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를 어깨에 얹고 경기도 양주의 풀무원농장 길을 걸어가는 원경선. 그는 아흔이 넘어서도 밭에 나가 일했다.
우유 배달 청년 원경선 원경선은 1914년에 평남 중화군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조차 가까스로 마쳤다. 그의 생애를 지배한 기독교와의 만남은 어려서부터였다. 열여덟 살에 어머니와 함께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다. 신학교에 진학해 전도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한밤중 2시 반에 일어나 우유 배달을 했고, 낮에는 목장에서 노동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잠은 세 시간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건 몰라도 처음 하는 영어 공부를 혼자 힘으로 해낼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도전은 석 달 만에 좌절되고 말았다.
그는 서울에 와서는 낙원동 형제교회에 다녔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배화여고를 졸업한 인텔리 여성 지영희를 만나 혼인했다. 한평생 원경선의 완벽한 동지로, 공동체의 자상한 어머니로, 아흔이 넘어서도 종달새처럼 상쾌하게 찬송가를 목청 높여 부르는 ‘하느님의 딸’로 살다 아흔이 넘어 남편보다 몇 해 먼저 세상을 떠났다.
통째로 갈아엎은 삶 이 젊은 내외는 결혼한 이듬해인 1939년에 살길을 찾아 북경으로 떠났다. 아내의 타자 솜씨를 밑천으로 작은 등사 인쇄소를 차렸다. 인쇄소는 잘되었다. 그러자 원경선은 북경의 한 중학교에 특별히 부탁해 어린 학생들 속에 섞여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20대 후반이었다.
북경 생활 6년 만에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그때부터 한국전쟁 전까지가 원경선의 1백 년 생애에서 돈을 꽤 풍요롭게 번 때이다. 귀국하자 북경에서 닦은 영어 실력을 밑천으로 미 군정을 상대로 토목 청부업을 벌인 것이다. 그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공사 따려고 미군들한테 요리 먹이고 기생 채워주고. 못되게 해서 이룬 거니까 다 망가졌다. 어느 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 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결심은 곧 오차 없는 실천을 의미했다. 그는 ‘망가졌다’고 판단한 순간, 삶을 통째로 갈아엎었다. 위대한 농부 원경선의 길을 연 것이다. 1955년이었다.
1 충북 괴산군 청천면의 풀무원농장 안에 있는 원경선의 살림집. 그가 만년을 보낸 곳이다. 이제 원경선 기념관으로 꾸밀 것이다.
2 젊은 부부 원경선과 지영희.
3 원경선이 1990년 풀무원식품 창사 9주년에 기념 강연을 하기 위해 준비한 요약 메모.
4 원경선의 비료 노트. 특히 동물 똥의 성분을 낱낱이 조사한 것이 이채롭다.
이런 농사는 간접 살인이다! 경기도 소사, 오늘날의 부천에 황량한 벌판 1만 평쯤을 구했다. 원경선은 그 땅을 농토로 개간해 농사를 짓기로 한 것이다. 포성이 갓 멈춘 1955년의 한반도에는 탄피처럼 여기저기 전쟁 고아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는 고아들, 넝마주이들을 그곳에 데려와 함께 먹고 살기 시작했다. 농장의 이름은, 녹슬고 쓸모없는 인간을 풀무질로 달구고 담금질해 쓸모 있게 만드는 터전이 되자 해서 ‘풀무원’이라고 붙였다. 풀무원은 문이 없었다.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든, 누구든 받아들였다. 풀무원 공동체가 열린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원장님’으로 불렸다, 풀무원 원장 원경선.
원경선이 일본 애농회가 발행한 잡지에서 유기농에 관한 글을 읽은 것은 우연이었다. 애농회는 1946년에 고다니 준이치라는 분이 유기농 생산자들을 조직해 만든 단체다. 원경선은 그 글에 적힌 농약, 화학비료, 제초제의 폐해에 깊이 충격을 받고 직접 확인하고 싶어 일본 애농회를 찾아갔다. 풀무원농장도 그때 한국 농업의 현실대로 농약, 화학비료, 제초제를 쓰며 농사를 지었다. 1974년이었다.
고다니와의 만남으로 사람을 살리는 농사가 있다는 것, 이제껏 자신은 ‘죽이는’ 농사에 진력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하다. 원경선이 추구해온 농사를 통한 기독교적 인도주의 실천이라는 목표가 유기농을 통한 ‘생명 존중’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진화하는 시점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유기농 ‘전도사’로 나섰다. 원경선의 권유로 유기농을 해보겠다는 농부가 하나 둘씩 늘어가 마침내 한국 최초의 유기농 생산자 단체인 정농회가 결성되었다. 원경선은 농촌을 누비며 농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런 농사는 간접 살인이다.”
고통스러운 유기농의 길 정농회를 만들고 석 달 뒤인 1976년 4월, 풀무원농장은 경기도 양주군의 산골로 이사했다. 부천보다 넓은 1만 5천 평이었다. 원경선은 곧바로 유기농에 투신했다. “유기농은 가난하고 일손 부족한 우리 농촌에서 결코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하자고 했으니 나부터 나섰다.”
그러나 첫해는 참혹했다. 그래도 원경선은 계속했다. ‘오로지 사람을 살리자고 이런 농사를 시작했는데, 땅이 나를 망하게 할 턱은 없다’는 생각에만 의지했다.
3년째부터 땅이 조심스레 화답하기 시작했다. 어두운 흙의 세계의 주인공인 박테리아와 진균류가 매혹적인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그 땅에서 거둔 벼의 겉껍질만 벗긴 현미와 채소를 먹고부터 풀무원농장 식구들의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져갔다. 과연 사람을 살리는 농사였다.
서울 강남의 부인들이 양주 풀무원농장까지 ‘무공해’ 채소를 사러 오는 일이 생겼다. 원경선은 그 부인들에게 ‘못생겼지만 건강한’ 유기농산물을 먹으면 지구 환경을 보호하고 개인의 건강이 함께 도모된다는 점을 역설했다. 유기농을 통한 생명 존중과 이웃 사랑의 ‘전도’가 시작된 것이다.
풀무원 제품에 이어진 원경선의 정신 네 살 때 공동체의 아이가 된 그의 큰아들 원혜영(현 국회의원)이 아버지 농장의 채소에서 사업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는 1981년 5월 12일 서울 압구정동에 풀무원 무공해 농산물 직판장을 열었다. 아버지가 패러다임을 바꾸어 지은 농사의 소출을 처음 상품화한 것이다.
초기 사업은 매우 어려웠으나, 친구 남승우(현 풀무원 총괄 CEO)가 합류함으로써 사업 답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혜영은 남승우에게 풀무원 사업을 모두 맡기고 정치의 길로 나섰다. 원경선은 풀무원이 유기농을 포함한 식품을 통해 생명 존중과 이웃 사랑을 널리 구현하기를 당부했다. 원경선의 정신은 풀무원 사업의 포괄적 ‘잠언’이자 치열한 경쟁 속의 값진 ‘차별점’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인이 식품의 질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를 마련해준 회사라는 평가를 받는 풀무원은 그렇게 원경선의 대중적 ‘얼굴’로 성장을 거듭했다.
1 풀무원농장 공동체의 살림살이가 훤히 보이는 지영희의 가계부. 1993년 2월 9일부터 적은 것이 남아 있다. 그중 한 권을 펼치자 ‘원장님 대여’라는 항목이 있고, ‘100,000’이라고 적혀 있다.
2 여성 생활 문화지 <샘이깊은물>에 1994년 4월호부터 12개월 동안 풀무원 기사식 광고가 연재되었다. 그 첫 회가 ‘원경선’이었다. 그때 사진가 강운구가 찍은 원경선의 호미.
진정 이타적으로 산다는 것 어느 날 원경선은 농장에서 따온 토마토 한 쪽을 먹으며 이렇게 말했다. “모든 세포는 다른 세포를 위해 일을한다. 그러나 암세포는 자기만을 위해 먹고 자란다. 그러므로 이기주의는 암적 존재다.”
만년의 그는 ‘일용할 양식’을 빼고 나머지를 나누면 전쟁은 없다는, 이타적 평화주의를 피력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나눔의 힘을 입은 많은 단체, 홀트아동복지회, 거창고등학교, 국제기아대책기구, 환경정의 등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진정 이타적이고 아는 대로 실천하는 이런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한평생 절제 있게 생활하며 육신을 아낌없이 일한 덕에 골밀도가 청년처럼 조밀하던 분. “딱 10분만 눈 붙인다” 하면 정말 10분 뒤에 깨던 자기 통제가 자유자재했던 분, 밭에 퇴비를 쉽게 나르기 위해 일흔이 넘어 포클레인 면허를 딸 만큼 도전에 주저함이 없던 분, 더없이 검소했으나 언제나 풍요롭던 분, 늘 웃고, 웃으면 세상을 다 환하게 하던 분….
그리고 인류의 25%가 기아 상태이니, 25% 더 일하고 수입의 25%를 가난 한 사람을 위해 기부하라는 당부를 한평생 잊지 않았으며, 스스로 그렇게 살았던 분. 요컨대 이웃 사랑과 생명 존중을 화두처럼 들고 한평생을 수행한 분! 그분이 떠났다. 그러나 가르침이 큰 인간은 죽어서 오히려 산다. 그는 살아 있다.
제게 아버지는 ‘아버지이자 스승’이던 분입니다. 아버지는 한평생 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바른 삶, 바른 농사를 고집해온 ‘생명 농부’이셨고, 국내 최초로 화학비료와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정농회’를 설립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생명의 먹거리’에 관심을 쏟는 단계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또 생각과 실천이 항상 일치하는 분이셨습니다. ‘좋은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게 좋은 것이다’를 몸소 보여주신 아버지의 삶을 지침 삼아 제 자리에서 실천하는 게 자식 된 도리를 다하는 일일 것입니다. 제 나이 예순이 넘어서도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배우는 모습을 보니 언제나 부족한 게 자식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와 함께한 60년, 참 좋았습니다. 평안히 영면하십시오. _아들 원혜영 국회의원 원장님은 우리에게 큰 산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함께 계신 것만으로도 격려와 위안이 되는 분이셨습니다. 30여 년 전 풀무원농장의 유기농산물 판매 사업에 합류하면서 원장님을 처음 뵈었을 때, 풀무원이 만드는 제품에는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이 깃들어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또 풀무원 이름은 농장에서 시작됐지만, 그 이름을 크게 키웠으니 앞으로도 원칙을 지키며 잘 쓰기 바란다고 격려하셨습니다. 원장님의 가르침과 지원이 없었더라면 ‘바른 먹거리 기업’ 풀무원은 있기 어려웠을 겁니다. 비록 원장님은 떠나셨지만, 원장님께서 남기신 이웃 사랑과 생명 존중의 정신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입니다. _풀무원홀딩스 대표이사 남승우 벌써 10년도 넘은 이야기입니다. 남승우 사장이 양주에 있는 풀무원농장을 괴산으로 옮기고 그곳에 원경선 선생님께서 만년을 보내실 조촐한 살림 집 하나를 지어드리고 싶어 했습니다. 남승우 사장과 승효상 건축가와 함께 일본 삿포로 유기농법 농장을 둘러보러 짧은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공항 이민국에서 그분은 제 바로 앞에서 도장을 받고 나가셨습니다. 이민국 직원은 우리가 일행인 줄 모르고 제게 “저분 몇 살인지 아세요? 여든 여덟이세요. 너무나 꼿꼿하셔서 말이에요”라고 했지요. 저는 이 말을 여행 내내 실감했습니다. 키도 크신 분이 허리가 전혀 굽지 않은 자세는 물론, 가방을 들어드리려 해도 한사코 거절하셨습니다. 다니는 중에도 몇백 년이나 더 사실 것처럼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할 미래의 아이디얼한 이야기를 하시는… 큰 스승의 실체였습니다. 선생님 영정 앞에 제가 고개 숙이고 잠시 되짚어 인사드린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런 ‘스스로의 오랜 가꿈의 습관’을 실천하고 백수를 하신 거지요. _<행복이가득한집> 발행인 이영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