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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국제 보자기 포럼 그냥 천 쪼가리가 아니라 천으로 만든 조각입니다
시작은 필살기, 익숙해지면서는 생활이었다. 그리고 잊힐 무렵에는 예술이 되었다. 천 쪼가리를 이어 만든 조각보, 보자기. 그 운명은 시대를 따라 이렇게 변했고 또 진화 중이다. 8월 11일부터 26일까지 헤이리에서 열린 ‘2012 국제 보자기 포럼’은 이런 조각보의 미래를 그려보는 진지하고도 즐거운 축제였다.


1 천 조각을 줄줄이 꿰어 거대한 모빌 아트를 만들었다. 황선하 작가 작품.
2 국제 보자기 포럼을 기획한 이정희 씨가 직접 만든 의상을 입었다. 뒤에 보이는 조각보 모티프 텍스타일 아트는 함정숙 작가 작품. 
(아래) 보자기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패션 소품. 문순영 작품.


“저는 캘리포니아에 사는데, 취미가 조각보 만들기예요. 때마침 한국에 나온 길에 보자기 전시를 관람하는 행운을 만났습니다!” 아직도 조각보를 전통 규방 문화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 파주 헤이리 아트밸리 곳곳에 자리한 여섯 개 갤러리에서 열린 ‘2012 국제 보자기 포럼’. 그중 메인 전시관인 아트팩토리에서 만난 한 관람객은 다양한 나라에서 출품한 보자기 작품을 보며 물 만난 고기마냥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전통 조각보는 박물관에 가거나 전문 서적을 보면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텍스타일 작가들이 어떤 보자기, 어떻게 생긴 조각보를 만드는지는 쉽게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란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미국, 핀란드, 독일, 프랑스, 스웨덴 등 각국을 대표하는 텍스타일 관련 전문가가 ‘보자기의 미학적 가치와 세계적 문화로서의 전망’을 짚어본 강연과 세계 텍스타일 작가의 작품 전시 및 퍼포먼스 그리고 한국 전통 보자기와 섬유 공예를 가르쳐준 워크숍으로 구성한 포럼은 우리 전통문화의 발전 가능성을 현재 시점에서 다각적으로 살펴본 뜻깊은 시도였다.

유일무이한 존재, 이색적 조형미
“천 조각 하나도 허투루 버리지 않은 우리 선조의 지혜는 조각보, 보자기라는 유용한 살림살이를 만들었죠. 그런데 이 독특한 조형미는 모던 텍스타일 디자인의 초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해외에서 텍스타일 디자인을 가르칠 때 한국 조각보를 소개하면 모든 사람이 감탄을 금치 못했어요. 처음에는 잠자리 날개 같은 얇은 옷감을 이어 붙인 섬세함에 놀라고, 다음에는 보자기라는 존재 자체가 신기하다고 해요.”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RISD)에서 13년째 겨울 학기마다 한국 전통 보자기를 가르치는 보자기 예술가이자 큐레이터 이정희 씨. 2012 국제 보자기 포럼을 기획한 주인공인 그는 해외에서 공부하며 보자기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살림의 일부였지만, 해외에 나와 보니 소중한 예술 자산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기하학적인 천 조각, 여기에 자연스러운 컬러 스펙트럼이 더해지면 이보다 세련된 디자인은 없지요. 미국에서 강의할 때 우리 전통 조각보를 보여주면 학생들은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만들어 와요. 조각보 모티프의 귀고리를 만들어 착용하고 온 학생도 있었죠. 생활 속에 보자기 문화가 자리 잡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다. 세계적으로 리사이클링 문화가 화두가 되면서, 자투리 천을 모아 하나의 옷감, 쓰임새 많은 보자기를 만든다는 것은 시대적으로 귀감이 될 만한 디자인 작업. 이제 우리나라 보자기 문화는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논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1 전통 기법으로 만든 조각보에 입체 장식을 더했다. 김태윤 작품.
2 현대적 조형미와 다채로운 쪽빛 스펙트럼이 돋보인다. 이지선 작품.
3 미국의 조각보 작가 레오니 카스텔로 작품으로 이국적 컬러와 회화적 표현이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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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조각 사이에 틈을 둔 이색적인 디자인. 김유미 작품.
5 수채화 같은 자연스러운 컬러가 매력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미국의 대표적 보자기 작가 낸시 크라스코의 연작 시리즈.
6 왼쪽에 보이는 색동 누비 조각보는 정예금 씨 작품이고, 정면에 보이는 꽃 자수를 더해 화사한 자연미까지 표현한 전통 기법의 대형 조각보는 김영순 씨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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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랙이 간 듯한 자유로운 형태의 천 조각을 이어 만든 의상 디자인. 김혜연 작품.
8 컬러와 조형미를 강조한 조각보 모티프의 패션 그래픽 아트. 배전범 작품.
9 미술계의 ‘레이디 가가’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남아공 아티스트 피오나 커크우드.


보자기, 세계를 아름답게 감싸는 예술
2012 국제 보자기 포럼은 올해 처음 열린 행사.
이정희 씨가 오랜 시간 국내외를 오가며 보자기의 세계화 가능성을 신중하게 판단한 후 추진한 터라 개인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그 기대가 무척 높았다. 특히 그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두 가지. 보자기를 사용한 설치와 퍼포먼스, 해외 작가들의 국내 워크숍 참여다. 보자기 설치 아트와 퍼포먼스는 음악과 무대, 무용을 통해 보자기가 지닌 역동적인 매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 워크숍은 해외 작가들이 조각보의 탄생지에서 전통 소재와 기법을 직접 접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작품에 응용하게 만들려는 의도다. 그중 8월 21일 헤이리 논갤러리에서 열린 보자기 퍼포먼스는 참신하고 정열적인 공연으로 관람객의 흥을 돋우며 높은 호응을 얻었다. ‘예술계의 레이디 가가’라는 별명을 가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보자기&퍼포먼스 아티스트 피오나 커크우드Fiona Kirkwood는 명성에 걸맞게 우주에 온 듯 몽환적인 보자기 작품을 아방가르드한 분위기로 설치, 그 가운데에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표현하며 관람객을 매료시켰다.

해외 작가들의 보자기 본고장 나들이는 어땠을까? 이미 퀼트라는 패치워크 문화를 공유하는 서구 문화에서 우리 보자기의 매력은 무엇보다 잠자리 날개 같은 얇은 옷감을 사용해 보일 듯 말 듯, 공기처럼 가벼운 작품을 만든다는 점이다. 모시나 갑사 등 전통 옷감은 해외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라 이를 직접 구입하기 위해 동대문 원단 시장을 찾았다. 그리고 워크숍을 통해 모시와 갑사 등 헝겊 특징에 맞는 바느질법을 배우며 우리 전통 조각보에 대한 근본 이해와 발전적인 응용력을 동시에 경험했다.

국내 관람객 역시 보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 조각보 공예에 대한 흥미를 일깨우는 기회가 되었다.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는 대학생 박수연 씨는 조각보를 모티프로 한 의복들을 전시한 것을 보고 “입체 패턴의 원조가 조각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고, 퀼트를 취미로 즐긴다는 주부 민유영 씨는 “기하학적 모던 회화에서 맑은 수채화를 보는 듯한 서정적 자연미를 표현하는 미국의 보자기 작가 낸시 크라스코Nacy Crasco, 바느질과 자수를 통해 보자기를 디자인하는 스웨덴 작가 니나 본데스Nina Bondes 등의 작품을 보니 이에 도전하고 싶다”며 소감을 전했다.

2012 국제 보자기 포럼은 이번이 첫 회였다. 최초라는 시도이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지만 앞으로 이를 어떻게 발전시켜나갈지도 아울러 기대된다. 이제 매년 여름, 흥미진진한 보자기 축제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이 늘어날 수 있기를!

10 조각보를 응용해 전통 활옷을 만든 작품. 평면 작품이지만 입체감이 돋보이는 신비한 매력이 느껴진다. 문연희 작품.


취재협조 국제 보자기 포럼 준비위원회(www.handsofkorea.com)

글 이정민 기자 | 사진 김재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