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에 계절별로 이 의상만 스무 벌이 있어요!” 그가 한복에서 착안해 직접 디자인한 바지와 검정 셔츠는 15년 전부터 입어온 그만의 의상이다. 이제 옷은 그의 아이콘이 되었다.
태초에 디자인이 있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순환했다. 자연은 새것을 만들면서도 언제나 헌것을 재활용한다. 올봄에 핀 봄꽃도 수년 전 떨어진 나뭇잎을 재활용한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의 발그레한 볼도 앞선 생명의 낡은 몸을 재활 용한 것이다. 우리가 숨 쉬는 대기도 수많은 나무의 기공氣孔과 동물의 허파를 드나들던 것이다. 시공은 변해도 세 상은 태초의 재료에서 한 줌도 더하거나 덜지 않았다. 꽃은 남김없이 거름이 되고, 거름은 어김없이 꽃이 되는 자연은 오래도록 ‘스스로 그러하고, 지속하는 디자인’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디자인의 홍수 속에 살아간다. 패션 디자인, 그 래픽 디자인, 인테리어 디자인, 북 디자인, 건축 디자인, 무대 디자인…. 현대인은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지 않은 물건 과 접촉하지 않고서는 일상을 영위할 수 없다. 거부할 수 없는 혜택을 입으면서도 ‘디자인’의 어감이 마냥 유쾌하지 만은 않은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필요’보다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디자인에 제동을 걸고 디자인을 나눔의 영역으로 이끄는 한 디자이너가 있다.
배상민(40세), 카이스트KAIST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27세에 동양인 최초로 세계 3대 패션 스쿨 중 하나인 뉴욕 파슨스 디자인 스쿨 교수 역임. 코닥의 디지털카메라, 3M의 포스트잇 패키징 등 제품 디자인과 코카콜라, 샤넬 등 기업 로고 디자인을 해온 사람. 뉴욕의 일류 디자이너로 영예를 누리던 그가 이곳으로온 까닭은 무엇일까? 산업디자인학과 건물 내 ‘사회 공헌 디자인 연구소’의 문을 두드렸다.
디자인,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
배 교수는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낚시 이야기부터 꺼낸다.
“요즘 학교 앞 갑천에서 낚시하면 눈불개가 올라와요.”
눈불개는 금강에만 사는 눈이 붉은 물고기란다. 미늘 없는 낚시로 잡자마자 풀어준단다. 손맛도 좋지만 수서 곤충과 민물고기 등 수중 생태를 관찰하면서 자연 속에 숨어 있는 디자인 아이디어를 얻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훤칠한 키에 커다란 눈이 시원하다. 인터뷰 내내 쾌활한 목소리가 음악처럼 흘러나온다. 호기심과 신명이 저이를 움직이는 동력처럼 보인다.
“‘디자인이란 문제를 잘 찾아내고,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디자인에 문외한인 제게 그건 과학과 기술의 영역처럼 보입니다만….”
“디자인에 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디자인을 미적 요소로만 보는 겁니다. 좋은 디자인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상징성, 기능성, 심미성이지요. 이 세 가지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단순히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려면 남다른 관찰력이 필요하겠군요.”
“맞아요. 저는 어떤 공간에 가든 ‘이건 불편한데 왜 그대로 두고 있지? 나라면 어떻게 해결할까?’ 궁리하고, 가게에 들어가면 ‘내가 디스플레이를 한다면?’ 하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널려 있는 게 디자인 소재입니다. 누구라도 디자인 마인드를 지니면 자기 문제를 혁신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달인’이지요. 청소하는 분들도 문제를 발견하고 그걸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내면 남보다 더 깨끗하고, 아름답고, 빠르게 끝낼 수 있는 생활 속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죠.”
크로스큐브Cross Cube 접어 쓸 수 있는 MP3 플레이어로 나눔 프로젝트의 두 번째 상품이다. 십자가 형태의 플레이어를 접으면 큐브 모양의 플레이어가 된다. 십자가는 이웃을 사랑하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어린이를 돕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 2007년 당시 동상을 받은 애플 아이팟을 제치고 미국 IDEA 은상을 차지했다.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가을 매가 하늘을 치솟아오를 기상을 품고서 천지를 자그마하게 보고 우주도 가볍게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한다.” 그는 작업 노트 첫 장에 다산 정약용의 문장을 적어두었다. 그가 생각하는 삶의 방향이자 좌우명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디자이너이던 정약용은 그의 롤모델이다.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
“좋은 디자인과 나쁜 디자인이 있나요?”
“모든 디자인은 남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디자인은 없습니다. 주부를 위한 것, 청소년을 위한 것 등 디자이너는 늘 대상을 염두에 둡니다. 남을 더 편하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게 디자이너의 역할이지요.”
그는 필요(needs)와 욕망(desire)에 대해 말한다.
“필요는 생존을 위한 겁니다. 배가 고프니까 밥을 먹지만 배부르면 더는 못 먹습니다.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지금 대개의 디자이너는 상위 10%의 ‘욕망’을 부추기는 디자인을 합니다. ‘좋은 디자인 은 영원하다’는 말이 있지만 그렇게 디자인하면 기업이 망합니다. 나머지 90%의 ‘필요’는 구매력이 없다는 이유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요. 삶에서 문제를 찾아내고 그걸 해결하는 게 디자인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을까요?”
“디자인의 정의를 통해 윤리 문제와 다시 만나는 게 흥미롭군요. 남부러운 위치에 올라간 상업적 디자이너였는데 어떻게 이런 각성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저도 상업적 성공이 기뻤습니다. 뉴욕의 유명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에 가면 제 작품이 진열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점점 기쁘지 않았습니다. 6개월만 지나면 그것들은 ‘아름다운 쓰레기’가 될 테니까요. 이걸 계속하는 게 의미 있는 일인가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어느 시인의 시처럼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삶이 관성이 되면 본질을 까먹는다. 끊임없이 자신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지 않으면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고,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반성적 성찰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많은 사람은 ‘어떻게(how to)’에 대해 생각하지만 저는 늘 ‘왜(why)’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어떻게 하면 이걸 잘하지?’보다 ‘왜 이걸 하지?’ 하고 묻습니다. 우리 연구소 이름인 ‘ID+IM’은 ‘I DESIGN, therefore I AM(나는 디자인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약자입니다. 내가 디자인하는 이유이지요.”
“대개 ‘어떻게’에서 ‘왜’로 빠져나오기가 힘들지요. 전자가 몰입이라면 후자는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어떻게’가 현미경이라면 ‘왜’는 천체 망원경이 아닐까요?”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저는 곧잘 ‘유체 이탈’을 하는 것 같아요. 몰입하지만 그런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자아가 있습니다.”
하티Heartea 2009년에 개발한 텀블러로 나눔 프로젝트의 네 번째 상품이다. 마음(heart)과 차(tea)의 합성어로 따스한 마음을 전하는 텀블러라는 의미가 있다. 심장을 상징하는 돌기 부분의 불빛이 음료의 온도를 표시해 마시기 적절한 시기를 알려주는 것이 포인트.
마흔한 개의 디자인 상을 받다
지독한 상업주의 디자인에 몰두하는 자신을 바라본 그는 과감히 진로를 수정했다. 2005년 14년간의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많은 국내 명문대에서 손짓했지만 그이가 카이스트를 선택한 것은 이곳이 상업적 디자인 말고 가치 있는 디자인을 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카이스트는 교수가 하고 싶은 걸 간섭받지 않고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뉴욕에서 아주 우뇌적 아티스트들과 살다가 이곳의 좌뇌적 사람들과 사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하나의 도전이었단다.
카이스트에 자리 잡은 그는 사회 공헌 디자인(Philanthropy Design) 연구소를 만들었다. ‘나눔 디자인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운 상품을 기획하고 디자인한 다음, 수익금 전액을 저소득층 어린이들의 장학금으로 사용하고 있다. KAIST, ID+IM 디자인 랩, 월드비전과 GS칼텍스 등 학교ㆍ연구소 구호단체와 기업 등이 협력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로 지금까지 모두 1백53명의 학생에게 도움을 주었단다. 일회적인 지원이 아니라 변호사, 교수, 과학자 등 사회 지도층과의 멘토링을 통해 그들의 꿈에 구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자칫 아름다운 구두선에 그칠 수 있는 나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바탕에는 연구소의 놀라운 성과가 있다. 그동안 ‘나눔 디자인 프로젝트’의 디자인 제품들은 세계 4대 디자인 대회에 출품해 무려 마흔한 개의 상을 받았다.
“‘착한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전파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호응이 있는지요?”
“웰빙, 힐링이라는 말처럼 ‘착한 디자인’이라는 말도 하나의 붐이 되고 있어요. 기존 디자이너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나눔 디자인 프로젝트와 함께 추진하는 또 하나의 사업은 ‘시드 프로젝트Seed Project’이다. 개발도상국 주민이 자신의 지역에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최근에는 케냐의 마사이 부족에게 집을 지어주기 위해서 고민하고 있다.
“그 사람들이 짓는 흙집이 쉬 무너져 사람들이 깔려 죽습니다. 물, 전기 등의 문제도 해결해야 합니다.” 작년에는 그곳에 가서 석 달 동안 부족원으로 살았단다. 1백5세가 된 추장은 그이를 막내아들로 삼고 ‘올로 세리언’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평화의 남자’라는 뜻이다.
“시드 프로젝트는 언제 끝납니까?”
“평생 할 겁니다. 마사이 부족의 집 짓기가 끝나면 또 다른 부족을 찾아갈 겁니다. 그 사람들 문화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도울 겁니다. 내가 그들을 돕고 난 다음에도 다른 사람이 가면 내가 처음 갔을 때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2008년 개발한 비전기식 친환경 가습기 ‘러브팟’과 카메라 앞에 선 배상민 교수. 펠트 52장이 촘촘하게 배열된 티슈볼은 자연 가습 방식을 적용해 전기가 필요 없어 언제 어디서나 쉽게 사용할 수 있다.
디자인은 나눔이다 “장기적인 꿈이 있다면?” “전 세계에서 사회 공헌 디자인을 가장 잘하는 연구소를 만들고 싶어요. 사회 공헌을 실천하면서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기록으로 남길 겁니다. 다음 사람이 똑같은 일을 할 때 실수하지 않도록 말이죠. 저는 우리나라가 외환 위기로 어려움을 겪을 때 외국에 나가서 공부했어요.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 훨씬 부자인 선진국에 돈을 주면서 공부했지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것을 헛되이 하지 말자는 생각을 했어요. 세계 곳곳에서 학생들이 와서 공부하는 그런 연구소로 만들고 싶습니다.”
벌써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단다. 저이가 추구하는 ‘착한 디자인’에 공감한 학생들이 호주, 터키, 중국과 미국에서 유학을 오고 있단다. 디자이너로서 성공과 영달에 머물지 않고 사회 공헌 디자이너로 변신한 저이의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한마디로 디자인이란 무엇입니까?” “디자인은 나눔입니다(Design is sharing!).”
21세기 ‘평화의 남자’가 드리우는 미늘 없는 낚싯대가 건져 올릴 새로운 세계가 적이 궁금하다. 태초에 디자인이 있었다. 언제까지나 꽃은 남김없이 거름이 되고, 거름은 어김없이 꽃이되길. 꽃과 거름 사이를 인간이 거닐 수 있기를!
- [귀 기울여 들어보니]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배상민 교수 남을 위한 디자인이 아름답다
-
‘잘나가는’ 뉴욕 디자이너의 삶을 버리고 한국에 와서 사회 공헌 디자인을 하는 남자가 있다. 사회 공헌 디자인 연구소 ‘ID+IM’을 이끄는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배상민 교수. 그의 머릿속에는 늘 “왜?”라는 질문이 따라다닌다. “왜 이것을 디자인할까?” 하는 질문은 그가 작업하는 모든 디자인의 화두다. 심미적 욕망보다 필요에 의한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그의 남다른 디자인 철학, 남을 위한 디자인으로 더 가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은 그의 인생론. 단풍잎이 곱게 떨어지는 어느 날 카이스트 교정에서 만난 그는 긍정적 기운과 호방한 웃음소리를 지닌 사람이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