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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좋은 날, 서촌 마실 갈까?
삼청동과 가회동으로 대변되는 북촌이 너무 번잡스럽고 상업적이라면, 서촌은 여전히 사람 냄새 나는 살가운 풍경을 보듬고 있습니다. ‘금천교의 아들’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릴 정도로 서촌의 매력에 담뿍 빠진 여행 작가 노중훈 씨가 순전히 ‘동네 주민’의 시선으로 찾은 알토란 같은 상점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얼마 전부터 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주로 음식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방송을 통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얻은 별명이 ‘금천교의 아들’이다. 여기서 금천교는 금천교시장을 의미한다. 시장의 맛있는 집들을 여러 차례 언급하다 보니 자연스레 붙은 수식어다.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금천교시장을 찾는다. 밥도 먹고 술도 마신다. 작업실이 코앞인 데다 시장이 제공하는 다채로운 맛의 유혹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전통 시장 특유의 정겨운 분위기도 한몫한다. 금천교시장은 체부동과 붙어 있는데, 체부동은 또 필운동ㆍ누하동 등과 이웃한다. 처음에는 시장에만 출입하다 언젠가부터 이웃 동네까지 관심을 갖게 됐다. 좀처럼 보기 힘든 ‘낡은 서울’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물론, 골목골목 흥미로운 상점이 자리를 틀고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서촌은 말 그대로 경복궁의 서쪽 마을을 뜻한다. 조선시대 북촌에는 지체 높은 양반들이 주로 기거한 반면, 서촌에는 오늘날로 치면 전문직 종사자인 중인들이 모여 살던 곳. 근대에는 이중섭, 윤동주, 이상 등의 예인들이 서촌의 주민이었다. 아스라한 옛 풍경과 새침하지 않은 새것이 조화를 이루는 서촌 나들이는 금천교시장에서 시작한다.

맛의 보고와 오래된 골목, 금천교시장&체부동

1 종로구 필운동을 시작으로 체부동, 누하동, 누상동, 옥인동으로 이어지는 서촌 나들이 코스. 반나절이면 동네 한 바퀴를 천천히 돌 수 있는데, 자그마한 상점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경복궁역에 내리자마자 만나는 금천교시장, 통인 시장 등 정감이 가는 장 구경도 놓치지 말 것!
2 금천교시장 옆 작은 골목길을 따라 성결교회 쪽으로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카페 어슬링스. 젊은 사장 서정욱 씨는 여행이 좋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자 카페를 차렸다.
3, 4 소박한 꽃 화분과 아궁이, 빨랫줄 등 체부동 골목길에는 아직도 옛 정취가 남아 있다.
5 시장 골목을 지나다 보면 김이 폴폴,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서촌계단집의 꽃게찜을 만날 수 있다.
6, 8 손글씨로 쓴 메뉴판과 인테리어에서 맛집의 포스가 느껴지는 효자동 소금구이.
7 금천교시장의 명물, 원조 기름떡볶이.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오면 앞쪽에 유명한 빵집 체인점이 보인다. 여기서 왼쪽 골목으로 접어들면 바로 금천교시장이다. 입구 부근에 기름 떡볶이를 파는 할머니가 있다. 주문을 하면 무쇠 철판에 불을 붙이고 국물 없는 떡볶이를 이리저리 뒤적거린다. 간장과 고춧가루로 양념하는 기름떡볶이는 고소하고 짭짤한 맛이 난다. 맛도 맛이지만 아흔을 훌쩍 넘긴, 1백세에 가까운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즐겁다. 떡볶이를 팔아 여투어둔 3천2백 만 원을 기부한 할머니는 날개 없는 천사다. 그래서 가끔, 딱히 먹을 일도 없건만 할머니의 남은 떡볶이를 떨이로 사곤 한다. 잡곡 상회, 기름집, 철물점, 과일 가게 등 아련한 느낌의 상점들이 지금도 건재하지만 금천교시장에는 역시 식당과 술집이 가장 많다. 시장은 바다와 육지를 넘나드는 맛의 진경을 보여준다. 서촌계단집(02-737-8412)은 신안 병어, 여수 왕소라, 진도 갑오징어, 서천 간재미 등 철마다 다른 해산물을 손님상에 올리는 집이다. 양푼에 넉넉히 담아내는 칼칼한 홍합탕은 기본이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대신 “사장님, 오늘은 뭐가 좋아요?”라고 물으면 이 집 단골임이 틀림없다. 효자동소금구이(02-732-9288)는 기름때가 묻어 있는 메뉴판과 나무 기둥부터가 맛집의 ‘포스’를 확확 풍긴다. 두툼한 목살이 특히 좋은데, 국수를 별도로 주문해서 무생채와 함께 먹으면 별미 중 별미다. 시장 골목 중간쯤에 위치한 심산애(02-734-1112)에서는 더덕 막걸리를 꼭 맛보아야 한다. 주문하면 즉석에서 더덕을 갈아 막걸리에 섞어주는데, 향이 그렇게 진할 수가 없다. 출연한 방송에서 “전국의 모든 더덕 막걸리들은 이 집에 와서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다.
시장은 체부동과 골목으로 연결된다. 건축가 조정구 선생에 따르면 체부동 골목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골목이다. 골목을 이루는 길이 오래돼야 하고, 건물이 들어선 땅의 모양이 가급적 변하지 않아야 하며, 골목에 모여 있는 집들이 대부분 한옥이어야 하는, 이른바 오래된 골목의 세 가지 조건을 전부 만족시킨다는 것이다. 어쨌든 서울 시내에서 체부동처럼 오래된 골목이 동네 전체에 걸쳐 있는 곳은 확실히 드물다.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는 체부동 골목을 소요하다 보면 90년이 넘었다는 성결교회와 지금은 게스트하우스로 변모한 옛 유성여관 건물도 마주한다. 체부동 골목 투어를 마치고 잠시 다리쉬임을 하고 싶다면 카페 어슬링스(02-720-3716)가 제격이다. 조붓한 카페 내부는 각종 여행 서적과 지도,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 빼곡해 ‘휴가’를 추억하게 한다.

오래된 책방에서 빈티지 숍까지, 누하동

1, 2 군데군데 찢긴 간판과 철 지난 미닫이문이 세월의 무게를 짐작케 하는 누하동의 명물 대오서점.
3, 4 추억의 물건이 가득한 빈티지공방. 매장 한쪽에는 작업실도 있는데 직접 만든 가방, 인형, 파우치 등을 판매한다.
5, 6 손맛 나는 액세서리, 인형 등을 만날 수 있는 핸드메이드 숍 서촌33.
7, 8 앤티크 숍 티쉬운트는1930년대부터 1970년대산까지 다양한 독일 조명등을 만날 수 있다.
9, 10 자그마한 한옥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맥주를 파는 맥줏집 퍼브.


체부동은 말할 것도 없고 인접한 동네인 필운동, 누하동, 옥인동에서도 걷는 속도를 늦춰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듯 마을 곳곳에 살포시 숨어 있는 작은 상점들을 무심코 지나칠 수 있기 때문이다. 누하동에서 제일 애틋한 곳을 꼽으라면 아마 대오서점(02-735-1349)일 것이다. 한국전쟁 직후 생겨났으니 환갑을 넘긴 고서점이다. 2평 남짓한 서점에는 빛바랜 책들이 가득하지만 실제로 책을 사러 오는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 한다. 대오서점은 이제 책방으로서 기능을 한다기보다 ‘추억의 지킴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서점 주인인 권오남 할머니도 “중고 책 찾는 사람보다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말한다.
몇 달 전 처음 뵈었을 때 집 마당에서 미끄러진 할머니는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계셨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입이 궁금하실까 싶어 통인시장에서 산 기름떡볶이를 쥐여드리고 나왔다. 대오서점 바로 옆집은 바느질 솜씨가 빼어난 변유정 씨가 운영하는 핸드메이드 숍 서촌33(010-3129-5893)이다. 번지수를 그냥 상호로 차용했다. 그의 손재주가 발휘된 가방을 필두로 지갑, 스카프, 인형, 패션 액세서리 등을 판매한다. 소수 인원을 상대로 바느질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촬영을 마치고 나가려는데 변유정 씨가 소개해줄 곳이 있다며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그가 너나들이로 지내는 박은희 씨의 빈티지공방(02-725-2532)에는 추억의 물건들이 가득했다. 온갖 종류의 인형과 장난감을 비롯해 그가 중학교 시절부터 사 모았다는 소품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지금도 인사동을 헤집고 다니기 일쑤며, 해외여행을 할 때도 빈티지 숍을 꼭 방문한다. 한쪽에는 박은희 씨의 작업실이 마련돼 있는데 그는 이곳에서 가방, 스카프, 인형, 파우치 등을 직접 만든다. 열 평 남짓한 자그마한 한옥을 개조한 누하동의 맥줏집 pubb(02-730-0240)는 미니멀한 내부 인테리어와 은근한 조명이 인상적이다. 맥주 안주로는 역시 스파이시 감자칩과 맥주 반죽을 입힌 양파튀김이 제격이다. 대오서점 맞은편에는 김정은 씨가 석 달 전쯤 문을 연 티쉬운트(02-720-0109)가 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오서점은 누하동, 티쉬운트는 통인동에 속해 있다. 티쉬운트는 앤티크 숍으로, 주로 독일에서 들여온 조명 기구ㆍ선풍기ㆍ커피잔ㆍ커피 그라인더 등이 상점을 채우고 있다. “앤티크는 세월의 가치를 공유하는 일”이라는 그녀의 말마따나 이곳의 물건들은 꽤나 나이가 들었다. 배화여고를 졸업해 동네 분위기에 익숙한 그녀에게 서촌의 매력을 물었더니 “주민들 사이에 옛것과 획일적이지 않은 것을 지켜내려는 노력에 대한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된 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수성계곡 가는 길에 발견한 옥인동의 명소

1 옥인상점 by 서촌공작소에서는 가방, 엽서, 액자 등 쿼터블의 디자인 상품을 만날 수 있다.
2, 3 삼청동에서 누하동으로 이전한 피겨, 빈티지 숍 동양백화점. 자카 소품을 만날 수 있다.
4, 8 손바닥만 한 규모지만 2층 다락방도 있어 동네 아지트로 입소문 난 카페 YM.
5, 6 가장 최근에 생긴 따끈따끈한 숍. 장장 두 달간 직접 꾸민 핸드메이드 부엌 인테리어가 궁금하다면 들러보자.
7, 9 수많은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는 심야 식당 누하우동초밥. 비틀스가 우동을 먹고 있는 일러스트가 재미있다.


필운대로에서 옥인길로 접어들면 초입에 누하우동초밥(02-720-9978)이 모습을 드러낸다. 네 개의 테이블과 바에 놓인 네 개의 의자가 고작인 자그마한 일식집이다. 간판도 따로 없지만 단골들 사이에서는 ‘심야 식당’으로 불릴 만큼 호응이 높다. 비틀스가 우동을 먹는 독특한 그림이 걸려 있다. 우동 맛도 나쁘지 않지만 일정 시간 냉장한 뒤 내놓는 선어회의 맛이 준수하다. 누하 우동초밥 가까이에 동양백화점(02-732-2001)이 있다. 지난여름 삼청동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한, 꽤 이름이 알려진 소품점이다. 가장 눈에 띄는 아이템은 이곳 주인인 강만규 씨의 취향이 반영된 철인 28호와 아톰 피겨. 이 밖에도 일본의 벼룩시장에서 직접 구입한 빈티지한 물건들이 진열돼 있다.
옥인길에는 최근 들어 독특한 콘셉트의 소규모 카페와 레스토랑이 부쩍 많이 생겼다. 8월 31일에 문을 연 BARCELONA(02-735-1117)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우선 테이블 세 개가 놓인 내부는 아담하면서도 정갈하다. 주인장이 직접 디자인한 수납장이 눈길을 끄는데, 그 앞에도 두 개의 의자가 마련돼 있다. 마늘 향이 감도는 올리브오일에 새우를 볶아내는 감바스가 추천 메뉴. 카페 YM(02-395-6722)은 옥인동 카페의 원조 격에 해당하는 곳이다. ‘훈남’ 주인장과 여자 친구의 이름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이니셜 Y와 M을 상호로 정했다. 손바닥만 한 카페 내부가 아늑한 정취를 자아낸다. 옥인상점 by 서촌공작소(02-737-4788)는 ‘쿼터블’이라는 미국의 디자인 기프트 브랜드를 독점으로 선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촌에 대한 정보를 자유롭게 나누고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란 점이 흥미롭다. 이곳 대표 설재우 씨는 동네 소식지인 <서촌 라이프>를 발행, ‘서촌 이야기꾼’으로 통한다. 걷기 좋은 날 체부동과 누하동, 그리고 옥인동 일대로 골목 산책을 떠나보자. 딱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일러스트 최익견

글과 사진 노중훈(여행 칼럼니스트) | 담당 이지현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