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십 평생을 오로지 무용에만 전력을 기울여오셨는데, 혹시 무용 이외에 다른일을 해볼걸, 하고생각하신적은 없나요?”
“저는 한 번도 무용말고 다른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이런 생각을 한 적은 있지요. 내가 하는 일은 왜 돈을 써야만 할 수 있는 일인가. 농부는 상추를 심으면 돈 들이지 않고도 따 먹는데, 내가 하는 일은 다 돈이 들어요. 나는 왜 먹고 사는 벌이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하는 걸까, 하고 고민한 적이 있어 하지만 한참이 일을 하다 보니, 학교 선생도 되고, 밥도 먹게 되더군요. 다른 일을 해볼까 하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어요. 저는 춤도 좋아했지만, 무대의상을 만드는 바느질도 좋아했어요. 무용은 종합적인 창작물이라서 여러가지 손이 가는 일이 많지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대에서 거의 다 해봤어요. 그런데 음식 만드는 것 만큼은 솜씨가 없어요.”
“늘 무대에서 사시느라 살림에는 소홀하셨던게죠?”
“그래요.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이 다 무사히 커준 게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지 몰라요. 저는 무용에 미쳐서 아이들을 일일이 거두지 못했어요. 큰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아직 어려서 학교에도 못가는 작은 아이를 집에서 혼자 놀게 할 수가 없어서 큰딸이 학교에 데리고 다녔대요. 하루는 비가 오니까, 큰딸이‘우리 동생이 밖에서 비 맞아요’하고 이야기를 해서, 선생님이 비를 피하게 해주었대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선생님이 전해주어서 알았어요. 대학에 몸담고 있을 때에도 통금 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가는 일이 종종 있었지요.”
“바깥 어른께서 다 이해해주셨나요?”
“88올림픽 때였어요. 그때도 공연을 준비하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지요. 하루는 집에 들어가니 남편이‘당신은 집이필요 없으니 이 집을 팔자’고 해요. 올림픽을 치르든지 집안일을 하든지 둘 중에 선택하라고도 했죠. 물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내 마음을 다 이해해주던 분이었지요.”
그이의 남편 안제승 씨 역시 경희대학교 교수와 대한무용학회 회장을 역임한 학자이자 무용인이다.
“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나중에는 그만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요. 일년 열두 달 공연 계획이 밀려와서 눈코 뜰새가 없어요. 무용이다, 뮤지컬이다, 학교 축제다 마치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제 기간에 맞추어서 공연을 올리려면 늘 아침부터 밤까지 꼬박 매달려야 하지요. 마치 누가 방망이를 들고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죽어라 달아나는 기분으로 일을 해왔어요. 공연을 올리기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느라 바쁘고, 작품을 올려놓고 나면 관객들의 반응이 좋은지 나쁜지 공포 속에서 지켜보아야 하죠. 평이 나빠도 문제지만 평이 좋으면 다음이 더 무서웠어요. 그 높은 언덕에서 뒷걸음질 치지 않으려고 고민을 하게 되니까요. 무용을 사랑하면서도 무용으로 번뇌하면서 보낸 세월이었지요.”
“어려운 고비를 지날 때마다 힘이 되어준 것이 있다면요?”
“6.25를 겪으면서 느낀 게있습니다. 참혹한 주검도 많이 보았고, 저 자신도 이산가족이 되어 피난살이를 하면서 죽음과 삶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헤쳐 나왔지요. 그때는 그저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이 자유지, 다른 게 자유가 아니에요. 그런데 신통한 것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빈손이었지만 살아서 움직이니 입을 옷이 생기고, 먹을 밥이 생기고 다시 살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삶의 어려운 길목에 다다를 때마다‘이건 소나기에 불과하다. 큰 비가 온 다음에는 햇볕이 더욱 더 쨍쨍하지 않더냐’하고 용기를 갖게되었습니다. 고통과 번뇌가 클수록 더 큰 행복과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이 경험은 창작활동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통과 번뇌가 클수록 그 속에서 좋은 작품이 태어난다고 믿게 된 거지요. 나는 지금도 어려운 지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저사 람이 지금 6.25를겪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지요. 교통사고나 큰 질병 같은 것들도 모두 6.25지요. 저마다의 6.25속에서도 살아갈 길을 찾아가는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봅니다.”
저이는 불가에서 이르는‘망상즉보리’를 몸으로 체득한 것처럼 보인다. 번뇌망상과 보리(수행으로 얻어지는 깨달음의 지혜)가 따로 있지 않고, 번뇌망상이 일어나면 그것을 화두로 바꾸어 깨달음을 얻어내는 것이 불교적 수행법이라는 것이다.
“마치 법문을 듣는 것같네요. 혹시 어떤 종교를 갖고 계신지요?”
“제대로 공부한 건 없지만 불자입니다. 때론 스님들이 제‘만다라’춤을 보고 놀라곤 해요. 하지만 제가 불교에 대해서 스님들께 여쭈면 춤은 대단한 경지지만 불교 지식은 별로 없다고 웃곤 하셨지요.”
저이는 책보고 공부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것이 창작에는 오히려 도움이 된 측면이 있단다.
“저는 책도 잘 안 보지만, 남의 작품도 잘 안 보러 다녔어요. 남의 작품을 보면 은연중에 닮기 마련이거든요. 저는 항상 남들과 다른 방법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했어요. 이를테면‘노들강변~’하면 사람들은 쉽게 하늘하늘한 버드나무를 떠올리지만, 저는 오히려 거센 폭풍에 휘날리는 버드나무를 표현하려고 했지요. 마찬가지로 무용도 우리 춤, 우리 무용을 어떻게 하면 우리식으로 표현해낼 수있는가를 고민해왔지요. 내 작품들은 그 고민의 결과물입니다.”
책을 보지 않는다 해도, 누구나 자기 생각을 길어 올리기 위한 생각의 원천이 하나쯤 있는 법이다. 그이에게 샘솟는 창작의 원천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흔히 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춤은 언제부터 배우셨어요?’
하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제 작품 세계는, 엄마 등에 업혀서 겨드랑이 사이로 엄마 젖 만지면서 멀리 달래 캐는 언니들 보는 그때 시작했다고 말하곤 하지요. 몸으로 하는 것만이 무용이 아니지요. 내 몸과 정신을 만들어 준 것은 그때의 소중한 자연 체험입니다. 저는 어릴 때 별명이‘말괄량이’‘덜래발이’‘사무라이’였어요. 덜래발이는 덜렁거려서, 사무라이는 눈썹이 까맣고 일자여서 그렇게 불렸지요. 저는 전쟁놀이를 하면 남자애들도 못 당하는 왈가닥이었어요. 나무도 잘 타서 도토리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고, 산으로, 벌판으로, 냇가로 쏘다니기를 좋아했지요. 기생잠자리를 잡고, 땅거미집을 들여다보면 마치 우주의 본면목을 들여다본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죠. 그런 자연 체험들이 나의 창작 세계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훌륭하신 것은 제가 무엇을 하더라도 된다, 안된다 간섭하지 않았어요. 무엇이든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도록 놓아두었죠. 인간은 말을 못하는 시절에도 자기 식으로 세상과 사물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규격화해서는 안됩니다. 어릴 때는 공기를 공기인 줄 모르고 먹는 것처럼 생각도 모르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게 나중에 삶의 양분이 되고 자양이되지요. 아울러 예술 창조의 무한한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시절 규격화시키는 교육은 정신의 성장을 개발시키기는 커녕 중지시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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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릴 때 최승희의 사진을 보고 무용가가 되리라 마음먹은 김백봉 선생을 빼고는 우리 무용을 이야기할 수 없다. 194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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