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창간 25주년을 위해 작업한 ‘책가도195’. <행복> 과월호가 진열된 책장을 촬영했다. 프린트된 한지에 손바느질, 119×106cm, 2012
알몸뚱이 처녀처럼 표지가 벗겨진 책도, 한쪽 귀퉁이가 찢어진 책도, 햇빛이 갉아 먹어 누렇게 뜬 책도 모두 책장에 꽂혀 있다. 들쑥날쑥 책이 꽂힌 책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놈의 화상畵像이 글쎄, 날 닮았다! 책 사이사이에 놓인 잡동사니하며 마구 나뒹구는 연애 소설과 시집하며 이 책장은 나의 삶 속 지층이, 나란 인간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는 것만 같다.
<행복> 9월호 표지 작품 ‘책가도 045’를 들여다보시라. 한국 사진계의 산증인 사진가 홍순태 선생의 서재다. 전국 구석구석을 누비며, 오지 여행가로 일찌감치 여러 나라를 기행하며 사진에 담아온 노 사진가의 서재엔 카메라가 주인공처럼 놓여 있고, 여행의 산물이 명당 자리를 꿰차고 있다. 그 사이사이에 놓인 선생의 소박한 책들. “누군가의 서재를 찍기 시작하면서 저는 그 책장이 그 사람의 얼굴일 수 있겠다란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책장을 찍을 땐 그분의 포트레이트를 찍듯 하죠. 그런데 누군가의 얼굴을 찍을 때 그 사람을 좀 알고 찍어야 사진이 제대로 나오잖아요. 책장도 그 주인과 대화를 좀 나눠보고 교감이 생겨야 잘 찍을 수 있겠더라고요. 소설가 김훈 선생, 시인 김용택 선생, 추리 소설의 대부 김성종 선생, 문학 평론가 김윤식 선생 등 수많은 인사의 서재를 촬영했는데, 그들을 만나며 저는 사진 이상의 것을 얻었어요. 그 어른들의 깊이 있는 이야기들, 그러면서도 쉽게 이해되는 이야기들, 그 앎이 자신의 삶에 그리고 마음에 배어 있기에 듣는 이를 쏙 빠져들게 하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었죠. 김윤식 선생이 제게 처음 꺼낸 말은 ‘서재는 묘지요, 나는 묘지를 지키는 묘지기요. 내가 하는 말이 아니고 사르트르가 그리 말했소’였어요. 책이란 죽은 사람들이 뱉어놓고 간 이야기를 담은 묘지이고, 서재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다 묘지기라는 이야기잖아요. 이거 얼마나 멋 집니까?” 이렇게 임수식 씨는 유명 인사들의 서재 한 귀퉁이에 나붓이 앉아 그들의 삶과 철학을 엿보고, 그걸 사진에 담아낸 것이다.
조각보 닮은 서재 사진 그의 서재 사진은 한 폭의 회화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사진을 한지에 인화하고 조각보처럼 꿰매 완성한다. “제가 한동안 조선 후기의 책가도에 몰입했었어요. 내가 찍은 서재 사진도 좀 더 한국적으로,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란 생각에 표현 방법을 골똘히 연구했죠. 그러던 중 어릴 때 외갓집 문풍지 문의 정형화되지 않은 멋이 떠 올랐어요. 잘 찢어지지도 않고 보존성도 좋은 데다, 한지에 사진을 프린트하면 잉크를 먹고 살짝 번지는 느낌이 기막히더군요. 그리고 사진을 왜 꿰매게 됐느냐면 책장은 빈칸들이 모인 형태인데 사람들이 한 권, 두 권 꽂으면서 제대로 된 얼굴이 생겨나잖아요. 자투리 천들이 모여 완성되는 멋진 조각보와 한배에서 나온 것처럼 닮지 않았나요? 한 가지 덧붙이면, 저는 작품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에너지를 쏟으면 그 작품은 배신하지 않을 거다, 분명히 더 아름다워질 거다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또 이렇게 꿰매고 노동하는 수고스러움이 제겐 치유의 시간이었어요.” 자분자분한 설명을 들으니 그의 사진은 들여다볼수록 보는 재미, 읽는 재미가 크다.
(왼쪽) ‘책가도018’, Hand Stitch with Pigment Ink on Hanji, 60×43cm, 2008
행복이 가득하도다 그는 <행복>의 창간 25주년을 축하하며 ‘책가도195’라는 작품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문신한 제 이름 <행복이 가득한집>을 번쩍이며 서가에 도열한 이 잡지를 촬영하고, 원앙·목어 같은 오브제를 사이사이에 배치했다. “결혼하고, 아이들 낳고, 돈 많이 벌고, 건강하게 사는 것. 이 정도를 우린 지금의 행복이라 느끼잖아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의미를 총집합시키고 거기서 의미를 찾아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상상했죠. 책장에 <행복이가득 한집>이 가득 꽂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에너지인가요. 행복이라는 코드의 텍스트로 가득 들어찬 책장이니, 행복 에너지로 가득한 책장인 거죠. 민화처럼 구복求福이 바탕이 된 작품인 거죠.”
우리는 <행복>이 인생의 귀한 순간을 글과 그림으로 읽으며 스스로를 가장 고맙고 귀한 존재로 여기도록 만들어준 지혜의 기록이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뜻을 닮은 임수식 작가의 귀한 선물, <행복> 독자와도 함께 나누고 싶다. 그의 이야기처럼 여러분은 매달 책벌레처럼 한 권의 또 다른 <행복>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쁨을 누리시길! 꿀처럼 침 묻혀가며 그 안에 가득 찬 행복의 에너지를 한 움큼씩 그러 모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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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식 씨는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7년 <수필隨筆>전을 시작으로, <책가도冊架圖> <바벨의 도서관> 등의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그의 작품은 독일의 라이너 쿤체Riner Kunze 박물관, 한국의 북촌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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