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날콩처럼 배릿하고도 구수한 풀 냄새. 그 속에서 초여름 기운을 이기지 못한 소쩍새가 한 목청 실어냅니다. 그 풍경 안으로 그가 불쑥 끼어듭니다. 참기름 바른 차돌 같은 몸씨, 순정한 악동의 그것 같기도 한 표정이 눈에 듭니다. 풀숲에 누워 소쩍새처럼 한 목청 실어 웃는 그를 보며 시 ‘꽃이 피고 새가 울면’을 입안에서 돌돌거립니다.
“푸른 강을 지나며 매화꽃이 피었다가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략)/ 산에서 산벚꽃이 하얗게 날려오는 꿈 때문에 홀로 일어나 어둔 산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진달래꽃 핀 것을 보았지만 진 지는 몰랐습니다./ 봄맞이꽃이 피었다고 아이들이 달려와 이르데요. 가보진 못했답니다./ 산과 들이 빠르게 푸르러지더니/ 오동나무에 오동꽃이 피어나데요./ 산이 그렇게 혁혁한 공을 세우고/ 달빛이 방안까지 깊이 찾아들어 내 얼굴을 덮었습니다./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 생에 한 봄이 또 그렇게 갔어요.”(‘꽃이 피고 새가 울면’) 그도, 우리도 생에 한 봄을 또 그렇게 보내는 중입니다.
선생 이상은 돼본 적 없는 시인 뒤로는 울울한 산이 버티고 있고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르는 마을,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에서 그는 나고 자라고 결혼하고 아이 만들고 늙었습니다. 평생 한 집에 살며 교사라는 직職, 글쓰기라는 업業을 가졌습니다. 이 ‘이중생활’은 봄에서 여름으로, 겨울에서 봄으로 흐르듯 별다른 충돌 없이 흘러갔습니다. 그동안 그가 쓴 착한 시, 그러면서도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시. 고단한 일상을 살아내느라 많이 다친 우리 마음을 얼마나 위로해줬는지요. 그래서 그는 ‘섬진강 시인’ ‘국민 시인’이란 별칭을 얻었습니다.
손톱에 흙때 낀 농사꾼의 6남매 중 장남으로 나고 자란 그는 애초부터 ‘가진’ 게 별로 없는 사람이었답니다. <김용택의 어머니>를 읽다 명치 끝이 저려온 이야기, 해드릴까요. 공부한답시고 죽치고 앉아 있을 시간이 그에겐 없었답니다. 순창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농장학금을 융자받아 오리를 키우다 살림의 절반을 없앤 그는 도망치듯 서울로 떠났답니다.
“인생의 지독한 쓴맛을 뒤로한 채 고향을 떠나던 날, 나는 입을 옷도 운동화도 없었다. 돈은 물론 있을 리 없었다. (중략) 태산 같은 걱정을 앞세우고 강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어머님이었다. 어머님께서 강 길을 따라 뛰어오고 있었다. 어머님도 울고 계셨다. 어머님은 마른 풀잎처럼 서서 울고 있는 내 손에 무엇인가를 쥐여주었다. 참으로 까칠한 손이었다. 가시덤불 같은 손으로 내 손에 2천 원을 쥐여주시며 어머님은 눈물 바람으로 ‘용택아, 어디 가든지 밥 잘 먹고 건강혀야 한다. 꼭 편지하고, 알았쟈’ 하셨다.”(<김용택의 어머니> 중)
친척 집 돌아가며 밥 얻어먹고 지내다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 그는 친구 따라 교사 임용 시험을 쳤고, 자신이 졸업한 덕치초등학교 선생이 됐습니다. 오전 수업을 하고 나면 딱히 할 일이 없어 월부 책 팔러 다니는 이에게서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구해 본 게 문학과의 첫 만남이었답니다. “책을 읽을수록 머리가 복잡해져부러요. 자꾸 생각이 커져. 이런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으니 생각나는 대로 일기나 편지, 쪽지를 썼어요. 어느 날 보니 내가 시를 쓰고 있어요. 이게 시냐고 물어볼 데도 없고, 그냥 써지는 대로 뒀어. 완성도가 좀 있다고 생각하는 시를 골라 잡지사에 보냈더니 시집에 실어주겠다고 하데.” 부황 나는 가난과 외로움에서, 태엽 풀린 시곗바늘 같은 일상에서 그를 잡아준 건 시였답니다.
“동무들이 다 도시로 떠나고 홀로 지내는 겨울밤, 내가 제일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마른 감잎과 마른 지푸라기가 밤바람에 끌려가는 소리였다. 바람에 뒹구는 감잎 소리는 그야말로 홀로 사는 사람의 애간장을 긁기에 충분했다. 강 건너 앞산 상수리나무에 달린 마른 잎이 바람에 수런거리는 소리와 감잎 뒹구는 소리를 견디기 위해 나는 시를 썼는지도 모른다.”(<김용택의 어머니> 중)
태양전지에 플러그 꽂은 것처럼 쏟아낸 시는 <섬진강><맑은 날><나무> 등으로 묶였고, 이내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도 받았습니다. 아, 올봄에는 윤동주문학대상도 수상했습니다.
여든다섯 살의 어머니와 예순다섯 살의 아들이 손잡고 걷는다. 아름답고 슬프다.
“내 삶만큼만 쓴 시” 대학에서 문학을 배운 적도, 문단과 교류하며 영향을 받은 적도 없는 그의 시는 다른 시인들과 구분되는 독특한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가 그 시를 쓰기 위해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상관없이, 그의 시는 재미있고 쉽습니다. 그다음에 아름답고 슬프고. 사람은 슬퍼야 세상을 더 제대로 볼 수 있는 법이잖아요. “나는 늘 시를 내 삶만큼만 씁니다. 글이고 뭣이고 간에 모든 것이 삶에서 나오잖아. 내 모든 글은 이 작은 마을에서 나왔어요. 이 마을에서 들리는 자연의 소리를 옮겨 적으면 그대로 시가 되야부렀어요. 쓰는 게 아니라 써집디다. 그러니까 ‘쓴 시’가 아니라 ‘쓰여진 시’라고 해야지.” 그는 숲, 바람, 나무의 이야기 그리고 거기에 어울려 살아가는 농부의 이야기를 ‘옮겨 적었습니다’. 마냥 아름다움만 있는 게 아니라 그 흙에 한 묻고 사는 농부들의 이야기도 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제대로 ‘촌’스럽습니다. 아름답고도 슬픕니다.
그리고 그 시에는 평생 함께 산 아이들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생 이상은 돼본 적 없이 산’ 그의 시에 아이들 이야기가 빠질 리 있나요. “한 학교에 오래 있다 보니 아버지도, 아들도 내가 가르쳤어요. 그런데 깜빡 이름을 헷갈려부러. ‘택수야, 인마!’ 하면 ‘우리 아버지 이름인디’ 해. 내가 초등학교 2학년만 26년 가르쳤는데, 그 아이들이 내게 준 게 많아요. 세상을 늘 새로운 눈으로 보는 신비함이 2학년생에게 있어. 늘 신나고, 늘 의구심이 들고, 늘 기대가 있고…. 세상 모든 것을 자기 걸로 만들 줄 알아요. 어느 날 한 놈이 통유리를 깨서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 ‘깨지는가 안 깨지는가 보려고 머리로 들어받았는디’ 그래요. 진지하게 궁금한 것이 많기 때문에 진실합니다. 2학년 아이들이 달리는 걸 보고 있으면 한편 외로워 보이고 한편으로 진지해요. 그 아이들은 아무것도 가진 거 없어도 살맛 나게, 행복하게 살 줄 알아요. 그게 좋아서 2학년을 오래 가르치며, 아니 그놈들에게 배우며 살았어요.”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내 그의 얼굴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산과 들과 바람을 안아 빨갛게 상기된 초등학교 2학년짜리 얼굴이 보입니다.
자, 이쯤에서 그가 펴낸 동시집 <할머니의 힘>을 읊어볼까요? 도시에서 살다 시골 할머니 댁에 맡겨진 아이의 노래입니다. 웃고 또 우실 준비!
“우리 집은/ 대문이 없다./ 밥 먹는 것/ 길에서도 다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 불러/ “어이, 밥 좀 묵고 가.”/ “나 밥 묵었는디.”/ 밥 먹었으면/ 그냥 가면 되지/ 들어와 앉아/ 밥 먹는다./ 똘방에 금세 고무신이/ 까마귀 떼다.”(‘밥’) “유선전화 때는/ 야야야, 전화세 많이 나온다./ 얼른 끊으시더니/ 무선전화로는/ 시시콜콜 동네 소식 다 전하시며/ 전화 끊으실 줄 모른다./ 어느 날/ 할머니, 이거 전화세 많이 나오거든요./ 그랬더니,/ 야야, 전깃줄도 없는디/ 지까짓 것들이 어치고 알겄냐./ 전화 끊으실 줄 모른다.”(‘전화’) “할머니는 울 힘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울 때도 눈물 없이 운다./ 할머니는 이제 죽을 힘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나랑 산다.”(‘할머니의 힘’) “오늘 저녁 할머니 혼자 자겠지./ 텔레비전 틀어놓고 혼자 자겠지.”(‘수학여행’)
진메마을의 이 집에서 그는 나고 자라고, 시를 썼다. 동네 한가운데, 대문도 없는 이 집에선 늘 “어이, 밥 좀 묵고 가”란 말이 담장을 넘었다.
내 시의 원래 주인, 어머니 그리고 그의 시에는 늘 어머니가 있습니다. “어머니 박덕성 여사님은 학교를 다닌 적도, 책을 읽어 교양을 쌓은 적도 없는데 말씀을 들어보면 기가 막힙니다. ‘꽃만 저렇게 하야다 지면 뭐 헌다냐. 꽃도 사람이 있어야 꽃이다’ 하셔요. ‘야야, 꾀꼬리 울음소리 듣고 참깨 싹이 나온단다. 보리타작하는 도리깨 소리 듣고 토란이 난단다’ 하시는데 내가 무릎을 탁 쳤어요. 그 아름다운 꾀꼬리 소리를 들어야 참깨가 싹을 틔운다는 건데, 이게 바로 시잖아요. 참깨 싹은 움쑥움숙 잘 나는데 토란은 잘 안 나요.
그러니까 도리깨로 탕탕 때려야 그 소리에 깜짝 놀라서 토란이 난다는 거예요. 이게 예술이고, 과학이지 뭐야. 그 말을 옆에서 같이 들은 시인 신경림 선생님도 ‘용택이 니가 시인이 아니고, 너그 어머니가 시인이구만’ 하시데. 어머니는 그런 기막힌 이야기를 숱하게 하셨어요. ‘하따나, 저 새 잎 피는 것 좀 봐라, 꽃보다 더 이쁘다인’ ‘하이고, 눈이 곱게도 오신다’며 세월을 정리하신 분이에요. 어머니의 말을 받아 적으면 그대로 시가 되니, 내 시의 원주인은 어머니인거지. 공부를 안 했다는 거 자체가 어머니를 저렇게 순수하게, 자연처럼 만들어준 거 같아요. 어머니는 나무하고, 곡식하고 똑같아요. 자연과 한 몸이 될 때라야 저 걸음걸이와 저 몸이 나오는 거지, 저 호미질이 나오는 거지. 힘 하나도 안 들이고 호미질하고 괭이질하고. 그리고 부지런함과 야무짐, 총명함과 사람들을 향한 마음 씀씀이가 자연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언젠가 한번은 집에 보일러가 고장 났는데 시공자가 ‘에야’를 빼내야 한다며 호스로 뜨거운 물을 마당에 쏟아부렀어. 근데 어머니가 옆에서 조용조용 ‘눈 감아라, 눈 감아라’ 하셔. 그 모습이 너무 엄숙해요. 나중에야 까닭을 물으니 뜨거운 물이 땅속 벌레들 눈에 닿으면 눈이 머니까 벌레들에게 눈 감으라고 일러준 거래요. 이런 마음이 자연 아니고 뭣이겄어요? ‘많이 묵어야 좋간디?’ 하며 이웃이든, 거지든 거둬 먹이는 마음이 자연 아니고 뭣이겄어요?” 이 훈기 가득한 이야기에 시간이 잠시 공기 속에 멈춥니다.
예순다섯의 아들이 여든다섯의 어머니를 인터뷰한 글을 읽어보실까요? “‘어머니는 인생을 잘 살았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 빼면 난 참 잘 살았지. 난 아버지를 좋아했단다. 지금도 생각하면 좋단다. 아버지한테 반해서 살았지. 그렇게 무뚝뚝하고 바람을 피웠어도 나는 아버지가 좋았단다. 아버지 좋아하면서 산 게 제일 좋았다.”(<김용택의 어머니> 중) 이 글도 읽으셔야 합니다.
“간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8년 동안 다슬기를 직접 잡아 다슬기 국을 끓이셨다. (중략) 그 첫 마음이 변하지 않은 행복한 여자가 바로 우리 어머님이 아닌가 한다. 아버님에 대한 그 변함없는 사랑 위에 인간에 대한 예의를 다하신 것 같았다.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어머님은 다슬기 국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중략)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님과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랑 사니라고 애많이 썼구만. 사는 일이 금방이네. 사는 것이 바람 같은 것이여. 사는 일이 풀잎에 이는 바람이구만.”(<김용택의 어머니> 중) 그의 말대로 박덕성 여사님은 복 있는 인생입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해 여태까지 좋아하며 산다는 김용택 선생의 아내도 복된 인생입니다. 우린 이들처럼 행복한 인생일까요?
요즘 그는 귀 잡숴 말도 잘 못 알아듣는 어머니가, 달관을 잃고 별것 아닌 일에도 화를 키우시는 어머니가, 깜빡 기억을 놓으시는 어머니가 걱정입니다. “옛날엔 강 건너까지 펄펄 날아다니셨는데, 이제 마을 회관에만 계시다, 그러다 집 마루에만 있다가, 결국 방에만 있다가 돌아가시겠지. 나에게도 저런 시간이 그리 머지않았다는 불안함도 생겨요. 내년에 여기에 집을 새로 지어 어머니와 함께 살 생각이에요(몇 년 전 정년퇴직 후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한 해 수천 명의 사람들 때문에 집을 전주로 옮겼다).” 언젠가 한 움큼의 재로, 자연 속으로 돌아갈 어머니를, 역시 늙어가는 아들이 바라보며 쓴 글. “고향 마을 뒷산 오래된 당산나무처럼 어머니는 자연이다.(중략) 동쪽 나뭇가지가 죽고 서쪽 나뭇가지가 서서히 물관을 끓어가듯이 그렇게 삶을 마무리해간다. 어머니는 나무다.”(<김용택의 어머니> 중) 아들이 곰팡이 꽃진 어머니의 손을 잡고 고샅길을 걸어갑니다. 그들의 뒷모습에서 풋풋한 향기가 가실 줄 모릅니다.
자연 대신 인간을 보러 가라 진메마을에서의 하루는 짧았습니다. 좋은 때는 늘 짧듯이. 모성애의 가슴을 가진 시인과, 그를 낳은 천생 시인 박덕성 여사님과 한 여드레 보름 머물고 싶은데. 출국 수속하듯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건넵니다. “메마른 도시에서 멈추지 않은 신발을 신은 것처럼 사는 우리도 선생님처럼, 어머니처럼 제대로 촌村스럽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정년퇴직 후 강연 다니며 내가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자연을 보러 가지 마라, 인간이 자연이라는 걸 깨달아라. 저 나무보다 내가, 안식구가, 남편이, 아들딸이 더 아름다운 자연인데 왜 꼭 숲을 보러 가야 하냐. 그 대신 집에 모여 식구들 체험을 해봐라. 같이 라면도 끓여 먹고 <개콘>도 보고 <넝쿨째>도 보면서 뒹굴어라. 내가 어머니와 한 것처럼 인터뷰도 좀 해보고. 부부끼리 ‘애들은?’ ‘학원. 당신 밥은?’ ‘회식’ 세 마디 대신, 저 남편이 살면서 제일 좋았을 때가 언제인지도 좀 물어보고. 애들에겐 요즘 뭐가 제일 고민인지도 물 어봐라’. 이렇게 가족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맛을 보고 자란 애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행복을 꿈꿔요.” 결국 자연다워지는 길은 더 인간다워지는 것이었군요. 진메마을 뒷산에 부숭한 오후 햇살이 내려옵니다.
김용택 시인이 어머니의 인생을 복원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쓴 에세이집 <김용택의 어머니>. 이미 문단 안팎에서, 삶과 생명에 대한 혜안을 지닌 ‘문맹의 시인’으로 소문난 박덕성 여사의 빛나는 어록이 가득하다. 동시집 <할머니의 힘>에도 자식을 보듬고 길러내는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 귀 기울여 들어보니 촌村스럽게 사는 게 진짜 행복이구나 -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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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명의 시인이 산다는 대한민국에서 정작 1년에 시집 한 권 읽는 게 어렵지만, 그래도 ‘섬진강 시인’ 김용택 선생은 죄다 압니다. 38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아이들과 재미나게 놀며, 평생 빛 좋은 시골에 머물며 시를 써온 ‘국민 시인’. 그가 펴낸 에세이집 <김용택의 어머니>, 동시집 <할머니의 힘>에는 봄비처럼, 가을바람처럼 살아가는 어머니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