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곽인식, ‘Work 82H’, 100×100cm, 종이에 채색, 1982.
2 곽덕준, ‘무의미 9382’, 130×162cm, acrylic color, 1993.
3 마리 로랑생, ‘머리에 리본을 맨 소녀’, 46×38cm, oil on canvas, 1930년대.
4 브루스 스틸멘, ‘Kinetic art’, 25×25×154cm, steel, 1989.
5 이우환, ‘From point No202’, 128.5×161.8cm, oil on canvas, 1974.
*다섯 작품 모두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인생은 각운에서 힘을 줘 읽어야 하는 시인지도 모릅니다. 첫낯의 우리에게 다감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는 그의 눈그늘을 보며 생각합니다. 저렇게 아름다운 눈그늘은 노년을 제대로 갈무리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방방곡곡의 공공 미술관에 미술품 7천5백여 점을 기부한(금액으로 따지면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대 추정), 그야말로 ‘문화 기부의 달인’ 하정웅 선생은 그렇게 소박하고 다감한 눈그늘로 다가왔습니다.
광주시립미술관에 2천2백22점의 미술품을 기증하고 지역 청년 작가를 후원한 그를 기려 광주광역시에서는 하정웅 명예 도로를 만든답니다. 미술품 4백47점을 기증한 부산시립미술관에서는 그의 초상 조각을 영구 전시하고 있습니다. 영친왕과 영친왕 비의 사진, 서신류 등 유품 6백10점을 그가 문화재청에 기증하자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하정웅 기증전-순종 황제의 서북 순행과 영친왕ㆍ왕비의 일생> 특별전을 열기도 했지요. 아버지의 고향인 영암에 기증한 2천5백여 점의 미술 작품이 개관의 모태가 되어 그의 성姓을 넣어 명명한 ‘영암군립河미술관’도 있다는군요. 이 밖에도 그동안 포항시립미술관ㆍ조선대미술관ㆍ대전시립미술관ㆍ전북도립미술관 등에 미술품 수천 점을 기증했고, 해방기 무용가 최승희 씨와 관련된 자료 6백90여 점을 숙명여대에 기증한 이 사람, 대체 누구입니까? 우리 문화사에 닦기 힘든 흔적 하나 만든 이 사람, 누구입니까?
결핍, 내 삶의 엔진 그를 알려면 그의 세월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세상의 아홉 굽이 인생이 다 그렇듯 이 영광스러운 인생 뒤에도 쓰디쓴 세월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본 오사카에서 이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네 명의 동생을 건사해야 하는 짠 내 나는 현실에 갇혀 살았습니다. 낮에는 일당 2백60엔을 받는 전기 회사의 직원으로 살며(명문인 아키타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졸업생 중 유일하게 취업을 하지 못했다. 취직 시험을 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아 혼자 힘으로 전기 회사에 들어갔다), 밤에는 디자인 스쿨에서 인간 공학 디자인을 배웠습니다. “원래 꿈은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재일 교포는 대학도 못 가고 법으로 외국인은 학교 교사도 못 하게 해서 그 꿈은 접었어요. 화가의 꿈도 있었지만 어머니가 ‘미쳤구나. 그림을 그려서 어떻게 밥을 먹고 사니?’ 하며 말리셔서 그것도 접었어요. 제 힘으로 직장에 들어가서도 사람들이 나를 고작 일당 2백60엔에 썼는데, 나는 그런 가치밖에 없는 사람이 아니니 당연히 내 가치를 올리는 일을 해야지요. 그래서 디자인 스쿨에 들어간 겁니다. 일당 2백60엔이니까 한 달이면 6천5백 엔밖에 못 벌어요. 교통비, 가족들 생활비에다 한 달에 수업료로 3천 엔을 내야 하니까 밥을 제대로 못 먹었어요. 그러다 영양실조가 되어 어느 날 눈이 안 보이는 겁니다. 그 때가 열아홉 살이었어요.” 절치부심의 시간을 보내며 시력은 돌아왔습니다. 이후 닥치는 대로 일해 모은 돈으로 ‘전기 점방(전기 제품 대리점)’을 차렸는데, 일본에서 컬러 TV가 생산되기 시작한 때라 큰돈을 벌 수 있었다지요. 그사이 결혼해 아이들도 얻었습니다. 청춘을 로열티로 바치며 맹렬히 산 이 사나이의 행진은 그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그에게 ‘너는 이 구석에서 썩기 아깝다’며 누군가 뒤를 밀어주는 그런 드라마는 없었습니다. 오직 역경과 결핍이 그 인생의 터빈 엔진이었습니다. 결핍이 오히려 삶의 에너지가 된다니 인생은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니 어떤 절실함도, 어둠도, 아픔도 없이 청춘을 보낸 사람은 인생의 맛을 모르는 법이라고 중뿔나게 쓰고 싶습니다.
컬렉션을 시작하다 그가 보여주는 삶의 밀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전기 점방을 해서 모은 돈으로 부동산 임대를 시작한 그의 사업은 불처럼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자수성가한 그는 우연히 전화황이라는 재일 교포 화가의 그림을 만났고, 미술품 수집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대동아전쟁과 일제시대를 겪으면서 우린 너무 고생했잖아요. 전화황 선생의 그림 속 미륵보살님처럼 기도를 올려서 우리가 편안해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 그림을 사버렸어요. 다른 그림도 보려고 전화황 선생 집에 갔는데 아틀리에에 비가 새서 그림이 전부 비 맞고 곰팡이가 핀 거예요. 전부 우리 재일 교포 삶의 고뇌를 그린 그림인데, 바로 우리 삶의 역사인데 비 맞고 있었지요. 내가 구제해야겠다 결심하고 몽땅 구입해 왔어요. 그게 컬렉션의 출발이에요.” 그때부터 그는 시대의 파편을 맞아 쓰린 삶을 사는 동포 화가들의 그림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강제징용된 조선인, 차별과 핍박받는 재일 교포는 내 삶의 역사요, 잊어버릴 수도, 잊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재일 교포 2세로서 또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이 아픈 역사와 민족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굴곡진 역사를 견디며 귀한 예술혼을 피운 동시대 화가들의 작품을 사들여 그들을 경제적으로 돕고 싶다. 그 작품을 고국에 기증하는 것으로 그들의 한, 우리의 한을 풀어주고 싶다’. 이렇게 거룩한 뜻에서 시작한 컬렉션입니다. “이 그림 사면 돈 벌 수 있겠다, 우리 집에 붙여놓고 즐기고 자랑해야겠다 생각하고 모은 적이 없어요. 미술품에는 그 시대의 기억, 역사가 숨어 있어요. 개인 소유물이 아니라 인류가 공유해야 할 교과서 같은 것이에요. 그래서 내 컬렉션은 역사적 사명을 갖고 있는 컬렉션이에요.” 그에게는 ‘미술품 컬렉터’라는 이름 대신 ‘기억의 컬렉터’라는 이름을 붙여줘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이우환, 이방자, 최승희 선생과의 인연 그와 이우환 선생의 인연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1980년대 초 미스즈 출판사의 <미즈에>라는 책에서 이우환 씨 특집 기사를 냈어요. 그 책을 보고 이우환 씨가 대단한 작가라는 것을 알았어요. ‘선으로부터’라는 작품인데, 동양적 멋이 흐르면서도 구도 자체는 서양적이고, 또 디자인적이고…. 그런 감 각을 어디서도 못 봤어요. 회화 말고도 철판 위에 돌을 놓은 작품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어요. 제 고향 아키타에는 광산이 많아 징용으로 온 조선인도 많았어요. 그들이 사고나 병으로 죽으면 무연고 무덤에 묻혀요. 무연고자이니 무덤 위에 돌 하나 얹는 걸로 끝나요. 명절이 되면 어머니는 꼭 음식을 제 손에 들려 무연고 무덤에 놔두고 오게 했어요. 나중에 이우환 씨의 돌 작품을 보니 그 무연고 무덤이 떠올랐어요. 물론 이우환 씨 작품에 이런 의미가 담긴 건 아니겠지만 내게는 이런 뜻으로 다가왔어요. 그래서 미스즈 출판사에 전화해 이우환 씨 기사가 실린 책의 재고 5백 권을 몽땅 샀어요. 이렇게 훌륭한 작가가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 일본의 미술 관계자들에게 책을 보냈어요. 몇 년 후 도쿄에서 세계예술인대회가 열릴 때 이우환 씨를 처음 만났는데,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이렇게 세 나라에서 전람회를 하자고 오더가 왔는데 경비가 없다. 도와줄 수 없느냐’ 했어요. 그 당시 이우환 씨는 부인이 요구르트 배달하고, 봉투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힘들 때예요. 필요하다는 경비 5백만 엔을 드렸지요. ‘그 돈만큼 선생님이 알아서 내게 작품을 주세요’ 그랬더니 그 돈값으로 열세 점, 일전에 내가 <미즈에> 20권을 보내준 감사로 한 점, 이렇게 열네 점을 보냈더라고요(이우환 씨의 작품 열네 점은 나중에 전부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그 이우환 작가는 지금 현대미술의 세계적 거장이 되었습니다.
“내가 모든 재일 교포 화가를 도운 건 아니에요. 나와 인연이 있어야 도와줄 수도 있지, 인연도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그런 힘이 어디 있나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죠. 그 말은 지나는 길에 옷깃이 스칠 수 있도록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사이여야 관계도 만들어진다는 얘기겠지요. 하정웅 선생은 성긴 그물코처럼 얽힌 인연도, 단단히 묶인 인연도 소중히 보듬었습니다. 영친왕 비인 이방자 여사와의 인연도 각별합니다. “이방자 여사님이 바자회를 열어서 장애인 복지사업을 하고 있다는 신문 기사가 일본에서도 많이 났어요. 1974년 내가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 나도 이방자 여사님을 도와드려야겠다 생각하고 낙선재에 갔어요. 그날 마침 낙선재에서 미술품 바자회를 하고 있었어요. 왕비인데도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섞여 바자회를 여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어요. 그게 인연이 되어 이방자 여사님이 바자회를 일본에서 열 때 도와드렸어요. 일본에서 바자회 열 때 도와주는 회사의 야마구치라는 사장하고도 친해졌어요. 나중에 이방자 여사님 돌아가시고 야마구치 상이 전화를 해서 자신이 신변을 정리하고 있다고, 이방자 여사님 유품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 사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몽땅 사들였어요. 곰팡이 냄새 나는 오래된 포장지에 쌓인 유품에는 영친왕의 수첩, 영친왕 비의 일기, 영친왕 부부의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를 모두 담은 사진 1백여 점, 순종 황제의 한반도 서북 지역 순행을 찍은 사진첩 등이 있었어요. 놀랍고 흥분됐습니다. 완전히 홀렸어요. 역사적인 물 훌륭한 남자 옆에는 그보다 더 훌륭한 아내가 있다. 막대한 금액의 미술품을 대한민국에 쾌척하는 남편, “하루에 세 끼 먹지, 네 끼 못 먹는다”라는 말로 설득하는 남편을 아내는 묵묵히 따랐다. 재산가의 아내임에도 그녀는 평생 가사 도우미 한 번 부르지 않고 살뜰히 살림을 건사했다. 283건이잖아요.그걸 모두 주일본 한국대사관에 기증했고, 문화재청에서 받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된 거예요.” 한 사람은 정략결혼에 의해 조선의 왕비가 된 일본인, 또 한 사람은 일본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한국인입니다. 이들도 인연이라는 그물코에 걸려버린 겁니다. 어릴 때 우연히 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공연을 보고, 최승희 선생의 팬인 소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말씀에 감동한 그가 중앙대 정병호 교수의 최승희 관련 소장품을 사들여 숙명여대에 기증한 것도 이 인연이라는 것 때문이지요.
“몽땅 수집해서 몽땅 기부하니 마음이 시원해요” 사업이 계속 번창하면서 소장품이 쌓여갔고 처음에 그는 그 컬렉션으로 미술관을 만들려고 했답니다. 징용당해 타국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무연고자, 힘들게 사는 재일 교포를 미술품으로 위로하는 ‘기도의 미술관’. 그 미술관을 짓기 위해 아키타 현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강제 징용자와 원폭 피해자 등에 대한 배상 문제로 두 나라의 관계가 껄끄러워지면서 무산되었다는군요. 그는 대신 고국의 공공 미술관에 기증하기로 마음을 먹었답니다. “미술 작품은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뭔가 행복한 세계를 가지고 있잖아요. 작품을 보면서 나 혼자만 좋다고 느끼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이 같이 이렇게 행복한 마음을 공유하는 것이 진짜 기쁨이에요. 작품을 가지고 있으면 큰돈이 되겠지만 사람이 하루에 세 끼 먹지 네 끼, 다섯 끼 못 먹어요. 옛날에 우리 가족이 힘들게 살 때에 비하면 지금은 세 끼 먹고 살 만큼은 가졌으니까, 자식들도 ‘아버지가 번 돈이니 아버지가 깨끗이 쓰세요’ 하니까 몽땅 기부할 수 있는 거예요. 정말로 몽땅 수집하고 몽땅 기부했습니다. 깨끗하게. 아주 마음이 시원해요.” 그가 기증한 작품 중에는 전화황ㆍ곽인식ㆍ이우환ㆍ곽덕준 등 재일 작가의 작품, 김창열ㆍ박서보 등 한국 대표 작가의 작품, 피카소ㆍ샤갈ㆍ달리ㆍ앤디 워홀 등 해외 유명 작가의 작품이 포함돼 있습니다. 미술 작품 기증 외에도 그는 지역 청년 작가를 후원하고, 시각장애인 복지관 설립을 도왔습니다. 광주비엔날레에 대한 애정도 각별해 조직위원회 해외명예위원, 전시기획위원 등을 거치며 사비로 일본 주요 언론과 큐레이터를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내 주요 기관에 비엔날레 홍보물을 배포하기도 했다는군요.
촘촘한 밀도로 삶을 산 하정웅 선생의 인생을 설명하려니, 이거 위인의 일대기처럼 되어버린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이 필적할 수 없는 사람임이 분명한걸요. 이루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일을 이뤄내는 것, 인생이란 바로 그런 과정의 연속임을 자신의 삶으로 연설해준 그 앞에, 용기와 열기로 그러모은 것을 더 큰 뜻을 위해 몽땅 비워내는 그 인생 앞에 마음과 무릎이 꺾입니다. 일흔세 살 하정웅 선생의 그 아름다운 눈그늘은 필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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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남자 옆에는 그보다 더 훌륭한 아내가 있다. 막대한 금액의 미술품을 대한민국에 쾌척하는 남편, “하루에 세 끼 먹지, 네 끼 못 먹는다”라는 말로 설득하는 남편을 아내는 묵묵히 따랐다. 재산가의 아내임에도 그녀는 평생 가사 도우미 한 번 부르지 않고 살뜰히 살림을 건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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