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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 3인 내게 런던은 언제나 가능성이다
전통 회화 방식을 고수하는 추상화가 강임윤 씨, 공공 미술에서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찾은 조각가 원지호 씨, 동양적인 소재로 실험적 시도를 거듭하는 화가 김영주 씨. 런던에서 세계 무대를 목표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 3인을 그들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추상화가 강임윤 씨
신화가 시가 되고 그림이 되다


한국과 노르웨이 전시를 앞두고 대부분의 시간을 작업실에서 머물고 있다는 강임윤 씨. 작품을 배경으로 활짝 웃으며 카메라 앞에 섰다.

작업실은 예상외로 소박했다. 기차역 바로 앞에 있어 규칙적으로 기차 소리가 들렸고 한쪽 벽면이 모두 창문으로 되어 있어 반사광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그는 서울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기획전과 노르웨이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앞두고 6개월째 매일 열두 시간씩 그림을 그리는 중이라 했다. 붓의 강렬한 결과 과감한 색감의 사용이 도드라지는 작품과 달리 아담한 체구와 여린 목소리의 그에게서 축적된 피로가 느릿느릿하게 전해졌다. 우리는 물감의 파편이 불균형하게 바닥에 떨어진 네모난 작업실 한가운데 마주 앉았다.
“대학 2학년 때 유학을 결심했어요. 유학 전에 다양한 도시의 예술 대학을 알아보았는데 런던이 가장 저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런던을 선택했습니다. 감성적인 성향의 제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런던에서 배울 점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한 거죠.” 강임윤 씨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회화와 조소를 복수 전공하던 중 스물두 살에 런던에 왔다. 영국 슬레이드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영국 정통 미술 교육의 전당임을 자랑하는 영국 왕립 미술원에 입학해 최우수 학생에게 수여하는 ‘골드 메달’을 받고 졸업했으며, 최근 이스트 런던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 런던에서만 10년째 작품 활동을 하는 셈이다.

신화는 근원에 대한 질문 그의 작품은 신화神話와 연결되어 있다. 단군신화의 ‘동굴과 곰’, 알래스카 이누이트 족의 신화 속 ‘고래와 바다’ 등이 작품을 설명하는 중요한 끈이다.
“신화는 옛날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을 이해하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었어요. 신화의 배경이 대부분 자연이고 그 속에서 제 작업의 모든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사람이 나무가 되고, 곰이 사람이 되는, 그 탄생의 소용돌이와 대지의 에너지를 저만의 언어로 포착하고 싶어요.” 최근 그는 영국 작가이자 시인인 파비안 피크Fabian Peak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고 떠오르는 영감을 시詩로 표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완성된 시 ‘생각의 한 해, 한 해의 생각(A year of thinking, thinking of a year)’를 바탕으로 다시 이미지를 확장하는 중이다. “시는 저의 그림처럼 무척 추상적이에요. 요나와 고래에 관한 성경속 이야기도, 툰드라의 광활한 대지도 등장합니다. 열두 점의 작품 각각에 시 한 편을 써달라 부탁했는데, 시를 받아보니 다른 영감이 떠올랐어요. 그 그림을 다시 작업하고 있답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 10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런던에 머물며 작업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런던에서는 체면이나 형식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어 좋아요. 문화 강국이라 하잖아요.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답니다. 무엇보다 작업을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관람객이 많다는 점이 런던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학교라는 무대를 완벽하게 졸업했으니 그의 작품 세계는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리라. 런던을 넘어 세계라는 무대로 더 크게 도약할 수 있기를 응원한다.

1 작업실 한쪽 벽면에 붙어 있는 그의 작업 스케치.
2 ‘수염고래의 골짜기(Valley of the Rorqual)’, 170×250cm, oil on canvas, 2012. 이미지는 국제 갤러리 제공.


조각가 원지호 씨
사회적 울림을 조각으로 말하다

“런던은 생활하기에 그리 편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작가에게 많은 기회를 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작가가 신청할 수 있는 공모전이 쏟아져요. 그만큼 대중과 소통할 기회가 많다는 이야기지요. 동네 나들이 가듯 테이트 모던 갤러리와 사치 갤러리 등 현대미술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곳을 갈 수 있고요.” ASC(Artist Studio Company) 스튜디오에서 만난 조각가 원지호 씨는 강임윤 씨와 마찬가지로 영국 슬레이드 대학 출신. 2011년에 졸업하고 작가로서 본격적인 삶을 시작한 신예 작가다. 경희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정통 순수 미술 학교인 슬레이드 대학으로 유학을 왔다. 최근 그의 관심사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다.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지만 자국민의 관심이 덜하다는 점, 해외에서는 우리나라가 언제라도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 등이 그의 내면을 강하게 흔들었다. 그 울림을 조각이라는 언어로 말하는 것이 그의 화두다.

“런던 시내를 구석구석 들여다보면 크고 작은 깃발이 참 많아요. 깃발은 과거 무기로도 사용했고, 형태와 각도 자체도 권위적이고 위협적이에요. 깃발이 사회를 수직적으로 구분 짓는 사회적 도구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깃발을 상징하는 조각 작품을 작업하고 있습니다. 뜻이 맞는 관람객과 함께 ‘깃발 없는 하루’ 퍼포먼스도 해보고 싶어요.” ‘깃발이 없는 사회를 위한 기념물’은 그가 깃발을 소재로 만든 가장 최근 작품이다. 건축 공사장의 버팀목 자재로 쓰는 스캐폴딩을 이용해 대형 깃발을 제작한 것. ‘오픈 웨스트Open West’ 공모전에 당선되어 글로스터 대성당Gloucester Cathedral 안에 조각을 설치했다. 마을 축제처럼 시민들과 함께 준비하고 소통하는 전시였기에 그에게 의미가 더욱 컸다. “젊은 작가들에게 기회가 많은 곳이 런던입니다. 미술 대학의 졸업 전시는 도시 자체의 큰 이벤트지요. 큐레이터뿐 아니라 세계적 아트 컬렉터들도 적극적으로 작은 전 시회를 방문해 작가들을 찾아요.” 역동적이고 다문화가 공존하는 도시, 표현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시장도 활짝 열린 도시 런던에서 그는 다음 조각 작품을 구상하는 중이다.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처럼 수평적 구조물로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물을 그만의 언어로 표현하고 싶다는 야심 찬 포부를 전했다. 

(왼쪽) 날씨가 좋은 날에는 근처 공원에서 산책을 즐긴가는 원호 씨. 카메라 앞에서 쑥스럽게 웃는 표정이 소년 같은 천진함이 느껴진다.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 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글로스터 대성당에 설치한 조각 작품. ‘ 깃발이 없는 사회를 위한 기념물’ , 744×140×35cm, wood・cable ties・ scaffolding net, 2011.


화가 김영주 씨
흔적이 쌓이면 역사가 된다

런던 이스트 지역은 과거 가난한 예술가들의 공간이었다. 폐건물이나 빈 공장을 개조해 아틀리에나 작은 갤러리로 사용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예술가의 마을이 된 것. 화가 김영주 씨를 만나기 위해 찾은 이스트 지역은 온통 갤러리와 디자인 회사가 들어찬 곳이었다. 초라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세련되고 창의적인 구조로 탈바꿈한 갤러리들은 런던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온 젊은 작가들을 위한 ‘열린’ 무대다. “런던에는 예술가들에게 비교적 저렴하게 스튜디오를 임대하는 건물이 몇 군데 있어요. 이곳이 그중 하나인데 5개월 전부터 입주해 지내고 있습니다. 입주하려면 수개월을 기다려야 할 만큼 인기가 좋지요. 특히 가까운 곳에 ‘완벽한 쌀국수’를 맛볼 수 있는 베트남 식당도 있어 마음에 들어요. 이따 함께 가실래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순수 미술과 미술사를 공부한 그는 2010년에 런던으로 왔다. 칼리지 오브 아트 앤드 디자인에서 대학원 과정을 끝낸 지 이제 1년이 되어간다. “한국에 있는 동안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그래서 바로 런던으로 왔습니다. 독립 작가로 홀로 서는 것을 목표로 하루 대부분을 작업실에서 보내고 있어요. 현재는 작가라기보다 그렇게 되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3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는 다양한 질량의 종이에 그린 그림이 눈에 띄었다. 모호한 선과 면으로 채운 백지에서 동양적 정서가 느껴졌다.

“우리나라의 건축 문화는 폭력적이에요. 흔적도 없이 건물을 밀어버리는 일이 많죠. 한국에 갈 때마다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곤 합니다. 저는 그 과정에서 남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틈, 흉터, 궤적과 같은 누락된 흔적 속에서 이야기를 발견하고 싶어요.”
기후나 주변 환경에 쉽게 반응하는 ‘종이’는 그런 면에서 그에게 가장 매력적인 소재다. 짓이겨지고 구겨지고 물감이 덧칠해진 종이가 하나씩 겹쳐질수록 그 안에 담긴 시간의 역사도 켜켜이 쌓인다. 도시 건물의 낡은 틈을 찾아 기록하는 작업도 구상 중인 그는 10월에 있는 ‘오픈 스튜디오’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기를 고대한다. “올해가 가기 전에 두 개의 공모전에 작품을 낼 계획입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입니다.”

(왼쪽) 종이를 소재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는 김영주 씨. ‘오픈 스튜디오’ 전시를 앞두고 한창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1 ‘ The Imbued Ⅰ’, 68×93cm, mixed media on paper, 2012.
2 ‘ Untitled ’, 49.5×70cm, water color and ink on paper, 2012.

글 신진주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