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살은 무늬마다 각각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박달나무로 만드는 원형 떡살은 한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다. 원통에 박힌 검정 테두리는 상감 기법을 이용해서 먹감나무를 박은 것.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나 애니메이션 등에서 선사시대 사람들이 동굴 벽에 남긴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때로부터 수천 년이 흘렀고 당시 그들과는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지만 그 흔적들 속에는 더 많은 사냥감이 잡히고, 무탈하게 생활할 수 있기를 바라는, 현대인이 소망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 무언가가 오롯이 담겨 있다. 굳이 기원전까지 헤아리지 않더라도 인간의 기원을 품은 무늬는 단청이나 노리개, 기와 등에서도 쉽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백년가약을 맺는 혼례상, 무병장수를 바라는 환갑상 등 관혼상제 의식에 빠질 수 없는 음식인 떡을 제외하고 무늬를 논하는 것은 서울에서 김씨와 이씨를 빼고 호구조사를 하는 것과도 같다. 떡에 박힌 무늬에는 하나하나마다 저마다의 의미가 담겨 있다. 문제는 무늬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해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사용한다는 것. 아이의 무탈함을 바라는 돌상에 제사떡에 쓰는 무늬를 찍은 떡을 버젓이 올리는 일이 왕왕 일어나고 있다. 전라남도 담양에 위치한 목산공예관에는 20여 년간 떡살 무늬를 연구하며 1천여 개의 떡살을 완성한 장인이 있다. 최근 떡살과 다식판 무늬에 관해 소개한 책 <소중한 우리 떡살>을 펴낸 김규석 씨. 하루 16시간을 작업하며 스스로를 ‘일꾼’이라고 칭하는 그가 말하는 무늬 사랑.
몸 속 깊이 밴 나무 향기 김규석 씨가 나무 다듬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정치인이었던 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나무로 무언가를 뚝딱 만들어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전쟁놀이할 때 쓰던 목검도, 공부하던 책상도 할아버지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무 좋아하는 할아버지의 피는 손자에게 대물림되었다. “목각 외에는 잘하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조각만 파고들었지요. 남들 다하는 영어나 수학 공부도 안 했고, 학교도 다니다가 말았습니다. 후회요? 모든 걸 다 잘할 수는 없잖아요. 좁고 깊게 들어가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에요.” 자신의 분야가 아닌 것은 절대 손을 대지 않았다는 김규석 씨. 나무 다듬는 일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는 그의 말에서 어떤 조건과도 타협하지 않는 장인의 고집이 느껴졌다.
나무장이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자연스러웠다. 군대 가기 전, 당시 경기도 파주에서 풍속 조각가로 이름을 날리던 이주철 선생을 찾아갔다. 인물 목각을 주로 배웠는데 다양한 표정과 동작을 재현해가며 섬세함과 꼼꼼함, 집중력을 키울 수 있었다. 군대에 다녀와서 10년 남짓 목각을 더 배웠다. 인물 목각 외에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고 싶었던 중 전라남도 광주에 나무로 떡살을 만드는 장인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현재 광주광역시 지정 무형문화재 제7호인 이연채 선생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전국에서 떡살을 만드는 사람은 스승님 한 분뿐이었어요. 9년을 그분과 함께 있었는데 곁에서 조각칼을 만들어드리고 나무 형태도 잡아드리면서 일을 배웠습니다.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사시다 가셨죠. 경주 최부잣집에 태어나서 서른여섯 살에 남편이 죽고 결국 하숙집을 운영했어요. 월남전에서 막내아들까지 잃었고요. 아버지한테 전수받은 떡살 기술로 문화재까지 되셨으니 대단한 거죠.” 이연채 씨가 김규석 씨에게 가르친 것은 떡살 공예에 관련된 세세한 노하우에 그치지 않았다. 기술적인 부분에 앞서 우리 민족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떡의 소중함과 떡살 무늬에 담긴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헤아림 역시 전수했다.
“허투루 보아 넘긴 떡살 무늬마다 제각각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 내용을 잘못 알고 있는 것도 많더군요. 의미 없이 만들어진 무늬는 하나도 없었어요. 하다못해 일제 강점기 때 만든, 학교와 자동차가 그려진 떡살도 그래요. 처음에는 무늬를 보고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어 웃었는데 그 재미있는 그림에서도 ‘공부하게 해주십시오, 부자로 살게 해주십시오’라고 기원하는 마음이 느껴지더군요.” 미국이 잠깐 대한민국을 지배했을 때 만든 ‘happy day’라고 쓰인 떡살과 구한말 때 대한독립을 바라는 마음이 담긴 태극기 무늬의 떡살도 같은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이리라. 속담 중에‘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 ‘당장 먹을 떡에도 살 박아 먹으렷다’라는 말이 있다. 조상들에게 떡은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들은 떡에 무늬를 넣음으로써 보는 즐거움과 의미까지 추구하려고 했다. 떡살 무늬는 삼다三多(복이 많고 장수하며 자식이 많은 일), 정토淨土(극락 세계), 벽사 邪(귀신을 물리침)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오래오래 잘살고, 자식 많이 낳고, 편안한 삶을 살게 해달라는 바람을 나타내는 데 소중한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무늬를 제대로 규명하고 싶었다.
“예식장이나 장례식장에 가서 상 위에 차려놓은 떡을 보면 당황스러운 경우가 종종 있어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딱 이런 상황일 겁니다. 떡살 만드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떡 무늬를 살펴보게 되는데 혼례상에 윤회를 의미하는 수레바퀴 무늬를 쓰거나 제사상에 부부의 궁합을 의미하는 원앙 무늬의 떡살을 사용하기도 하죠. 이거 안 되겠다 싶어 나라도 무늬에 대한 바른 정의를 내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규석 씨는 떡살 무늬의 올바른 의미를 알리기 위해 전문서적을 직접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대업은 시작되었다. 헌책방을 뒤져 떡살에 관련된 옛 문헌을 찾고 박물관도 다녔다. 주변에 ‘전문가’라 칭하는 이들도 많이 만났다. 그동안 출판된 문양집이 여러 권 있었지만 집중적이고 체계적으로 떡살 무늬를 다룬 책은 보지 못했다. “떡살만큼 다채로운 무늬를 담는 도구가 또 있나요? 이것을 빼고 우리나라 전통 문양을 논한다는 것이 불가능한데도 제대로 된 서적이 없더군요. 그런데 1972년 일본에서 한국 떡살 무늬에 관련된 책을 만들었더라고요. 해석해서 읽어보니 기존에 우리나라에서 나오던 것보다 훨씬 체계적이었습니다. 일본 사람들보다 잘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1 “아끼는 떡살이 있냐고요? 하나 잘 만드는 것에 목숨 걸면 뭐합니까. 구름이 되어야 비를 내리는 것처럼 전체적으로 다 좋아야죠. 모든 떡살을 하나하나 최선을 다해 만들 뿐이에요.” 떡살 장인 김규석 씨의 우문현답이다.
2 하나의 떡살을 완성하는 데는 약 일주일이 걸린다. 그러나 조각에 앞서 나무 자체를 다듬는 데에만 2~3년이 소요된다. 그래야 떡살로 만들었을 때 뒤틀리거나 변형되는 일이 없다. 사용한 떡살이나 다식판은 동백기름이나 올리브오일을 발라서 그늘에 둔다.
3 떡살 전문서적을 만들기 위해 17년 동안 1천여 개의 떡살을 완성한 김규석 씨.
4 손에 익어서 신체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도구들은 직접 만들어서 사용한다.
17년 동안 1천 개의 떡살을 만들다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나서 그는 하루를 3등분했다. 8시간은 식사와 수면, 8시간은 목공, 나머지 8시간은 책 만드는 시간으로 분류했다. 그 생활을 17년에 걸쳐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반복했다. 이를 지키기 위해서 독하게 마음 먹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책이 나올 수가 없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김규석 씨가 떡살 하나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일주일. 한 달 동안 열심히 만들어도 네 개가 고작, 1년을 만들어도 쉰 개가 채 안 된다. “같은 무늬로 떡살을 여러 개 파는 것은 차라리 쉬워요. 그러나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종류가 필요했죠. 어차피 사진은 한 장만 들어가는 거니까요. 기획하고 나서 10년 동안 만들었더니 약 4백 개가 모이더라고요. 15년 동안 만드니까 6백~7백 개가 되고요. 나머지 2년 동안 마무리 작업을 하며 1천여 개를 완성했습니다.” 무슨 일을 오랫동안 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지칠 때가 오게 마련. 사람들이 슬럼프를 이겨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음주가무, 혹은 낚시나 등산을 하거나 멀리 바람을 쐬는 등등. 물론 김규석 씨에게도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에 한 번씩 슬럼프가 왔다. 심신이 지칠 때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자신을 더욱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작업이 조금만 힘들어도 쉬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까 봐 일부러 일을 더했어요. 안 그러면 1년에 3~4개월을 놀아야 하는데 그러면 책이 만들어지지 않죠. 힘들 때 어떤 방법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일을 성취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판가름 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쉬어야 한다’는 생각에 속아서 제자리걸음을 하곤 하죠.”
떡살 만드는 일은 나무를 고르는 일부터 시작이다. 단단하면서도 칼을 대면 부드럽게 파지는 박달나무나 감나무, 먹감나무, 대나무 뿌리 등이 좋은 재목. 이들을 2~3년 동안 그늘에 잘 말려 초벌작업을 한다. 이는 나무가 비와 바람, 햇볕 등을 맞으며 충분히 수축할 때까지 천천히 기다리는 작업으로 나중에 떡살로 만들었을 때 비틀어지거나 균열이 생기는 것을 막아준다. 단단하게 말린 나무는 다시 1년을 둔 뒤 그제야 조각칼을 댈 수 있다.
정성껏 말린 나무에 조각을 하는 일은 엄청난 집중력을 요한다. 자칫 손이 엇나가면 나무를 고르고 말리는 데 써버린 2~3년의 시간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린다. 떨어져 나간 나무를 접착제로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두 눈을 고정시키고 작업을 하다 보면 얼굴에 서서히 마비가 온다. 그럴 때면 김규석 씨는 한두 시간 일을 멈추고 다시 시작한다. 그러기를 반복하다가 병원에 실려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잇몸이 내려앉아 수술을 여섯 번이나 받았다. 재작년에도 쓰러져서 한의원을 갔는데 맥이 잡히질 않았다. 다행히 그 후 2년 동안 꾸준히 약을 먹어서 겨우 회복한 상태다. 수술을 받고 와서 곧바로 작업실에 들어가는 그를 두고 주변에서는 독종이라고 했다.
몸이 고된 것은 마음이나 머리가 힘든 것보다 차라리 낫다. 나무를 다듬고 파내는 과정보다 더 힘든 것은 무늬를 디자인하는 일이었다. 그는 전통 무늬를 고스란히 베끼는 것은 표절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뿌리는 전통에 둔 채 이 시대에 맞는 떡살을 완성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그러자니 무늬에 대해서는 박사가 되어야 했다. “상형문자나 무늬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는 일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근거나 논리가 조금만 약해도 학회로부터 공격을 받고 그렇게 되면 제가 작업한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지요.” 김규석 씨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탄탄한 논리를 만들기 위해 음양오행과 사주, 풍수 등 자연의 이치를 공부했다. 태초에 자연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꼼꼼히 살폈고, 조상들이 자연을 어떤 의미로 파악했는지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했는지를 연구했다. 문헌도 참고했지만 자료를 100% 믿지는 않았다. 이법에 맞지 않는 것은 모조리 골라냈다. 그렇게 선택한 무늬를 관혼상제에 따라 구분했다. 병원에 실려 갈 정도로 온힘을 다해 마침내 책이 완성되었을 때의 기분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기쁘고 설레면서도 한숨이 나는 게 5개월 이상 가더군요. 학자도 아닌 일꾼이 책 만들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요. 장시간에 걸쳐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뿌듯했어요. 빌려줬던 돈을 다 받은 기분이고요. 요즘에도 하루에 한두 권 꾸준히 팔리고 있으니까 다행이죠.” 책 나오기 전에는 출판 후 한 백 번 보려고 했는데, 막상 책이 나오니까 그동안 너무 질려 한 번도 제대로 읽게 되지 않더란다.
인생에서의 세 가지 목표 이번에 책을 완성한 것은 김규석 씨가 일생 동안 목표로 하는 세 가지 중 첫 번째였다. 두 번째 목표는 떡살 박물관을 마련하는 것, 마지막은 스스로 무형문화재가 되는 일이다. 현재 목산공예관이 자리 잡은 터 역시 박물관을 만들 생각으로 미리 들어왔던 것인데 그 지역이 그린벨트로 묶이게 되어 진행이 어렵게 되었다고. “박물관은 10년 전부터 계획해온 거랍니다. 비용도 다 모았어요. 그런데 허가가 잘 안 나네요. 사람들이 떡살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늘 겪는 관혼상제에 빠질 수 없는 전통 문화인데, 사라질 게 아니고 우리와 끝까지 함께 갈 문화인데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김규석 씨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현재 전국에는 떡살 장인으로 활동하는 이는 김규석 씨 한 명이다. 떡살무형문화재였던 이연채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그 전승자인 김규석 씨가 문화재가 되는 것은 자명한 일. 그러나 아직 문화재가 되기에 젊은 나이여서인지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그는 앞으로 시간을 갖고 계속 도전해볼 생각이다.
몇년 전만 해도 떡살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수요가 많았다. 알음알음으로 서울에서 목산공예관까지 찾아오는 이도 제법 있었다. 그런데 앤티크 제품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중국이나 동남 아시아 등에서 물건이 많이 들어왔고 값이 비싼 전통 떡살을 찾는 사람들이 줄었다. 시중에서 보는 90% 이상이 수입품으로 한 번 들여올 때의 양은 상상을 초월한다. 다른 나라 제품을 쓰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중국산이라고 하면 팔리질 않으니 우리나라 앤티크라고 속여 판매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혼란 속에서도 김규석 씨는 태연하기만 하다. “모조품이 판을 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있어온 일이에요. 떡살뿐만이 아니고 그림이나 가구, 민예품도 모두 모조품들이 있었지요. 조선시대 때는 고려시대 모조품이, 구한말에는 조선시대 모조품이 있어왔습니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해내는 일은 개인이 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에요. 시대가 지나면 우리 후손들이 정의를 내려줄 것입니다.” 김규석 씨는 떡살 부분만큼은 진위를 구분해낼 때 자신이 쓴 책이 기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아름다운 떡살 디자인
1 장방향 떡살. 연꽃문과 모란문, 자리문(기하학 문양의 일종)은 좋은 일을 축하하는 자리라면 어디든 사용할 수 있다. 단단하고 질기며 숨구멍이 없는 감나무로 만들어 견고하다. 길이 50cm.
2 장방향 떡살. 기하학적인 빗살무늬는 결혼식 때 주로 쓴다. 약간 붉은 빛을 띠는 잡목으로 만들었다. 길이 60cm.
3 육면 떡살. 수레차문과 사태극, 모란문, 국화문, 쌍희자문, 연꽃문이 새겨져 있으며 결혼식에 주로 사용한다. 박달나무로 만들고 돌배나무로 상감기법을 사용했다.
4 정방향 육면 떡살.
5 손잡이 떡살. 음과 양의 조화로움을 상징하는 태극문과 윤회를 상징하는 수레차문은 제사 지낼 때 사용한다. 박달나무로 만들었다.
6 손잡이 부분이 둥글둥글한 손잡이 떡살. 국화문이 새겨져 있다. 돌배나무로 만들었다.
7 손잡이 떡살. 기하학적 느낌의 연꽃 무늬는 사찰에서 주로 쓴다. 감나무로 만들었다.
8 다식판. 가장 단단한 나무 중 하나인 박달나무로 만들었다. 끈은 삼을 꼬아서, 고리는 백동과 청동을 두드려서 만들었다.
9 손잡이 떡살. 완자 무늬와 축복을 의미하는 연꽃은 사찰에서 주로 사용한다. 먹감나무로 만들어 얼룩덜룩하다.
|
백일상부터 제사상까 지 , 각각의 자리에 어울리는 떡살 무늬
백일
1 파도 물은 생명력과 정화력을 상징하며 부정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 떡살에서 파도문은 물고기문과 함께 사용되며 길상의 의미.
2 난초 난초 중 잎이 구불구불하고 보랏빛 꽃을 피우는 손蓀 품종은 손孫과 음이 같아서 자손을 상징한다.
3 국화 늦서리에도 청초한 모습을 잃지 않는 국화는 길상, 장수, 절개를 상징한다. 몸의 기운을 북돋우는 데 효험이 있다고 알려진 국화는 잔칫상에 가장 많이 쓰는 무늬 중 하나다.
혼례
1 기러기, 오리 기러기는 어느 한쪽이 먼저 죽으면 절대로 다시 짝을 짓지 않는다. 오리의 압鴨 자에는 갑甲이 있으며 오리 두 마리는 이갑二甲이 되는데 이는 소과와 대과, 즉 과거 급제를 의미한다.
2 석류 씨앗이 촘촘히 박혀 있어 다산을 상징한다.
3 나비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처량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나비 없는 꽃’이라 한다. ‘꽃이 좋아야 나비가 모인다’는 말은 참한 여자가 좋은 배필을 구할 수 있다는 뜻.
회갑
십장생 민간신앙 및 도교에서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열 가지의 사물. 해와 달, 구름, 산, 바위, 물, 학, 거북 등으로 구성된다. 모두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다.
불로초 늙음을 방지하는 풀이라는 뜻의 불로초는 한번 먹으면 무병장수한다는 신비의 존재다.
거북 예로부터 조상들이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온 거북은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를 상징한다.
제사
연꽃 진흙 속에서 자라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은 고대 인도와 불교에서 신성시되었다. 풍요, 장수, 건강, 신성 및 영원불사의 상징이다.
별 민간신앙 중에 북두칠성을 믿는 칠성신앙七星信仰이 있었다. 칠성신은 수명을 관장하고 무병장수를 돌봐주는 신이다.
수레차 바닥에 닿는 순간 다시 위로 올라감으로써 살아난다. 이처럼 재생을 반복하는 바퀴는 윤회와 영원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