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귀 기울여 들어보니] 2012 런던 패럴림픽 금메달리스트 최광근 빛 속의 어둠 어둠 속의 빛
올여름 가장 화려한 축제이던 ‘2012 런던 올림픽’이 끝난 보름 후에 ‘런던 패럴림픽 (장애인 올림픽)’이 시작했다.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경기 이상의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시야의 한계 속에서도 한판승으로 기적 같은 승리를 이룬 유도 금메달리스트 최광근 씨를 그가 런던에서 귀국한 직후 만났다. 천진한 소년의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질서들로 덮인 우주에 살고 있습니다. 고개를 떨궈 발을 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 별을 보세요.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호기심을 가지세요!” 영국이 낳은 세계적 우주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외쳤다. 비록 휠체어에 부착된 고성능 음성 합성기를 통해 흘러나온 말이지만 화면을 지켜본 전 세계 인의 귀를 사로잡았으니 ‘외침’이 분명하다. 지난 8월 29일에 열린 2012 런던 장애인 올림픽 개막식에서였다. 카운트 다운과 함께 빅뱅을 상징하는 공연 속에 그가 등장했다. 평생 루게릭병과 싸우면서도 자신의 발밑 신세를 한탄하지 않고 찬란한 별들을 바라보며 학문적 업적을 일궈온 그의 말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스몄다.

영국은 장애인 스포츠의 발상지이다. 장애인 올림픽은 영국의 구트만Guttmann 박사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척수 장애를 입은 군인들의 재활을 돕기 위해 도입한 운동 요법에서 비롯되었다. 1968년 이스라엘에서 열린 최초의 장애인 올림픽 이후 현재까지 장애인 올림픽은 전 세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바꾸어놓는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나 의 삶(Live As One)’이라는 슬로건 아래 열린 이번 대회에서 한국은 금 9, 은 9, 동 9개로 종합 12위의 성과를 거두 었다. 패럴림픽이 감동의 이야기로 가득 찬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저마다 장애를 딛고 자신의 한계와 싸워온 승 리의 기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 꿈꾸고 있으면 깨워달라 나는 자신의 불운을 금빛으로 승화시킨 한 사람의 장애인 선수를 만나러 간다. 경기도 이천, 천덕봉 자락에 있는 이천장애인체육종합훈련원에서 최광근 선수를 만났다. 25세, 양평군청 소속, 2012 런던 패럴림픽 남자 유도 100kg 급 금메달 획득. 훈련 중 부상으로 생긴 망막분리 증상으로 선수 활동을 만류하는 의료진을 뿌리치고 장애인 유도 최정상에 올랐다. 최 선수는 장애인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건장하고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그늘 없이 해맑은 청년의 모습이다. 금메달을 딴 소감을 물어보았다.

“처음 3일간은 꿈꾸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나, 꿈꾸고 있는 거라면 깨워달라’고 했어요.”
최 선수는 2010년 광저우 아시안 패럴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땄고, 2011년 국제시각장애인 종합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금메달을 딴 바 있다. 세계 일인자로 꼽히는 유도 실력자다. 모두가 기대할 만큼 실력을 갖추었는데도 꿈처럼 여겨졌을까?
“부상 때문에 훈련을 제대로 못 했거든요. 마음을 비우고 그저 최선을 다하자 생각했는데, 그게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 같아요.” 큰 경기를 앞두고 훈련을 못 하면 얼마나 갑갑했을까? “대신 상대 선수들의 경기 동영상을 핸드폰에 담아두고 수시로 보았어요. 시합하기 직전에도 보고 나갔지요. 그게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부족한 연습을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극복한 것이다.
“유도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건강과 예의입니다.”
너무 모범 답안이다 싶다. 운동을 하니 건강은 좋아졌겠고, 예의는 최 선수가 지닌 본래 성품이 아닐까?
“어릴 때는 툭하면 싸워서 어머니가 학교에 많이 불려 오셨어요. 제가 유도를 하기 전에는 비만이었거든요. 아이들이 뚱뚱하다 놀리면 참지 못했어요. 유도는 예의로 시작해서 예의로 끝나는 운동입니다. 유도를 하면서 마음도 건강해지고, 약자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친구들이 생겼어요.”

“그 엄청난 시련을 겪고도 엄마를 위해 웃어주는 아들이에요. 그렇게 원하던 금메달까지 받았으니 효자 중의 효자지요.” 원주에서 ‘금메달리스트 엄마’로 슈퍼스타가 되었다는 김숙희 씨는 아들이 더 이상의 부상 없이 건강하게 선수 생활을 하기만 바란다.


유도만이 내 세상이기에 처음 유도를 시작한 것은 목포 대성초등학교 5학년 때로 어머니의 권유 때문이었다. 살이나 좀 빼보라고 권한 유도가 그의 앞날을 바꾸어놓았다. “목포가 고향인가요?” “아뇨, 서울이 고향입니다.” 짤막한 답변 속에는 많은 행간이 숨어 있었다. 서울 태생의 소년이 말 설고, 물 선 목포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다섯 살 때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이른바 조손 가정에서 자란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외조부모의 서울 살이도 여의치 않아 외할머니의 고향인 목포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생활 전선에서 돈을 버느라 서울에 남았다. 친가도 아닌 외가에 딸려 내려온 그는 눈칫밥을 먹으며 서러움에 울었다. 학교에서도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 다투었다.

“제가 마음잡은 건 유도 때문입니다. 혼자 집에 있었으면 우울증에 빠졌을 텐데 유도를 하면서 합숙소에 들어갔어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몸을 부딪치다 보니 외롭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어요. 지금도 저는 혼자 있는 걸 싫어해요.” 유도는 정상 가정에서 자라지 못해 비뚤어지던 소년을 잡아주고 일으켜주었다. 좋아하고 미칠 수 있는 일 한 가지를 가진다는 것은 만 가지 시련과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방패라는 사실을 그의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유도 인생이 탄탄대로만은 아니었지요?” “늘상 부침이 있었어요. 잘되어가나 싶으면 시련이 닥치고, 시련인가 싶으면 보상이 따랐어요. 이제는 시련과 보상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려 해요.” 문자가 아니라 몸으로 겪은 깨달음이다.

첫 번째 겪은 어려움을 물어보았다. “중학교 때였어요. 열심히 유도를 해도 실력이 늘지 않는 겁니다. 그만두고 싶었지요. 합숙소를 빠져나와 무단이탈을 일곱 번쯤 한 것 같아요. 그때마다 선생님들과 어머니가 잡아주셨어요.” 중학교는 당시 어머니가 계시던 강릉, 동명 중학교로 가게 되었다. 어머니와 함께 생활한 것은 아니고 주중에는 합숙소에 있다가, 주말에나 어머니와 만났다. 중, 고교, 대학 시절을 비롯 현재의 양평군청 유도팀에 이르기까지늘 합숙 생활을 해온 그는 어머니와 ‘주말 모자’로 살아왔다.

어머니 김숙희 씨는 ‘늘 그리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아들이 집에 오는 주말을 비워두었다. 절대 외식하는 일 없이 손수 음식을 해서 먹였다. 아들은 어머니를 어떤 분으로 생각할까?

“어머니는 제게 ‘삶의 이유’입니다. 친구이자 멘토 같은 분이죠.” 어머니는 아들 뒷바라지 하느라 식당 일부터 이것저것 안 해본 것이 없단다. 아들이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낄까 봐 혼자 엄부와 자모 1인 2역을 했다. 중ㆍ고등학교 내내 학부모 회장을 역임했고, 아들이 경기를 치르는 날이면 항상 관중석에 그이가 있었다. 어머니는 ‘이기라’는 주문은 하지 않았다. 승부보다 최선을 다할 것을 원했다. 이긴 경기라도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따위로 시합을 하느냐’고 질책했다. 이번 런던 대회 때도 함께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어머니의 목이 갑자기 퉁퉁 부어서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스트레스로 인한 림프선 결핵이었다. 아들은 많이 놀랐지만 혼자 런던으로 떠나야 했다. 아들의 금메달 소식 덕분인지 지금은 경과가 많이 좋아졌단다.

최 선수는 중학교 시절의 방황 끝에 유도 명문 주문진고등 학교에 진학한 뒤 새로운 세계를 맞이했다. 그는 이때를 “유도에 눈을 뜨게 된 시기”라고 말한다. 시합에 나가기만 하면 이겼다. 앞날에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맑음’ 다음엔 ‘흐림’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국 체전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연습 상대인 선배의 몸에 눈을 부딪쳤다. 병원을 찾았지만 왼쪽 눈은 완전히 시력을 잃었고, 나머지 한쪽 눈도 점점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의사는 유도를 그만둘 것을 종용했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저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어요. 유도를 그만둘 것이냐, 계속할 것이냐. 그런데 제가 할 줄 아는 것은 유도밖에 없었어요. 대학은 가고 싶은데 저희 집은 등록금을 댈 상황이 아니었어요. 오직 유도 실력을 인정받아 장학생으로 가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곰곰 생각해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예요. 어차피 망가진 눈인데 유도로 끝을 보자고 마음을 추슬렀지요.” 아들의 사고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웬만해선 눈물을 비치지 않을 만큼 세파에 단련되었지만 아들이 수술받는 세 시간 동안 생애 가장 많은 눈물을 쏟았다. 아들은 결국 전국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했다. 장애인 대회가 아니고 일반인 경기였다. 사람들은 그가 장애인이라는 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 우승 경력으로 한국체대에 장학생으로 가게 되었는데 신체검사할 때 덜컥 겁이 났다. 시력 때문에 혹시 불합격될까 봐 미리 시력 검사표를 외워두었다가 가까스로 통과했다.

(왼쪽) “희망을 잃지 마라”라는 문장은 그가 선수촌 숙소에 붙여놓고 매일 되새김질한 말이다. 최 선수의 금메달이 더욱 빛나는 이유다.

눈을 다치게 한 상대 선수에 대한 원망은 없었을까? “처음에는 원망스러웠지요. 하지만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요. 어머니도 그 형을 함께 만나고요. 형도 그때 저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그 어머니에 그 아들답다. 대학에서도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었지만 졸업을 앞두자, 시력은 마침내 시련으로 다가왔다. 시각 장애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실업팀마다 데려가길 꺼렸다. 마침내 유도를 그만두어야 하나 실의에 빠졌다. 하지만 구름 속에는 달이 있었다. 양평군청에서 유도팀을 창설하면서 그를 부른 것이다.

감독이 아직 미흡하지만 잘하면 대우가 좋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조건을 떠나 유도를 할 수 있게 해준 양평군청에 고마웠어요.” 보도를 보니 연습실을 확보할 수 없어 훈련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해서 물어보았다. “아뇨,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차를 타고 용인대와 한국체대에 자주 가서 훈련을 했어요. 양평군청 소속 유도팀은 여섯명인데 체급도 다 다릅니다. 유도는 여럿이 있어야 훈련하기 좋습니다. 모교인 한국체대 전승훈 교수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늘 격려와 조언을 해주신 고마운 분이지요.”

어머니에 따르면 아들이 인복이 많다고 한다. “광근이는 가는 데마다 ‘이쁨’을 받아요. 선생님, 교수님, 감독님들이 잘해주셔요. 지금도 중ㆍ고등학교 선생님들과 시합하기 전에 꼭 전화를 주고받아요.” 혈육의 부정父情을 느낄 수 없었으니 사회적인 아버지들이 나타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최 선수를 보면 ‘인복’은 스스로 불러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둥 글고 긍정적인 성품이 사람들을 당기는 것이리라. 덩치는 산 같지만 악수할 때 구름 같던 손아귀가 떠올랐다. 유도 선수 특유의 위압적인 근육질 몸도 아니었다. 오래도록 고시원에서 공부하다 나온 살집 좋은 청년처럼 보인다고 말하자, 그런 소리 많이 듣는다며 웃는다. 선천적으로 유도에 적합한 몸일까, 후천적 노력 덕분일까? “선천적인 것은 글쎄요, 10% 정도? 저는 후천적인 노력이라 생각해요. 이상하게 아무리 운동을 해도 근육이 안 생겨요. 하지만 저는 제 몸에 맞는 최적의 유도 방법을 찾아낸 것 같아요.”

어머니의 이야기는 살짝 다르다. 그의 아버지는 전국체전에도 나갔던 권투 선수였으며, 할아버지는 씨름을 잘해서 황소를 몰고 오던 집안이었단다. 뼈대는 집안 유전자 탓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희망이던 아들에게 찾아온 장애, 그리고 그것을 극 복하고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한 아들을 지켜본 어머니는 ‘장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저부터 장애인 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어요. 과연 무엇이 장애일까요? 성한 사람이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지 못하면 그게 장애가 아닐까요?”

어머니에게 소원을 물어보았다. “광근이가 장가가면 같이 살고 싶어요. 한집에 살면서 따뜻한 밥 지어 먹이고, 손주도 키워가며 오순도순 살고 싶어요.” 남들이 비범을 꿈꿀 때 평범조차 쉽지 않았다는 어머니와 아들이었다.

종일 이뤄진 촬영에서 사진가 준초이 씨는 최 선수가 이룬 환희의 결정적 순간을 사진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한판 승부를 재현하자 물결이 역동적으로 흔들렸다.

“삶에서 때로는 슬플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척하는 맑고 밝기만 한 금메달리스트. 그가 촬영 도중 울컥하는 아주 짧은 순간이 있었다. ‘10%의 선천적 재능과 90%의 노력이었습니다’ 하고 말한 직후였다. 그 순간 사진가가 아닌 아비의 심정으로 그를 포근하게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_ 사진가 준초이

나의 짐은 나의 날개 생로병사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은 궁극적으로 장애를 하나씩 얻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나이가 들면 귀와 눈이 어둡고, 이가 빠지고, 관절이 삐걱거리고, 허리는 굽는다. 아무리 날랜 표범의 다리 근육도 자신을 마지막 부려놓는 곳은 지평선 너머가 아니라 땅의 어느 바닥일 뿐이다. 누구든 장애는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지만 장애만 한 스승이 없기도 하다. 장애를 통해 장애의 너머를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장애는 맨몸이 아니라 짐을 지고 달리는 것이다. 화가 노은님 씨는 “나의 짐은 나의 날개”라고 말했다. 시각 장애인들 가운데 예언자나 현자가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눈 감으면 발밑 현실이 아니라 오히려 먼 지평 너머를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최 선수에게 앞으로의 꿈을 물었다. “일단 앞으로 있을 시합들을 차근차근 준비할 겁니다. 올 10월에 있을 전국체전부터요. 장기적인 꿈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IPC) 위원에 도전하는 겁니다. 유능한 지도자가 되어 저와 같은 시각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나는 최 선수의 현재뿐 아니라 미래를 향해 박수를 보낸다. 그는 앞으로도 무수한 선수들과 겨루겠지만 그가 메쳐 한판승을 거둘 상대 가운데 하나는 장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일 것이다. 그의 성취가 장애인 올림픽의 이념답게 ‘인간의 평등을 실현하고, 인간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가치로운 것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취재 협조 양평군청, 대한장애인체육회(02-3434-4500) 


담당 신진주 기자 | 글 반칠환(시인) | 사진 준초이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