려보라고 잔뜩 보내주고 그래요. 꿈같은 건 평생 모르고 살았어요. 우리 가족이 다 건강하기만 바라지요. 그것밖에 없어요. 그렇게 살다가 가족들한테 걱정 안 시키고 좋은 날 평온하게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죠. 우리 집이 벌써 15년 된 집인데, 날 따뜻해지면 꽃나무들이 참 고와요. 봄이 오면 우리 집 멋지게 한 점 그리고 싶어요.
아직 멀었잖아요, 꿈꾸고 살아 김신숙 할머니(61세)
한파가 몰아치던 날,흐트러짐 없이 고운 미소로 카메라 앞에 선 김신숙 할머니는 날 선 바람에 또 꺄르르르 웃는다.
새하얀 서리 내려앉은 할머니가 아니라서 실망했나요? 내 참 젊지요? 올해로 예순하나가 됐어요. 딸이 스물두 살에 결혼해 이듬해 은송이를 낳았거든요. 쉰 살도 되기 전에 할머니가 됐어요. 그래서 ‘송이 할머니, 송이 할머니’ 그렇게 불러요. 아유, 할머니가 됐는데 할머니라 불리는 게 당연하지요. 지금까지 경주를 벗어나 산 적이 없어요. 경주에서 나서 자랐고, 할아버지 만나 결혼하고 계속 살았지요. 애들 결혼시키고 이제 우리 둘만 남았어요. 은송이는 부모 따라 이사 가 지금은 인천에 살아요. 우리 할아버지는 경주에서 택시를 모는데 마나님 기사 노릇 한다고 만날 그래요. 처음에는 할머니가 손주한테 영어 가르친다고 하니까 다들 안 믿었어요. 내가 책을 참 좋아했어요. 우리 애들 키울 때 동화책 읽어주며 키웠다고. 그 노하우가 있어 은송이한테 영어를 가르치지 않았겠나. 내가 송이를 돌봐야 하는데, 그래도 교육적인 것이 좋잖아요.
내 은송이 엄마한테 “영어 좀 일찍 접하게 해주면 어떨까?” 했더니 한번 해보라고 응원하더라고요. 그래 은송이가 4개월이 되었을 때 영어 교재 테이프 <신기한 영어 나라 스타트>를 구입해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했어요. 아니, 나 영어 몰랐어요. 이내 동화책에 코 박고 발음기호 찾아서 단어 밑에 적고 테이프를 계속 듣고 계속 따라서 말했지요. 친구들도 만나지도 않고 은송이 돌면서 영어만 붙잡고 있으니까 친구들이 오히려 말렸어요. “어야, 그만해라. 할머니 되고 우리 늙잖아, 힘들잖아.”
말도 말아요. 처음에는 ‘bear’ 발음도 안 나오더라고요. 누렇게 변한 영어 사전 꺼내서 발음기호 적고 있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오기도 했지요. 우리 은송이가 초등학교 들어가니까 그 효과가 바로 나타나더라고요. 기특하게 영어를 잘해서 유명했거든. 사람들이 누구한테 배웠냐고 물으면 할머니한테 배웠다고. 선생님들이 막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학교의 권유로 방과 후 영어 선생님으로 은송이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쳤어요. 엄마들이 할머니가 영어 가르친다니까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래요. 나들이 삼아 강의도 가고, 인터넷 카페도 만들어 상담도 해주고 그래 지냅니다.
1 동화책 그림을 창문에 대고 그 위에 종이를 올려 그림을 따라 그렸다. 그림이 완성된 인형에 색을 입히고 나무젓가락을 붙여 코팅했더니, 제법 근사한 동화책 캐릭터가 됐다. 김신숙 할머니의 특별한 영어 놀이법.
2 3년 전부터 취미로 즐기고 있는 퀼트.
3 같은 카드의 위치를 기억해야 하는 기억력 놀이. 모두 할머니가 직접 만들었다.
내가 시어머니랑 살면서 많이 힘들었거든요. 남편 위로 누나 둘이 살아 계시고 아래로 다섯 애를 잃었다 하더라고. 막내가 우리 신랑이고. 그라니 아들이 남편이고 애인이고, 뒤늦게 잡은 아들이라 더 귀했지요. 그래 많이 힘들었는데… 수없이 많은 파도에 깎여 조약돌이 예뻐지잖아요. 속상한 일들은 다 반들반들하게 깎아내야지. 뒤돌아봐도 후회 없고 누가 봐도 곱도록. 갑자기 속상하고 화나고 그래도 조약돌처럼 상처를 다듬어가며 인내하니까 단풍처럼 아름다운 시절도 오더라고. 이제 나도 할머니가 되어 우리 은송이랑 영어까지 공부하고 그러니 막 내일을 꿈꾸게 돼요. 이제 송이 할머니 노릇도 끝냈으니 앞으로 다가올 칠순을 바라보며 또 다른 꿈 꿔야지. 마지막은 생각 안 해요. 아직 멀었잖아요.
- 할머니가 보내는 꽃편지 꽃보다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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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그 흔한 말, 이제는 잘 쓰기로 한다. 할머니가 꽃보다 아름답다고. 그 할머니들이 젊은 우리에게 보내는, 삶이 담긴 진심.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