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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장인들 번트 대지 않는 인생
미국의 경제 주간지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에 따르면, 일본 프로 야구의 번트 수가 미국 메이저리그의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안전 우선주의가 일상생활 전반에 퍼져서 사회의 활력을 좀먹고 있는 것이지요. 도전하지 않는 젊음은 매력이 없습니다. 여기 삼진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생의 배트를 당차게 휘두르는 청춘들을 소개합니다.


1 압구정동 한복판에 위치한 작업실. ‘명동 수선 전문점’이라고 선팅한 창문이 재미있다. 이전에 수선집이 있던 자리라고.
2 찍어낼 종이의 위치를 잡고 있다.
3 제작중인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이 늘어날수록 찍는 수도 늘어난다.
4 둥근 디스크에 물감을 칠하고 롤러로 평평하게 민다.
5 도판은 언니 나경인 씨가 그린 그림으로 제작한다.


온몸을 싣다, 레터프레스를 하는 나경수 씨
레터프레스letterpress는 철판 인쇄를 말한다. 문자판의 돌출된 부분에 잉크를 발라 기계로 누르면 종이에는 프린트된 잉크와 함께 요철 자국이 남는다. 이때의 입체감이 묘하게 아날로그적 향수를 자극한다.

툴 프레스tool press란 이름으로 작업하는 나경수 씨가 레터프레스에 끌린 이유는 예뻐서다. “조소를 전공한 후 가구와 인테리어 디자인을 해보려고 밀라노에서 공부하고 잠시 일을 했어요.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비로소 제가 하려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회사를 그만두고 그래픽과 편집 디자인 일을 하던 그가 레터프레스를 알게 된 것은 카드 제작 의뢰를 받고서였다. 원하는 느낌대로 직접 인쇄를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레터프레스까지 가 닿았다. 국내에서는 자료를 찾을 수 없어서 웹서핑을 통해 빈티지 기계를 찾았다. 함께 작업하는 언니 나경인 씨가 “그냥 사면 되지”라고 한마디 거든 것이 시작이다.

사용법을 몰라 유튜브를 헤매다 결국 일본에서 배울 수 있는 곳을 수소문해 이메일과 전화로 연락하기를 석 달, 결국 허락을 얻어내 며칠간 배웠다. 하지만 필요한 부품과 재료들은 다시 찾아야 했다. 인쇄 골목을 다니며 넉살 좋게 정보를 얻고 필요한 것을 구했다. 원하는 색의 물감을 만들고 디스크라고 부르는 둥근 판에 바른 다음, 고무 롤러로 물감을 펼친다. 판을 끼우고 종이 위치를 정한 다음, 힘을 실어 누른다. 힘이 약하면 요철이 생기지 않고 너무 세게 누르면 뒷면을 사용하지 못하기도 한다. 수평을 맞추거나 위치도 조절해야 한다. 한 가지 색상의 그림이 하나 들어가는 카드 1백 장이라면 기계로 1백 번을 반복해서 찍어야 한다. 색이나 문양이 추가되면 다시 수백 번을 반복해야 한다. “알맞은 종이를 찾는 게 제일 어려웠어요. 100% 코튼이거나 푹신해야 눌리면서 들어갈 수 있는데, 그램수가 높아도 딱딱하면 안 되니까요.”

이제는 처음 원하던 대로 카드나 명함 정도는 만들 수 있다. 앞으로 사이즈를 업그레이드해서 더 다양한 작업을 해보려 한다. 하지만 자동 기계를 써서 더 많은 주문을 소화하려는 욕심은 없다. 판매처가 많은 것도 원하지 않는다. 애초에 돈 버는 재주는 없다는 생각이다. 부모님은 한심스럽게 생각하시지만, 처음 시작했을 때의 마음을 지키고 싶다.
“1백 년 후에도 누군가 어떤 것을 만들고자 할 때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레터프레스가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도록 잘 이어나갔으면 해요. 고생을 알아주는 것은 좋지만 고생했다는 말보다는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표현하고 싶은 철학 같은 건 없다. 종이 느낌을 잘 살려서 갖고 싶게 만들고 싶다.

사실 레터프레스와 함께 그래픽 디자인을 하고 있다. 주 수입원 역시 그래픽 디자인이다. 덕분에 레터프레스 작업에 대한 고민은 덜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레터프레스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기를 원한다.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몸은 힘들어도 훨씬 행복하다고 느낀다. 나경수 씨에게 레터프레스는 일이면서 동시에 힐링 시간이다.


한복을 만들지만 천과 색 사용에는 자유롭게 생각하는 편이다. 의뢰받은 한복 치마를 만들기 위해 세탁한 리넨을 다림질 중이다. 뒤편으로 이노주단의 캐치프레이즈인 ‘한복은 COOL하다’가 눈에 띈다.

우선 한 땀, 한복 만드는 오인경 씨
3년은 지나야 재봉틀 앞에 좀 앉겠구나 하고, 10년은 해야 옷을 좀 꿰매는구나 한대요. 30년은 해야 이제 옷 좀 맘 편히 만들겠네 하고요.” 시작한 지 4년이 되었으니 재봉틀 앞에 앉은 셈이다. 판매하는 한복은 30년 이상 경력의 ‘선생님’들께 맡긴다. “제가 입는 한복은 직접 만들지만, 판매하는 옷은 완성도를 더 높일 수 있다는 것을 아니까 직접 만들지 않아요.” ‘이노주단’이란 이름을 내건 것은 2012년 2월이다. 뚱뚱하고 긴 고름 대신 얄상한 고름과 소매가 요즘 한복 같지 않다. 조선 중・후기의 한복을 바탕으로 삼았다. 옛날 한복을 공부하고 적극 수용했다. 저고리 소매의 아랫부분인 배래가 불룩한 요즘 한복이 불편해서 좁은 일자 형태인 18, 19세기 배래를 따랐다. 기본 형태 안에서 디자인하면 선생님들이 제작을 해주신다. ‘몇 세기에 어떤 형태’라고 말씀드리면 다들 알아들으신다. ‘프로’들만이 나누는 대화의 세계다. 아직도 바느질은 그에게 어려운 영역이다. 손재주의 한계가 있다고 인정한다. 바느질 솜씨를 타고난 친구들은 “바늘과 손이 붙는다”고 표현한다. “한복을 만들다 보니 한계를 알겠더군요.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않았어요.” 다행히 선생님들도 여전히 자신 없어 할 때가 있다. “컨디션이 별로면 바느질방에 들어갈 때 한 번 구르고 들어가거나, 꿈자리가 사납다고 바가지를 깨고 일을 시작하는 선생님도 계세요. 하하.” 내리막길인 한복을 직접 만들겠다고 했을 때 모두가 말렸다. 하지만 자신이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없어지고 말 것 같았다. “제가 보기에 한심스러워서 그렇지, 입을 만해요.” 너스레를 떨며 짓는 미소에 근성 같은 게 묻어난다.


공방이 위치한 연남동 골목길 풍경은 옛날 홍대 골목을 연상시킨다.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도 장인에게는 중요하다.

견디는 소리, 기타 제작자 조동진 씨
어려서 기타 한 번 튕겨보지 않은 사람 없다. 세고비아와 삼익이라는 이름이 친숙하고 콜트라는 걸출한 악기 브랜드가 한때 존재한 나라지만 여전히 개인 기타 제작은 생소하다. 앳돼 보이는 조동진 씨가 처음 공방을 열었을 때 주변의 지지를 얻기 쉽지 않았음을 짐직할 수 있다. “제자로 받아주겠다던 기타 제조 공장의 사장님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기회가 사라지나 싶었어요. 다행히 기타 제조 공방을 찾아서 독일에서 공부한 백철진 선생에게 사사했습니다.” 처음 기타를 만드는 데에는 1년이 걸렸다. 직장에 다니면서 퇴근 후에 작업을 했다. 기타 한 대를 완성했지만 머릿속에 남는 것이 없었다. 그길로 회사를 그만뒀다. 다시 1년을 배우면서는 승부를 내보기로, 그리고 3년을 굶어도 좋다는 결심을 했다. 6mm 두께의 판재를 깎아 앞・뒤판을 만들고 거기에 브레이싱이라고 하는 프레임을 붙인다. ‘소리의 지문’을 결정하는 브레이싱을 깎는 것은 자신만의 톤을 만들기 위한 작업으로, 세심함이 필요하다. 미리 만들어놓은 틀에 맞춰 옆판을 성형가공법으로 휜 다음, 앞・뒤판에 붙이면 기타가 완성된다. 지금은 기타 한 대를 완성하는 데 두 달여가 소요된다. 5~6대의 기타를 동시에 제작한다. 손재주가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꼼꼼해야 하는 작업 앞에 좌절할 때도 있다. 그래도 네크를 깎으면서 사포와 줄을 쓰는 횟수가 줄고 칼날로만 원하는 곡선을 깎아낼 수 있게 되면서 기술적으로 성장했음을 깨닫는다. “2년 지나보니 버틸 만큼의 수요는 있었어요. 죽으란 법은 없더군요. 차차 나아지겠지요.” 지금의 삶의 형태에 만족한다. 견딜 수 있는 것은 열정이 있어서다.


용접을 하기 위해 거치대에 프레임을 고정하고 있는 김두범씨. 대안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동네 수리점 역할도 하는 등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진지한 청춘이다.

두 손 달리기, 자전거 프레임 빌더 김두범 씨
페달을 밟을 때만 달릴 수 있다. 힘을 빼면 서야 한다. 자전거는 노동과 닮아 있다. 몸을 움직여야 얻을 수 있다. 김두범 씨의 일은 노동의 형태도 결과물도 같은 의미를 지녔다. “대학 때 ‘노동가치이론’ 수업에서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얘기에 판타지 같은 게 생겼어요.” 노동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고민하다 자전거에 주목했고 ‘프레임 빌더’라는 직업을 가졌다. 졸업과 함께 자전거 정비를 배우고 일본으로 가서 유명한 프레임 빌더인 ‘케루빔 바이크Cherubim Bike’의 곤노 신이치 씨의 제작과정을 견학했다. “신이치 씨에게 물었더니 미국에서 제대로 배우라고 하더군요. 만들기만 하기보다는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요.” 미국에서는 자전거를 만드는 일이 대중화되어 기술자의 영역이 아니라 취미의 영역이다. 미국 UBI(United Bicycle Institute)에서 프레임 빌더 과정을 이수하고 돌아와 공방을 열었다. 주문을 받으면 주문자의 체형이나 자전거 타는 습관 등을 고려해 프레임을 디자인한다. 삼각형 프레임 두 개를 기본 구조로 설계한 다음 용접한다. 이때의 용접은 단순 접합이 아닌 프레임 빌딩의 핵심이다. 공방을 운영한 지 2년, 아르바이트해서 월세를 내야 할 때도 있었다. 대학을 나와서 ‘자전거포’나 한다고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족들도 불에 데거나 다치면 딴 일을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걱정이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일이 즐겁고 지금의 삶이 행복하다. 그가 생각하는 ‘장인’의 덕목은 성실이다. “어려서인지 화창하고 기분 좋은 날이면 가게를 닫고 자전거 타러 뛰쳐나가기도 하거든요. 성실함이 부족한 거죠.” 그가 젊다는 증거다.


걱정하지 않고 잘 될 것으로 생각한다는 그의 목소리에 믿음이 갔다. 대학원 졸업 논문을 쓰면서 완성한 카메라가 러프스케치 위에 놓여 있다. 제대로 된 도면 없이 스케치와 부분 도면만으로 카메라를 완성하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느리게 닫는 셔터, 카메라 메이커 현광훈 씨
프레임 안에 피사체를 가두는 ‘사진 찍기’는 찰나의 행위다. 반면 카메라를 만들어가는 현광훈 씨의 작업은 지루하고 끝나지 않는다. 대학원 논문을 쓰기 위해 2년 동안 휴학하고 시계의 무브먼트를 연구해 완성해내는 식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카메라에 무브먼트를 활용하기 위해서였으니 아직 끝난 ‘게임’도 아니다. 금속공예를 전공한 현광훈 씨가 카메라를 만드는 것은 카메라가 좋아서다. 학부 시절, 교양 수업을 듣다가 전공을 살려 핀홀카메라(카메라의 원형으로 렌즈 대신에 바늘구멍으로 빛을 끌어들여 필름에 상이 맺히는 카메라)를 만든 것이 시초다. 2005년도의 일이다. 그 이후, 그는 기능적으로도 완벽하고 외형적으로도 예쁜 카메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동안 제작한 카메라들도 수공예가 지닌 미덕을 충분히 갖춘 ‘아름다운 카메라’다. 금속의 물성을 살린 카메라가 탄성을 자아낸다. 그럼에도 그는 만족하지 못한다. “시계를 공부하면서 기술이 늘었어요. 예전에는 넘을 수 없는 한계 정도로 생각한 세밀하고 정밀한 작업이 가능해졌어요. 또 작업에 필요한 도구들을 생각해내서 직접 만든 것도 기술적으로 한 단계 올라선 증거라고 할 수 있지요.”

생계를 위해 일주일에 하루는 웹 디자이너로 나선다. 큰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작업에 전념한다. 디자인과 성능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카메라를 완성한다면 그때부터는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다. 조급해하지 않는다. 현광훈 씨의 얘기를 듣다보면 “한 놈만 팬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는 충분히 싸울 준비가 돼 있다.


1 권덕근 대표는 지난 10월 1년 6개월 만에 골든 프로그의 상표권 등록을 마쳤다. 품격 있는 제품과 브랜드 가치의 상승이 곧 롱런하는 길임을 그는 잘 알고 있다.
2 가죽 표면에 목타(그리프)와 망치를 이용해 스티치를 넣고 있다.
3 프랑스 베르제 블랑샤르의 그리프와 독일산 실 등이 놓인 작업대. 
4 클램프(포니)에 가죽을 고정해 손바느질하는 권덕근 대표.


손으로 만든 품격, 가죽 다루는 권덕근 씨
태초에 가죽이 있었다. 인류 역사의 시작과 함께 가죽은 생활용품이자 생존 도구였고, 신과 왕에게 바치는 귀한 재물이었으며, 전장에서는 정복욕의 상징이었다. 현재도 가죽은 다양한 영역에서 감각 있는 소재로 귀한 대접을 받는다. 수공예 가죽 액세서리 브랜드 골든 프로그Golden Frog의 대표 권덕근 씨는 이런 가죽이라는 소재에 매료되었다.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하고 7년간 의류 사업체의 패션 디자이너로 근무했습니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 평소 취미로 하던 가죽공예를 확장했죠.” 그는 가방, 지갑, 노트 커버, 키홀더, 아이패드 케이스, 다이어리 등 다양한 제품군을 디자인부터 제작, 납품과 마케팅까지 오롯이 혼자 해낸다. 골든 프로그의 모든 가죽 원단은 이탈리아에서 직수입하며, 루이비통과 에르메스 가죽 제품에 쓰는 것과 동일한 독일산 실을 사용한다. 또한 루이비통에서 사용하는 주키Juki사의 가죽 전용 재봉틀도 일본에서 구입했다. 고급 브랜드와 비견되는 품질의 제품을 만들려 하는 그의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2010년 5월에 론칭했는데, 6개월 만에 백화점에 입점했습니다. 그만큼 제품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매순간 경제적인 고민은 뒤따라요. 하지만 운 좋게 제품을 꾸준히 찾는 고객이 있고 혼자서도 무리 없이 꾸려가기 때문에 아직까진 괜찮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품격은 완성도 있는 마감이다. 크리저로 가죽의 장식선을 그리는데, 이는 날것인 가죽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과 같다. 사선으로 봉제 구멍을 만들어 새들 스티치로 마감한다. 새들 스티치는 바늘 두 개를 서로 교차하며 꿰매는 작업으로, 격렬한 움직임에도 가죽의 흔들림이 없이 견고한 것이 특징이다. “얼마 전에 상표권 등록을 했어요. 1년 6개월이 걸렸죠. 브랜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려면 브랜드를 자기 것으로 명확하게 해야 해요. 10년이고 20년이고 계속할 거니까요.” 사업의 확장보다 제품의 완성도가 화두라고 말하는 권 대표의 목소리가 단호하다. 에르메스와 루이비통처럼 품질과 완성도에서 전 세계가 인정하는 가죽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스물아홉 살의 젊은 가구 장인 윤여범 씨는 주문자와의 미팅에 실제 가구 제작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공을 들인다. 가구의 주인이 될 사람의 만족도가 클 때 그는 가장 행복하다.

나무처럼, 가구 만드는 윤여범 씨
날 선 추위가 입김조차 멈추게 하는 겨울날에 용인의 한 가구 공방을 찾았다. 작업실의 노란 대문을 열고 인사를 건네는 이는 수제 가구 브랜드 710Furniture의 대표 윤여범 씨. 공방 회원으로 가구를 배우다 2012년 초에 브랜드를 만들었다. 블로그를 통해 주문을 받고 직접 만든 가구를 판다.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그가 나무를 다루는 것은 여자 친구의 제안 때문이다. 손으로 만드는 일을 좋아하고 혼자서 무언가에 몰두하는 성정이 목공과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매일 공방에서 가구 제작에 몰두하는 지금 만족감은 무척 크다. “시행착오가 많아야 합니다. 이론으로 배우는 것은 남의 지식에 불과해요. 완벽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해도 도면과 실제 완성품에 오차가 생기는 경우가 있지요. 부족한 것을 보완하고 노하우를 축적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도면 제작부터 납품까지 혼자 처리해야 하기에 쉽지 않지만, 제작 의뢰가 꾸준히 있어 나무에서 손을 내려놓은 적은 없다. “어떤 물건이든 친해지는 기간이 필요하잖아요. 시간이 흘러도 지겹지 않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과 공간 사이에서 영속하는 가구를 만들고 싶어요.” 윤여범 씨의 가구는 군더더기가 없다. 빈티지한 감성이 드러나면서 실용적이고 단순하다. 조용하지만 신뢰감 있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와 많이 닮았다. 애인을 다루듯 가구를 매만지는 그의 손은 흔히 떠올리는 목수의 손과 사뭇 다르다. 길고 가늘다. 욕심 부리지 않고 느릿느릿, 하지만 섬세하고 완성도 높게 가구를 만드는 것, 그것이 그가 그리는 21세기형 장인 모습이다.


경력 40년과 20년의 테일러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재킷을 만들고 있는 박준상 씨. 바늘을 입에 문 채 실을 고르는 모습이 당차다

처음 꿰매는 돌파구, 양복을 짓는 박준상 씨
최근 2-3년간 남성복 시장의 클래식 트렌드와 맞물려 ‘비스포크 하우스’에서 맞춤 슈트를 제작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반면 상대적으로 테일러에 대한 관심은 덜하지만 스물네 살의 박준상 씨는 그래서 오히려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패션 학교인 서울모드를 졸업하고 남성복을 만들고 싶었는데 일할 곳이 없었어요. 무급이라도 좋으니 남성복 브랜드에 들어가서 일해보고 싶었지요. 학교에서 테일러아카데미라는 곳을 소개해줬고, 3개월 과정을 거쳐 다시 지금의 작업실을 소개받아 왔어요.” 아카데미를 수료하는 80명 가운데 양복 상・하의를 완성하는 사람은 10% 내외다. 보통 테일러 일을 배우려면 5년 정도 걸린다. 하지만 긴 수련 과정에 비해 대가가 너무 적다. 지금 교통비 정도만 받지만 박준상 씨는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다. 슈트를 만드는 방식은 ‘선생님들’마다 차이가 있다. 기본 틀은 같다지만 서로 기술을 공유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세미나를 해도 시늉만 하고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배우는 입장에서는 아쉽지만 그것이 냉정한 기술의 세계다. 2011년 11월부터 시작해 석 달 동안 바지를 스무 벌 정도 만들고 나서 재킷을 만들기 시작했다. 4개월 정도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옷을 만들면서 흉내는 낼 수 있게 됐다. “테일러링을 계속한다면 자기만족적 측면이 가장 크겠지요. 하지만 패션 트렌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마케팅이 거의 없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돌파구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글 이은석, 신진주 기자 | 사진 김도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