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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기울여 들어보니 나승연이 말하지 않는 이유
여신이 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여신이면서 여왕이라고도 불린다 .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나승연 전 대변인 얘기다. 단 한 번의 프레젠테이션으로 모두에게 자신을 각인시킨 그가 거쳐온 길에 대해 물었다.


프레젠테이션을 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홀로 선다는 것이다. 그 순간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모든 것은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순간이다.
캐시미어와 실크가 혼방된 차콜 그레이 컬러의 롱 니트 원피스와 블랙 턱시도 재킷 , 블랙 스웨이드 소재의 스트랩힐은 모두 랄프로렌 블랙라벨.


하긴 여신은 흔하다. 얼굴 좀 되면 온통 ‘여신 등극’이다. ‘여왕’은 쉽지 않다. 여왕쯤 되려면 한 분야에서 정상에 오르거나 성과를 내야 한다. 얼굴 예쁘다고 여왕 소리를 붙여주지는 않는다. 피겨의 여왕, 골프 여왕, 그래미 여왕 같은 식이다. 잘 하는 게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승연 씨는 이른바 ‘외모 되고 능력 되는’ 경우다. 단정하면서도 눈에 띄는 외모의 그가 단상 위에 올라 유창한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동안 전 세계의 시선이 쏠렸다. 하룻밤 사이에 전국민에게 자신을 알린 나승연 씨에게는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인기’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더반의 여신’ ‘더반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1년 반이 지났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본업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내가 주목 받은 시점과 시장의 변화 시기가 맞물려서 번역이나 기사작성 같은 일을 주로 하던 회사를 본래의 설립 취지대로 돌아가기로 하고, 스피치 훈련과 컨설팅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는 일대일로 지도하거나 기업에 들어가서 소규모로 코칭을 한다. 영어 인터뷰도 많아지고, 자신들의 실력을 검증받고 업그레이드 해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회사 차원에서 투자해서 전문 인력을 키우는 등 예 전과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포털사이트에서 이름을 검색하면 ‘더반의 여신’이자 ‘더반의 여왕’으로 검색된다. ‘그날’ 이후 일상으로 돌아오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여왕에 즉위한 것 빼고 바뀐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평창’을 통해 시야가 넓어졌다. 그 전까지는 내 가족이나 친구들만 챙겼는데, 뜻하지 않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다 보니 내 주변 이외의 것들을 챙기게 됐다. 또 여러 나라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분야에 대해 배우면서 ‘일에 대한 열정’과 애국심도 생겼다. 무엇보다 이전 에는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후배’들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된다.

‘선후배’는 굉장히 한국적인 개념이다. 처음에는 좀 웃겼다. 내가 롤모델이라니. TV에서 한두 번 본 것뿐일 텐데 나 를 어떻게 안다고 롤모델로 삼는다는 말인가. 강연이나 인터뷰 요청이 와도 할 얘기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청 소년들이나 학교 후배들에게 강연을 하게 되면서 오히려 내가 새로운 에너지를 받고 생각이 바뀌었다.

일반인의 인생에서 그처럼 주목받기도 쉽지 않다. 처음에는 ‘이게 나의 ‘피크’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 앞으로 몇십 년을 더 살아야 하는데, 그때가 인생의 정점이라면 뭔가 억울하고 악몽 같았다. 그런데 함께 일하던 테렌스 번스(프 레젠테이션 전문가)가 그러더라. 우울해지는 게 당연하다고. 한순간을 향해 달려오다가 끝이 난 데다 기막히게 잘 했으니까. 큰일이 끝난 데서 오는 우울함과 함께 갑자기 주목받았지만, 이것도 끝이겠구나 하는 생각에 우울했다. 지금은 편안해졌하다.

영어 하나 잘해서 주목받았다는 비아냥도 있었다. 결국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잘 안 됐으면 그만큼 주목받기 어려웠을 거다. 내가 프레젠테이션의 처음과 마무리를 해서 더 주목받았을 텐데, 그건 테렌스 번스의 의도였다.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해외에서 자란 그는 고등학교 때 한국으로 돌아와 여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한국은행 비서실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아리랑 TV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하다가 M&A부티크, 기업 인 수 합병 회사에서 IR 분야의 일을 하기도 했다. 이후 친구들과 영어 프레젠테이션 컨설팅 회사인 ‘오라티오ORATIO’를 설립한 것이 2004년의 일이다.
당시만 해도 영어 사용에 대한 인식은 낮았다. 기업에서의 수요도 없었고, 동료와 함께 세 사람이 먹고살 만큼의 일거리가 없었다. 그나마 기자 출신이던 이력을 살려 기사 번역이나 쓰기 등 영어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했다. 클라이언트가 늘어가기 시작할 즈음, 평창올림픽 유치위원회에 참여했다.


(왼쪽) 그가 직장을 옮길 때마다의 기준은 내가 배울거리가 있는가였다. 부모님이 원하는 직장을 그만둔 것도, 높은 연봉의 M&A 부티크 일을 그만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유일한 기준은 돌고 돌아서 지금의 자리를 찾도록 이끌었다.
숄카라로 된 양가죽 버클장식이 달린 캐시미어 회색 니트 원피스는 랄프 로렌 블랙라벨.
(오른쪽) 더 말하고 더 이해시키기 위해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소통은 잘 들어주는 것이다.
핀턱 잡힌 실크 블라우스와 울 소재의 회색 차이나칼라 재킷, 블랙 스웨이드 소재의 스트랩힐은 모두 랄프 로렌 블랙라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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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이 짧은 기간 자주 바뀌었다. 이유가 있었나? 한국은행에 들어간 것은 교수님 추천으로 지원한 것이었는데, 부모님께서 정말 기뻐하셨다. 처음으로 효도 좀 해보려고 했지만 1년도 못 채우고 그만뒀다. 내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리랑 TV에서는 배울 것도 많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좋았지만 기자란 직업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뒀다. 인터뷰는 수다 떠는 것 같아서 좋아했지만, 문제의식을 갖고 집요하게 파고들어 취재하고 기사를 발굴해내는 그런 독한 구석은 없었다. 오히려 MC를 보는 쪽이 잘 맞았다. 기자보다는 다른 쪽으로 소통하는 것이 낫겠더라. 그래서 친구들과 지금의 회사를 시작했다.

이제는 ‘더반의 여신’에 이어 나승연이라고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왕따’가 뜬다. 어릴 때 겪은 어려움은 무엇이었나?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잠시 다닐 때 외국에서 살던 얘기를 하면 친구들이 ‘잘난 척한다’고 싫어했다. 어린애들끼리 하는 철없는 얘기였는데도 그때는 상처가 됐다. 왕따를 처음 겪은 것은 영국에 갔을 때다. 그전까지는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학생들이 함께하는 국제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겪지 않은 일이다. 외모는 동양인인데 미국식 영어를 쓰다 보니 “말하는 게 우습다”라던가 ‘양키’라고 놀림을 받았다. 그 얘기들에 위축되어 학교와 집 외에는 6개월간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 경험 때문에 10대와 20대에 방황한 것인가? 워낙 어려서부터 외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우리말도 서툴러서 한국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왠지 나를 평가하고 판단(나승연 씨는 ‘저지먼트Judgement’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단어는 판사가 내리는 판결을 의미하기도 한다)하거나, 질책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오히려 외국인 친구들은 나를 편안하게 받아들여줬다. 밤늦게 귀가하고 많이 혼나다가 고2때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부모님이 얘기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너는 지금이라도 한국 사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그 이유과 함께 그곳에서 나를 대학에 보낼 만큼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당시 오빠는 미국에서, 언니는 캐나다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둘 다 공부를 잘하고 모범생에 오빠는 2대 독자였기 때문에 부모님은 언니와 오빠를 챙기느라 내가 힘들어하는지도 잘 모르셨다고 한다. 그런 점이 많이 섭섭해서 집보다는 친구들이 있는 바깥으로 나돌았다.

친구들과는 어떤 점이 그렇게 통했나? 부모님이 보수적이어서 ‘이중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집에 와서는 굉장히 한국적으로 행동해야 했지만, 밖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다가는 왕따가 되거나 친구를 사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내 상황을 알고 이해해주는 것은 같은 처지의 외교관 자녀 친구들이었다.

외교관의 자녀라면 보통의 경우보다 더 나은 환경이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아버지 직업 때문에 한국과 외국을 오가야 했다. 2~3년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게 힘들었고 그만큼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빨리 친해지고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들었다. 원래 내성적이어서 내 얘기를 하기보다 외향적인 친구들과 만나 그 친구들 얘기를 들어주면서 또래에 동화되려고 애썼다. 그게 어떻게 보면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우는 데도 적응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나중에 보니, 지금 하는 일과 관련해 소통을 잘하려면 잘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깨달은 듯하다. 남의 말을 잘 듣는 습관이 그때 생겼다.

긍정적인 성격인가 아니면 힘들던 때를 잊어버린 것인가? 크면서 당연히 겪어야 하는 줄 알았다. 그 정도로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꿈도 못 꿨다. 오히려 고등학교 2학년 때 한국에 돌아오고부터 더 힘들었다. 한국에서 적응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우리나라니까 모두가 반겨주고 정말 편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우리말이 서투르다고 혼나고 학교에서는 선배를 보고 깍듯하게 인사 안 한다고 혼났다. 또 대학에 가기 위해 하루에 20시간씩 공부해야 했던 2년의 시간은 지옥 같았다. 한국 아이들은 어찌나 공부를 잘하고 똑똑하던지. 캐나다에서는 수학 좀 하는 편이어서 경영학과에 들어가려고 했더니만 부모님이 말리셨다. “네 수준으로는 안된다.” 그래서 불문학과에 들어간 것이다. 그 시기는 기억에서 많이 지워졌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처음에는 과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다가 2학년 때 서클 활동을 하면서부터 나아졌다.

어떤 동아리였나? 영어 동아리로 대학연합서클이었다. 여대에 다녔으니까 자연스럽게 다른 학교 남학생들을 만나고 놀려는 단순한 생각에 가입했다. 그런데 거기서 처음으로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해보고 배웠다. 스피치 콘테스트에서 1등도 하면서 프레젠테이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평창동계 올림픽 유치위원회에서 1년 반 정도 일했다.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가. 1970-1980년대에 외국에서는 아무도 한국을 몰랐다. 중국인 아니면 일본인으로 생각한다거나 안다고 해도 남한과 북한 정도였다. 그게 왠지 서러웠다. 그런데 지금 미국에서 자라거나 유학중인 어린 친구들이 내가 그 나이에 느낀 것들을 똑같이 느끼고 있더라. 외국인들은 여전히 한국을 못사는 나라, 재미없는 나라, 북한과 트러블이 있는 나라 정도로만 기억한다. 아리랑 TV 시절의 동료들 모두 비슷한 경험을 했을 정도다. 평창 일을 하면서도 많이 놀랐다. 그래서 바른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목소리를 키우는 데 기여하고 싶다.

관련하여 계획하거나 구체적으로 진행 중인 일이 있는가? 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많이 생겼다. 1년 반 동안 배운 것들과 거기서 쌓인 인맥을 그냥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다. 그래서 내가 가진 커뮤니케이션 백그라운드를 이용해 국제 스포츠 언론인을 키우고 싶다. 국제 스포츠 행사나 올림픽에 그때마다 각 나라에서 파견하는 기자가 있는데 그런 기자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것이다. 영어와 자국어로 국제 스포츠 기사도 만들지만, 우리 나라 내의 스포츠 기사도 해외로 보도할 수 있는 사람을 키우고 싶다. 친분 있는 외국 기자와 구체적으로 진행하다가 잠시 중단한 상태다.

나승연 씨 인생의 키워드는 ‘소통’이 아닐까 한다. 소통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추상적으로 들리겠지만 서로 마음과 마음을 열었을 때 어떤 편견이나 판단(저지먼트) 없이 있는 그대로 상대의 의견과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내 자신의 감정이나 마음과도 같은 프로세스로 이뤄진다. 다들 외롭다고는 하면서 다른 사람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스마트폰만 내려다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려서는 이해해주지 않던 부모님과 소통하고 있나. 의식하고 노력하다 보니 많이 좋아졌다. 예전에는 남편과 다투고 일주일 동안 말 한마디 안 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고부터는 그런 일들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다.

엄마로서의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자신을 어떤 엄마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어떤 엄마가 되길 원하는가? 남편의 직장 일 때문에 독일에서 3년 정도 살았는데, 그때 처음 아이와 하루 종일 함께 있었다. 스물다섯에 이른 결혼을 해서 결혼 8년 만에 얻은 아이기 때문에 행복하고 즐거울 줄 알았는데 정말 힘들었다. 그때 ‘나는 전업주부는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죄책감도 들고 몸도 힘들겠지만 내 일을 하기로 했다. 엄마가 행복해야 가정도 아이도 행복할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확실히 나승연 씨는 우리말이 서투르다. ‘편입견’이라고 말했다가 ‘편견’이라고 다시 고치는 식이다. 만 네 살 때 한국을 떠나 초등학교 3학년 때 1년 반, 다시 나갔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돌아왔으니 한국 사람이라고 하기에도 미안할 정도다. 스스로를 한국에 끼워 맞추지 않았어도 될 법한데 ‘지옥 같은’ 시간들을 견디면서, ‘수학 좀 하는 동네 언니’의 명함도 내밀어 보지 못하고 불문과에 진학한 것이다.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는 막내딸이었다고 얘기하지만, 가만 들어보면 고분고분 부모 말 잘 듣는 딸 같다. 한국 들어가란다고 가고 전공도 부모님이 골라주고. 똑똑해 보이지만 얄밉게 똑 부러지지는 않는다. 이를 드러내고 크게 웃을 때는 무방비 상태처럼 느껴진다.

왕따라서 친구가 없었지만 ‘폰팅 서비스’로 친구를 만들고 브릿팝에 빠져서 라디오 DJ를 꿈꿨다가 교민방송 라디오DJ 한 번 해보고 좌절한 철없는 여고생 시절을 얘기할 때는 어딘가 어설프다. 한국에 와서도 “미모가 안 돼서” 아나운서는 포기했지만, “목소리 예쁘다는 칭찬은 많이 들었다”고 자랑하는 지점에서는 ‘여왕’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개그 본능’마저 엿보인다. 하지만 여섯 살짜리 아들과의 ‘소통’이 제일 힘들다는 그가, 대한민국에서 자란 것도 아닌 그가 ‘우리나라’를 말할 때는 뭔가 뭉근한 어떤 것이 깔려 있었다.


스타일링 정소정 헤어  노영민(마끼에) 메이크업 최다영(마끼에) 

글 이은석 기자 | 사진 전재호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