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김영일 씨가 아틀리에 에르메스에서 자신의 작품 앞에 섰다. 뒤쪽으로는 그가 SNS를 통해 일주일 동안 인연 맺은 사람들의 사진이고 오른쪽에는 김선녀 할머니가 ‘평창 아라리’를 읊조리고 있는 모습이다.
서른두 살의 ‘젊은 사진가’ 김영일 씨의 명함에는 ‘대한민국 김영일’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가 문화계 인사 서른세 명의 초상을 찍어 예술의전당에서 전시한 1992년의 일이다. 국적을 적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에게 ‘대한민국’은 상호였다. 당시 가장 섭외하기 힘들었던 사람은 가야금 하는 황병기 선생이었다. 칠고초려, 일곱 번 찾아가서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자신이 20년 뒤 국악인을 찍은 사진으로 전시를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가 국악과 만난 것은 4년 뒤의 일이다.
“한 잡지사의 의뢰를 받아 촬영 중이었어요. 클래식, 국악, 가요, 재즈 같은 각 장르의 젊은 연주자들이 왔는데 국악인 중에 채수정이란 사람이 있었어요. 스물일곱쯤 먹었나. 난 사진 찍을 테니까 당신은 소리를 해라 하고 파인더를 들여다보는데, 그 사운드가 저를 압도해서 셔터를 누를 수가 없었어요.”
축음기를 두 대나 놓고 들으시던 할아버지에게서 클래식 음악을 접한 그다. 할아버지는 음반이 나오면 아버지를 평양에 보냈다. 일본의 ‘도시바’ ‘빅타 레코오드’에서 음반이 나오면 서울에 서른 장, 평양에 일흔 장이 깔리던 시절이다. 마니아들은 서울 종로가 아니라 아예 평양까지 오토바이 타고 가서 그것도 두 장씩 레코드를 사왔다. 축음기 바늘에 판이 상할 때를 대비해서 두 장인 거다. 그런데 그런 할아버지 아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음반이 2만 장이요, 자신이 1만 장을 모은 그를 ‘소리’가 압도했다. 서른네 살 때다.
“KBS 라디오의 클래식 채널인 93.1mhz를 듣다가 오후 5시면 꼭 국악이 나왔어요. 그때마다 채널을 돌리던 저예요. 머릿속에 국악은 ‘잔칫집’ ‘할머니’ ‘니나노’ ‘기생’ 같은 단어와 함께하는 말이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폄하하던 국악과 일대일로 맞닥뜨리니까 녹다운, 완전히 나를 무너뜨리더군요.”
“아서라, 세상사 허망허다. 젊어 청춘에 먹고 노자.” 채수정 씨가 부른 임방울 선생의 편시춘片時春 앞에 무너졌다. 신과 맞닥뜨렸을 때 인간이 느끼는 무력감을 종교에서는 무너졌다고 표현한다. 전인격을 건드리는 체험을 말한다. ‘소리’ 앞에 그가 평생 들어온 음악과 생각의 기저가 무너진 셈이다. 진본의 힘이었다.
그의 음반회사에는 온통 우리 나라에 몇 대 없는 기계들투성이다. 좋은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항상 가장 좋은 장비를 구입하기 때문이다. 김영일 씨는 돈을 버는 방법도 쓰는 방법도 제대로 안다.
국내 유일의 국악 전문 음반사인 ‘악당이반’의 시작이었다. 2005년에 정식으로 회사를 차린 뒤 지금까지 72타이틀의 국악 음반을 냈고 녹음한 콘텐츠만 2천 개가 넘는다.
뭐 이런 놈의 충격
그렇게 국악을 만난 김영일 씨는 채수정 씨의 안내로 보성, 장흥, 벌교, 순천, 해남 같은 남도를 쏘다녔다. 거기 오래된 여관집 같은 곳에 ‘선수’들이 초야에 묻혀 지내고 있었다.
“화엄사 있는 동네, 구례 같은 데를 데리고 다니면서 선수들을 만나게 해줬어요. 그러다 배일동 씨를 만났지요. 소리한다고 지리산에 들어간 지 4년째래요. 제가 의심은 또 많아서 그런 사람들 잘 안 믿는데, 이 사람은 밤에 가도 아침에 가도 겨울에 가도 그 자리에서 북 치고 소리를 하고 있어,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죠.”
‘진짜 미친놈’이었다. 그에게 “서울 가면 어디서 음반 살 수 있나?” 물었더니 돌아온 답은 “누가 우리 같은 사람들 음반 내준답디까?”였다. 쇼크였다. 음반은커녕 녹음도 하나 없었다. 자신은 그들과 계속 ‘놀 건데’, 그들은 피를 토하는데 음반이 하나 없는 거다. 그길로 사람들에게 물어서 녹음 장비를 사고 직접 녹음하러 다녔다. 기술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에 세 대밖에 없다는 고가의 마이크를 사서는 ‘모노’와 ‘스테레오’도 구분 못해 고장 났다고 수리 기사를 불렀을 정도다.
혼자 알아보고 해외의 워크숍을 쫓아다녔다.“장비가 겁나게 비싸요. 그래도 이 사람들에게 평생 소리 듣는 거 머릿수로 나눠보면 싼 거네 하면서 샀지요. 사진이야 원래 찍던 거니 내가 ‘박으면’ 되고요.”
국내 유일의 국악 전문 음반사 ‘악당이반’의 시작이었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72타이틀의 국악 음반을 냈고 녹음한 콘텐츠만 2천 개가 넘는다. 그사이 스테레오도 모르던 초짜는 2011년 <정가악회 풍류 Ⅲ 가곡> 음반으로 그래미 기술상 후보에도 올랐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은 이런 경우를 두고 쓰는 말이다.
“내가 기존에 사진가인 것과 무관하지 않았어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찍었는데,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기록하고 담더라고요. 국악을 녹음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제게는 기록의 차원이에요. 기록은 제 기본 습성인 셈이죠.” 앞에서 끌어주는 사람도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말리는 사람은 많았다. “사진 전문 출판사도 1993년부터 운영하고 있는데 안 망했어요. 마흔다섯 권 정도 사진집을 만들었고요. 악당이반도 벌써 망했어야 하는데 버티고 있단 말이죠.”
처음엔 ‘악당樂黨’이었다. 법인명으로는 등록할 수 없는 단어(악당)라고 해서 ‘이반’을 덧붙였다. 바보 이반이기도 하고 ‘이롭게 하는 무리’라는 뜻의 이반利班을 나중에 붙이기도 했지만, 원래 뜻은 ‘인생 2학년 2반’이다. 사진가로서의 삶이 ‘1학년 1반’이었으니 이제 인생 2막을 살겠다는 거다. 여기에 그의 지론인 ‘인생 10년론’이 등장한다. “유학 다녀와서 곧장 군대에 간 게 스물일곱 살 때인데 제대하고 나니 서른이더군요. 환갑까지 절반 남았고 30년이나 살았는데 공부하고 군대 다녀온 것밖에 없잖아요. 돈 벌어본 적도 없고. 이거 큰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더군요.”
일단 환갑 전까지 10년씩 인생을 나눠서 쓰기로 했다. 마흔이 되기 전까지 10년간은 사진으로 유명해지되 남이 해달라는 걸 해주면서 돈을 벌기로 했다. 그 다음 쉰이 될 때까지 10년은 그중 절반을 내가 하고 싶은 것으로, 다시 환갑이 될 때까지 10년은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돈을 벌자고 결심했다. 아이템은 찾아가
면서. 예순 살이 넘으면 그때부터는 모아둔 와인을 하나씩 ‘까면서’ ‘저렇게까지 심하게 놀 수 있나 할 만큼’ 놀 계획이다. 3학년 3반은 염장 식품을 만드는 것이다. 된장과 젓갈류를 만들기 위해 먼저 소금을 준비하고 있다. 어전이 있던 곳인 태안의 염전을 사서 왕이 먹었다는 7년간 간수 뺀 소금을 만들고 있다. 환갑이 되는 날, 국악 일은 모두 접고 그 일을 할 계획으로 준비 중이다. 계획만큼이나 김영일 씨가 사는 방법도 치열하다. 마흔을 넘기고는 하루에 네 시간만 자다가 5년 전부터는 세 시간을 넘지 않는다. 새벽3-4시면 일어난다. 하루에 스무 시간을 쓴다. 그 동력이 궁금하다. “그게 묘한데, 저는 그게 계속 나와요. 잘난 것도 없는데 새벽에 깨서 이불에서 나가기 싫어 꼼지락대는 5분간에요. 어제 내가 뭘 했지? 하고 떠올려요. 그분 만나서 이런 말은 잘못한 거구나 같은 생각을 하다 보면 다음은 오늘 뭐 해야 하지? 띵똥하고 불이 들어오면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요. 예전에는 그걸 많이 놓쳤는데 재작년에 직원이 아이패드를 사다준 뒤로부터는 메모를 할 수가 있으니까 정말 좋아요. 새벽 4시부터 한두 시간쯤 메모하는데, 이런 내 자신이 너무 재밌어요.” 그런데, 잠을 줄인 것도 모자라 일하기 좋아서 점심을 먹지 않고 일한다. 9년째다. 그에게 점심 한 시간은 두 시간과 맞먹는다. 일을 중간에 끊지 않아도 된다. “오후 6시면 직원들이 퇴근해요. 그러면 10시까지 다시 일을 합니다. 주말에는 다른 일을 하고요. 주말 이틀을 잘 쓰면 한 주간 일한 것과 맞먹어요.”
유명 사진가로 출발해 지금은 사진 전문 출판사와 국악 전문 음반사를 운영하고, 그루비주얼이라는 영상 관련 회사도 이끌고 있다. 회사는 10년 사이에 매출이 딱 1백 배 늘었다. 하루를 나눠 쓰지만, 일주일도 나눠서 월-목은 영상에, 금-일은 음악에 쓴다. 비즈니스와 관련한 결정은 사무실에서만 하도록 시스템화했다. 5분 안에 수천 수억짜리 프로젝트를 결정해야 하는 일이 하루에도 여러 번이지만 이제는 적응했다. “회사도 10년이 넘었고, 직원들과 그 가족까지 있으니 어떤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아요. 룰을 어기며 산 적은 없지만 직원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정도로 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이룰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지요.”
우리 것이 좋다고 하지만 우리 민족은 우리 음악을 ‘공유’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김영일 씨의 생각이다. 함께 공유해서 정말로 별로라면 빨리 버리고 좋다면 빨리 발전시키고 지켜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우리가 머뭇거리는 사이 선생님들이 돌아가시고 있다며 “환장하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한복 입은 퓨어 코리안
그가 잠을 줄이고 점심을 걸러가며 일하면서 ‘중간 결과물’을 내놓았다. <귀한 사람들>이란 타이틀로 아틀리에 에르메스에서 사진을 걸었다. 20여 년간의 인연이 있는 국악인들과 일주일간 SNS를 통해 맺은 인연들을 렌즈에 담았다. “흔한 싸이월드 한 번 해본 적 없는데, 우연히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페이스북을 곁에서 보다가 자기 프로필에 한복 입은 사진을 올린 것을 보니 특이했어요. 저야 20여 년간 국악 하는 분들이 한복 입은 모습은 봤지만 그 외에는 잘 보지 못했거든요.”
지금 한복은 실상이 아닌 허상이다. 외국인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들어왔다 나갈 때까지 한복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다. 5대 한류에 한복이 포함돼 있지만, 어디에서도 족적을 찾기 어렵다. 곧장 아르바이트를 써서 페이스북에서 한복을 프로필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일주일간 찾은 뒤 친구 맺기를 시도했다. 한복 프로필 사진을 올린 사람이 1천여 명. 그런데 그중에서 여자로만 6백50명 정도가 국악인이었다.
이들이 SNS상에서의 ‘퓨어 코리안’이었던 셈이다.“그 국악인들에게 제가 다시 한 번 친구 맺기를 신청한 다음, 내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했지요. 당신들을 촬영하고 전시한 다음 사진과 원본 데이터를 주겠다. 그렇게 해서 11명이 최종 따라와준 겁니다.”투 클릭two click. 김영일 씨는 친구 신청과 수락의 두 단계를 통해 맺은 인연과 20여 년 가까이 이어온 인연들 가운데 어떤 게 진정한 인연이고, 이 인연들이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묻는다. 아울러 프레임 속에만 인연을 가두지 않고 등장인물들이 갤러리에서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도록 했다.
사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정면을 바라보는 컷과 몸을 옆으로 튼 컷. “모든 초상화는 앞을 보거나 회피하거나 옆을 보지요. 정면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몸뿐만 아니라 정신도 맞춘다는거예요. SNS를 통해 일주일간 인연을 맺은 분들은 전부 옆모습이에요. 옛날부터 아는 분도 잘 모를 때 찍은 사진은 옆모습이에요. 전 그 사람들의 내용을 알기 시작할 때 정면을 찍어요. 이게 저에게는 개인적이지만 ‘전신傳身’의 과정이지요.”
전신화는 조선시대의 초상화 기법이다. 전신全身을 그리는 것은 보통 임금님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의 경우다. 전체를 그리기 위해서는 상대를 알아야 한다. 과거에는 화공이 양반집에 몇 달을 기거하며 초상화를 그렸기에 양반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김영일 씨가 얘기하는 전신화는 이렇게 과정을 통해 완성하는 그림이다. 그래서 그는 ‘전신화’보다 ‘전신사조’라는 말을 쓴다. “사진은 말 그대로 진실을 복사하는 것이지요. 진짜는 따로 있으니 상대를 모르면서 육중한 카메라를 써봐야 그건 스냅사진에 지나지 않습니다. 속여서는 안 돼요.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이 비로소 포트레이트를 완성해줍니다.”
이번 전시의 전 과정은 SNS를 통해서 세상에 흘려보냄으로써 완성된다. 그는 그동안 아틀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현대미술 전시들과 비교하면 자신의 ‘사진걸기’가 언뜻 가장 구태한 방법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전시가 끝난 후 셔터를 내리고 불을 끄면 사라지는 그동안의 전시와 달리 세상을 향해 전개되고 공유하는 방식의 이번 전시가 오히려 현대미술이 아니겠느냐고 묻는다.
전시를 마치면 다시 2반의 삶을, 다시 3반의 삶이 남았다. 4반의 삶은 어떨까.“산을 올라가는 데 30년, 내려가는 데 30년, 그다음 평지로 내려와서 그 관성으로 가다가 죽어야지, 내려오다 죽으면 안타깝지 않겠어요? 그런데 10년씩 인생 나눠서 쓰다가 예상한 산길이 아닌 샛길에 들어선 거죠. 인생이 그런 건가 봐요.”그가 걸어온 샛길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어서 안내자도 동무도 없다. 덤불을 헤치고 가야 하는데 심지어 낫도 하나 없는 셈이다. 그래도 중간에 봉우리에 올라보니 잘못 든 샛길이 계곡이나 옆산으로 향한 게 아니라 정상을 향해 있어서 다행이란다. “인생 4학년 4반은 굉장히 더 큰일을 할 것 같지만 아니에요. 죽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3반까지예요. 완벽하게 내려놓고 갈 겁니다. 미리 준비하고 있어요. 준비 기간이 제일 오래 걸리겠네요.”
그가 푹 빠져 있는 ‘산조’는 한 번에 1만 번 이상의 터치가 들어가는 연주곡이다. 우리 음악의 정수이자 끝이다. 작곡자는 일생에 걸쳐 단 하나의 산조만을 짓는다. 거기에는 서양음악처럼 주제가 반복되지도 않는다. 같은 음은 하나도 없다. 한번 지나치면 돌이킬 수 없다. 김영일 씨는 인생이라는 산조를 짓고 있다. 그리고 그 산조가 명곡이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 [귀 기울여 들어보니] 국악을 남기는 사진가 김영일 씨 나는 내가 너무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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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입은 국악인. 양복 입은 국악인보다 더 빤한 모습을 담은 그에게 “이 사진은 왜 찍었느냐?”고 물으러 갔다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묻고 왔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