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표지가 궁금해요] 화가 신철 씨 순수여, 내게 오렴


어제의 힘 미루나무 가지 하나 꺾어 호드기 만들어 불다, 보리밭 고랑에 누워 아늑한 하늘 끝 바라보다 오소소 잠이 쏟아져 내렸다. 하늘은 기적인 양 매우 푸르렀고, 바람은 솨아아 솨아아 불어댔다. 생각만 해도 뭉클한 이 그리움은 병이다. 향수병鄕愁病. 외래어 좋아하는 이들은 ‘노스탤지어’라고도 한다. 삶을 한 번쯤 되물릴 수 있는 그곳,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이도, 서울이 고향이지만 열없이 어딘가로 돌아가고픈 이도 7월호 표지 작품 ‘기억풀이_청산도 1’을 찬찬히 들여다보시길. 그리고 노스탤지어의 그 뭉뚝한 칼끝에 찔려보시길.

야트막한 산에 안긴 납작한 집, 할머니의 청색 치마폭 같은 하늘, 집 앞을 지키는 나무 한 그루…. 표지 작품 속 장면은 자꾸만 우리 마음을 과거로 과거로 데려간다. “1960년대 청산도에서 나고 자란 내게 남아 있는 기억이죠. 하늘인지 바다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파란 하늘, 조상들이 내려준 기름진 황토의 붉은빛(그냥 ‘붉다’라는 표현으론 부족한 황토의 붉은빛), 자동차도 한 대 없는 그 섬에서 가끔 하늘 위로 지나가던 비행기….

그 아름다운 유년의 기억을, 넋을 보존하고 싶어요. 슬픔과 외로움 대신 아련함을 가득 안은 기억으로. 나는 귀중한 것을 얻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귀중한 것을 보존하기 위해 그립니다.” 어쩌면 우리는 어제라는 흔적 덕분에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오늘과 내일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어제의 힘, 그는 그 이야기를 그림에 담았다.

“내 그림에 여자아이가 많이 등장합니다. 우리의 누이죠. 남동생 학비를 위해 제 청춘을 몽땅 저당 잡힌 채 논둑에 앉아, 방직 공장 미싱 앞에 앉아 육자배기처럼 구슬픈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누이들. 내 그림 속에서만이라도 그 누이들을 축복해주고 싶어 멋진 옷 입히고, 꽃 아래 서게 했죠. 그렇게 그들에게 박수 쳐주고 싶었어요.” 맵시 나는 원피스 입었지만, 톱 모델처럼 세련된 헤어스타일을 했지만, 그 여자아이는 이렇게 닦아내기 힘든 추억으로 우리 가슴에 온다.

“내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착해지고 순수해졌으면 좋겠어요. 내 그림을 좀 비웃기도 했으면 싶고요. 어떻게 이렇게 서툴게 그릴까 하고. 그런 그림이 되고 싶어 수없이 칠하고 지우며 시간을 쌓아요. 최대한 어수룩하게, 가장 순수하게 붓질하려고 애쓰죠.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면서 순수라는 본성을 그리워하길 바라면서.” 30년 넘게 그려온 그는 하루하루 더 어수룩해지려 애쓰는 중이다. 어린아이의 서툰 그림처럼 보이게 하기, 군더더기 없애기, 조금 설명하지만, 그래서 더 많이 설명하기. 동화가 그런 것처럼 그의 그림도 그 안에 담긴 착한 이야기를 들여다보려면 마음에 적당히 뜸이 들어야 한다.


‘기억풀이_노스탤지어’, 70×140cm,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2011

순수의 가슴 열고 30년 넘게 그리고도 빈 캔버스 앞에만 서면 설레는 60대의 신철 씨. 가난한 섬 출신으로, 화실 한번 변변히 다니지 못해 가장 서툴게 그리는 미대생으로, 20여 년 동안 교사로 살면서 그를 키운 팔 할의 힘은 ‘열등의식’이라 했다. “남은 날 사랑하지 않지만 나라도 날 어루만져줘야 할 것 같았어요. 내게 상을 주고 싶고, 격려해주고 싶어서 줄기차게 그렸죠. 그래서 지금까지도 계속 그릴 수 있는 것 같아요. 나보다 훨씬 잘 그리던 친구들 중 지금 그림 그리는 이가 하나도 없어요.” 늘 너털웃음을 짓는 사람, 겸손한 사람, 후덕한 인품의 사람이라 칭찬받지만, 그의 그림을 보는 이로 하여금 늘 가슴에 벌겋게 꽃피게 하는 화가지만 그에게도 그늘이 있다. “빈 캔버스를 대할 때는 한겨울 들판에 혼자 서 있는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나는 완충지대에서, 피할 수 있는 변명만을 생각하며 빈 캔버스에 마누라 살점을 뚝뚝 붙이며 살았다.” 친구인 소설가 양귀자 씨가 신철 씨의 작업 노트에서 훔쳐 읽고 쓴 글에 이같은 구절이 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청신한 그림에서 이상하게도 쓸쓸함과 아련함이 함께 느껴지는 까닭이 여기 있었나 보다.

7월, 온갖 협잡과 오욕으로 만신창이 된 이곳을 잠시 떠나 꽃들 만발한 그의 그림 속에서 벙싯거리고 싶다. 우리도 그의 그림처럼 풋내에 즐거워할 줄 아는 순수한 영혼이면 좋겠다. 바알갛게 순수의 가슴 열고, 수줍은 듯 살며시 옷자락 당겨 얼굴 묻고 서서. 순수여, 첫사랑처럼 내 곁으로 바짝 오렴.

신철 씨는 원광대학교 미술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24회의 개인전과 5백여 회의 단체전을 열었으며,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과 운영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양평군 서종면의 숲 속 작업실에서 인간성 회복과 원초적 삶의 근원을 시적으로 풀이하는 그림에 몰두하고 있다.
글 최혜경 기자 | 사진 이경옥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