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라이프&스타일] 전시 기획자 황록주 씨 당신도 인생의 꽤 멋진 주인공입니다
경기도 미술관 학예연구사 황록주 씨가 기획한 전시는 늘 “황록주가 만든 전시답다”라는 평가를 받곤 한다. <아날로그> <패션의 윤리학> <선의 아름다움> 등 누구에게나 유효한 것, 누구라도 누려야 할 것, 누구나 즐거운 것을 모토로 한 그의 전시는 삶의 퍽퍽함을 다독일 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커뮤니티 아트 <동네 미술>전을 통해 아주 소소한 일상도 꽤 멋지고 의미 있는 활동이라 이야기한다. 스스로 주인공인지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무대가 되어주며, ‘당신의 삶 또한 예술이 될 수 있다’고.


2012년 경기 아트 프로젝트 <동네 미술>전을 기획한 전시 기획자 황록주 씨. 그는 ‘커뮤니티 아트’를 통해 우리네 사는 동네 어딘가의 진한 삶, 그 향취를 담고자 한다. 진솔한 삶의 풍경을 예술로 승화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이들 모두를 특별한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전시. 사진 속 작품은 인계시장 프로젝트의 ‘재활용 워크숍’. 전시는 1월 1일까지. 문의 031-481-7005

사진을 전공하고 3D 이미지를 구현하는 디자인업체를 운영 중인 남편 손정목 씨. 집을 설계하며 여러 가지 생각 리스트를 기록한 ‘목록가우睦鹿嘉宇’(손정목, 황록주, 가원&가윤 자매의 이름을 딴 목록 리스트)에는 자동차를 갖고 놀 수 있는 놀이 공간과 암실, 영상 스크린, 수영장, 벽난로가 적혀 있다. 영상 스크린을 설치한 지하 층은 그의 소망을 실현한 공간.

3층 다락방 서가 책장에 등을 기대고 창밖을 바라보며 책 읽는 시간이 가장 여유롭다.

미술관으로 들어간 부엌 경기도의 한 미술관. 전시장을 둘러보다 ‘인계시장 프로젝트’ 라는 작품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언뜻 플리마켓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상황이 기이하다. 모 검사의 명패와 안마 의자, 자개농과 환기구 등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 이종교배를 이루며 긴장감을 일으킨다. 장롱 문짝, 양철 밥상, 여행 가방 등을 쌓아 만든 이 부엌은 경기도 수원 인계시장 안마시술소에 모여 살던 작가들이 동네 주민들이 버린 물건을 모아 이뤄낸 창조의 작업대다. 액자 속 그림이나 좌대 위에 오르는 조각 작품이 아닌, 일상이 예술이 되는 ‘커뮤니티 아트’의 일환으로 큐레이터 황록주 씨가 기획한 <동네 미술>전의 한 작품이다.

큐레이터로 사진 비평지의 편집인으로, 미술 평론가로 활동하며 현대 미술을 다루다 보니 과연 예술이 대중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한다는 황록주 씨. 그는 <동네 미술>전이 벌이는 일들의 의미를 이렇게 소개한다. “리금홍 작가는 창동에 있는 노인정을 찾아다니면서 할머니들에게 이름을 물어봅니다. 아들 낳기 위해 붙인 이름, 술 취한 아버지가 잘못 적은 이름, 옆집 멍멍이와 동명이 되기까지 당신의 정체성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이름으로 불리며 무덤덤하게 살아온 동네 할머니들. 그들의 고단한 삶의 기록을 보면 눈물, 콧물이 쏟아져요. 작가는 할머니들의 이름을한 자 한 자 오롯이 도장에 새기고 그 모든 과정을 전시했는데, 이처럼 예술이 아닌 것을 예술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커뮤니티 아트의 핵심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을 아주 의미 있는 것으로 바꿔주는 일, 스스로 주인공인지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무대가 되어주는 전시라고 할까요.” 사실 순간순간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는 남녀노소, 빈부 격차 상관없이 어디에나 존재하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 역시 스스로의 몫이다. 그럼에도 예술가가 개입해 일러주는 역할을 한다니 어쩐지 쓸쓸해진다. 당신도 인생의 꽤 괜찮은 주인공인데 혹여 모르고 사는 건 아닌지, 황록주 씨는 미술관을 찾는 모든 이에게 아주 소소한 일상들이 꽤 멋지고 의미 있는 활동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단다. 그리고 황록주 씨 자신도 삶의 주인공으로 꼭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일, ‘집 짓기’를 통해 삶의 또 다른 무대를 만들었다.

1 디딤돌을 딛고 올라가는 화장실. 2층에서 1층으로 떨어지는 박스를 만든 뒤 콘크리트를 부어 구조 물을 매다는 방식으로 작업해 공간에 색다른 입체감을 선사한다.
2 침실 한쪽 ㄱ자형 창은 이 집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으로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선의 아름다움>전을 준비하며 1940~1950년대 빈티지 가구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몇 달간 빈티지 사이트를 뒤져 임스 빈티지 체어를 구했다.
3 3층 다락방에서 2층 복도를 연결하는 미끄럼틀. 경사가 급해 둘째 가윤이는 아직 도전해보지 못했다. 암벽등반 장치를 설치할 계획.
4주방과 다이닝룸을 분리하면서 주방은 옛날 방식으로 단 차이를 두었다. 조리대를 통해 중정을 바라볼 수 있으며, 뒤쪽 면은 전면 수납장을 설치해 실용성을 높였다.

현관에서 한 계단 올라와 다시 소파 자리를 둥글게 파내니 복도에 걸터앉을 수도 있어 일석이조. 앉아서 바깥이 살짝 보이는 창은 선큰으로 프라이버시는 보장되면서 지하까지 빛이 유입된다. 소파는 아르네 보다Arne vodder, 그레테 야크Grate Jalk 작품으로 북유럽의 앤티크 사이트를 뒤져서 오리지널 빈티지를 찾았다. 신혼 초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서안과 소반을 티 테이블로 매치하니 제법 잘 어울린다.

집을 꿈꾸다 “우리 가족의 삶이 주인공이 되는 집을 짓기 위해 1년여 동안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죠. 6개월간 도면을 그리고, 3개월의 감리를 거쳐 수많은 결정과 포기를 반복하며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 모든 것이 살아가는 공부더라고요. 너무 치장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에서 자연스러운 미감이 우러나오는 시각적 모범이 되는 ‘집’을 완성했어요.” 툇마루에서 배 두드리고 누워 있으면 이런 게 바로 행복이구나 하던 기억, 담벼락 사이 빗물받이 아래 우산을 꽂아두고 물장구치며 놀던 기억. 어린 시절 이러한 추억들이 아파트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에 불을 지피는 요즘, 황록주 씨와 남편 손정목 씨 역시 집 짓기의 열망을 활활 태우기는 마찬가지였다. 평생 딱 한 가지 해보고 싶은 일이 ‘집 짓기’이고, 스무 평짜리 첫 아파트를 장만하던 7년 전부터 이미 땅을 보러 다녔으니 말이다.
신도시 개발 붐이 일던 몇 년간 용인 죽전과 판교 택지를 알아보다 비싼 땅값에 포기하기를 반복, 그러다 용인에서 수원으로 나가는 샛길인 광교 지역에 택지를 분양받았다. 아이들 학원 버스가 지나면서 아파트 병풍 대신 앞뒤로 완만한 능선의 산자락이 펼쳐지니 현실과 이상에 모두 부합하는 조건이었다. 땅을 계약하고 6개월 동안 혼자서 집 설계안을 그린 뒤 도면을 들고 ‘사무소 효자동’의 서승모 소장을 찾아갔다. 서승모 소장은 백남준 아트센터를 비롯해 다양한 전시를 진행했기에 무엇보다 미술 작품에 대한 이해가 높은 건축가다. “땅을 사고 보니 사다리꼴이더라고요. 기본적으로 ㄷ자형 구조가 나올 테고, 입면을 막는 형태의 중정이 있어야만 바깥에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겠다 싶었죠. 그리고 현관부터 거실, 부엌까지 몇 계단씩 달라지는 단 차이를 고려해 입면도를 그렸어요. 미끄럼틀 자리, 아이들 욕실 입구에 세탁실과 아이 옷장을 함께 구성하는 것까지 모두 도면에 들어 있었죠.”

온 가족이 매일 밤 비포장 언덕길에 올라 집이 들어앉을 땅을 가늠해보고, 컨테이너 박스(현장 사무소)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으며 집에 관한 위시 리스트를 하나씩 이야기하던 시간들. 그런 기억들이 하나 둘 쌓여가며 아이들은 ‘건축’이라는 개념을 인식하게 된다. 실제로 어느 날 아이들이 공사장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나뭇가지와 돌멩이로 집을 짓더라는 것. 부부는 단독주택이기에 가능한 것들을 최대한 반영하고 싶었다. 특히 아이 방은 수직으로 공간을 분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데, 2층과 3층 다락방 정도의 높이를 2:1 비율로 나눠 아래층엔 책상을, 위층엔 침대를 두었다. 3층 다락방과 2층을 연결하는 미끄럼틀은 가족을 위한 미니 암벽등반 시설을 설치할 예정이라니 플레이 하우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폴 헤닝센의 PH 4/3 펜던트 조명등은 자그마한 것 같지만 사실 일반 가정집에서 사용하기 적당한 크기다. 벽면의 가족 오브제는 유영호 작가 작품.
2 수직으로 공간을 나눠 책상 위쪽에 침대를 배치한 아이디어가 재밌다. 하루에도 사다리를 수없이 오르락내리락하니 절로 운동이 될 수밖에. 
3 하늘의 다양한 풍경을 찍은 남편 손정목 씨의 사진 작품을 복도에 장식했다. 
4 스파 부럽지 않은 욕실. 비록 중정이 막혀 있지만 하늘은 뚫려 있는 선큰 구조로 프라이버시는 보장되면서 온종일 햇볕이 들어온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무엇보다 이 집의 백미는 공중 부양한 계단과 화장실이다. 계단은 한쪽에만 철심을 박아 외벽에서 조이는 공정으로 반대쪽 난간을 생략하니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가볍다. 손님용 화장실 역시 공중에 박스가 매달린 형태로 2층 공정에서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것. 서승모 소장은 창을 통해 빛이 어떻게 흘러 들어와 어떻게 번져 나갈 것인가에 대한 매스 스터디가 좋은 건축가이기에 이처럼 다양한 시도를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거실 벽과 중정 벽면이 연결되고, 둥글게 파낸 바닥도 같은 마감재를 사용해 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것도 재미있다.

“솔직히 건축가 입장에서는 저의 어설픈 설계안을 보고 기가 찼을 수도 있지만, 결국 건축은 그 안에 담기는 ‘삶’이 주인공이잖아요. 저희 부부도 집을 지으면서 많이 배웠어요. 재료와 건축법의 한계, 공정마다 필요한 세부적인 사항들을 비롯해 시공 회사와 문제가 있을 때마다 조율하는 일까지…. 특히 몇 개월 동안 선택과 포기의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는데, 뭐 하나를 제대로 포기하지 못해 예산이 초과되기 일쑤죠. 집을 지을 때는 눈 높이와 현실의 괴리감을 인정하고 극복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아요.”

소중한 경험으로 어느새 집 짓기에 득도한 황록주 씨. 그러고 보니 예술의 중심에는 항상 건축이 있었다. 중세까지도 종교 건축은 인류 문화사를 관통하는 근본 학문이었고, 회화는 신전에 걸리는 그림이요, 조각은 벽면의 부조를 위해 존재했다. 도자는 의식을 위한 도구였으니 아름답다고하는 모든 것이 집대성된 공간이 바로 건축물이던 셈. 그 요소요소가 분리된 건 불과 2백~3백 년 된 일이니 현대 미술과 건축을 어찌 떼어놓을 수 있을까. 게다가 도면을 직접 그릴 정도로 건축에 소질을 보인 그이니만큼 이번 봄 선보일 <공간 탐험가> 전시가 유독 기대된다. “결국 미술관에서 하는 일이 기본적 미감을 되찾아주는 것 아닌가요. 사실 우리나라 조선 시대 목가구는 굉장히 비례가 좋거든요. 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겪으며 어떤 게 모범인지 잊은 거지요. 사대부가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시골 농가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던 미감인데 어느 날 싹 사라졌죠. 그러다 1980년대엔 앤티크 마블 가구가, 1990년대엔 프로방스 스타일 가구가 유행하더니 이제 그린 인테리어를 얘기하죠. 그렇게 근거 없이 나도는 오염된 시각적 요소들이 우리의 문화를 얼마나 유치한 것으로 만드는지에 관한 인식, 우리가 회복해야 할 근원들이 어떤 것인지 일깨울 수 있도록 많은 전시 기획자가 노력해야겠죠.”

그리고 삶이 조금 ‘덜’ 분주해지는 순간을 기다린다는 황록주 씨. 예술학을 전공했지만 늘 시인을 꿈꾸었기에 시도 쓰고, 집 짓기에 관한 사유를 담은 에세이도 내놓고 싶단다. 그 목표는 2년 후 다가올 불혹이다. 윤석남 작가도, 박완서 선생도 애들 키우고 여유가 생기는 즈음 폭발적인 열망을 펼쳐내지 않았는가. 패션 디자이너 소니아 리키엘 역시 집에서 조금씩 손뜨개로 만든 것을 모아 숍을 연 게 마흔 살 때였으니 그 역시 어떤 일이든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다.

우린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모습으로 괜찮아지길 꿈꾼다. 하지만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누가 뭐래도 성공한 인생이다. 우리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말들은 스스로 자신을 인정할 수 있을 때 나오는 것 아닌가. 어쩌면 예술은 그 간단한 진리를 잊게 만드는 시스템에 대항하는 표현 방식일 수 있다. 전시 기획자로서, 인생의 주체로서 늘 그 메시지를 숙지하려 노력하는 황록주 씨, “당신은 당신 인생의 꽤 멋진 주인공입니다.”

1 사다리를 타고 오르면 나오는 자매의 밀실. 마주 보는 침대 가운데에 문을 달았다. 
2 눈이 오면 뒷산은 자연 슬로프가 된다. 스키복을 챙겨 입고 눈썰매 타기에 한창인 가원, 가윤 자매.

집 짓기를 통해 소중한 추억을 만든 황록주・손정목 씨 부부와 가원, 가윤 자매 가족.

글 이지현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