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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이재효 씨 자연을 탐하고 자연에 취하다
2m짜리 나무 공 10여 개가 매달려 있는 W 서울 워커힐, 63빌딩 앞 생명의 숲, 스위스 제네바 인터컨티넨탈 호텔의 나뭇가지 벽 오브제, 두바이 아트페어까지…. 조각가 이재효 씨는 전 세계를 섭렵한다. 경기도 양평 작업장에서는 끊임없이 망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새 단장한 전시장에는 공들여 만든 작품이 제자리를 찾았다. 옹이 박힌 손과 우직함으로 나무와 못, 돌을 변주하는 그가 세상에 들려주고픈 자연의 화음, 그리고 자연을 탐探하는 이유.

(왼쪽) 미세한 나뭇 가지를 놀라운 밀도로 응집한 작품 ‘밤송이’. 1992년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한 이재효 작가는 1998년 오사카 트리엔날레 조각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평단과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국내는 물론 도쿄, 베이징, 홍콩, 뉴욕, 런던, 파리 등 국외 다수의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고대하던 봄의 훈기가 느껴지는 3월 마지막 주, 조각가 이재효 씨의 전시가 열리는 성곡미술관을 찾았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여러 가닥의 줄에 묶어 발처럼 설치한 전시 공간에 들어서니 때아닌 가을 숲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찔릴 것처럼 날카로운 나뭇가지 뭉치는 한참을 바라보니 마치 솜방망이처럼 부드럽게 느껴진다. 비스듬히 잘라 높이를 다르게 세운 나뭇가지는 고요한 침엽수림 같기도, 성난 파도 같기도 하다. 돌, 낙엽, 잔가지나 빛바랜 나무둥치 같은 것을 한데 뭉쳐놓아 기묘한 기운을 뿜어내는 작품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본관 2층에 전시한 여러 소품이다. 목장갑으로 만든 토끼, 몽당연필 오브제, 웃고 있는 깡통 로봇 등 자그마한 작품부터 틈틈이 그린 아이디어 드로잉까지, 작가가 20년 동안 걸어온 과정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고물상에서 주워 온 고철에 발랄한 표정을 불어넣고 낡은 책은 거대한 산세를 담았으니, 그의 손을 거치면 수명을 다한 하찮은 물건도 완성도 높은 예술품이 된다. 두바이 왕자도 컬렉션하는 세계적 조각가의 진중한 작품과 사뭇 대비되는 이 유머러스함은 대체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졸업 후 15년 정도 작품을 한 번도 팔아본 적이 없었어요. 강남 지하상가나 고속터미널 상가의 소품 가게에 장식품을 만들어 납품하면서 생활비를 벌었지요.” ‘선물의 집’에서 ‘두바이 아트페어’까지, 이재효 작가의 ‘인생 역전’ 스토리가 궁금하지 않은가.


17년 전 양평에 터를 잡은 이재효 씨는 5백 평 규모의 부지에 작업장, 전시장, 살림집을 지었다. 주거 공간에는 과감한 레드 컬러로 포인트.

1
 쉬엄쉬엄 만든 테이블과 스툴. 나무를 깎아 오히 려 나무껍질을 형상화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2 영월 산골에 지을 자신의 큐빅 하우스 설계도. 
3 담장 아래 돌멩이에 익살스러운 표정을 그려 넣었다.

꼼꼼히 채워온 조각, 시간
그는 1992년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1998년 오사카 트리엔날레 조각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출발은 화려했지만 이후 2005년까지 단 한 점의 작품도 팔지 못하는 긴긴 무명 생활이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작가가 작품 팔아서 산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힘든 일이었다. 역시 조각을 전공한 아내 차종례 씨와 동료이자 동반자가 되어 마석 우사에서 양평 오두막집까지 가난도 즐거움으로 여기며 살던 시절. 기회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W 서울 워커힐에 근무하던 지인이 호텔 인테리어를 맡은 세계적 디자이너 토니 치Tony Chi를 소개했고, 디자이너는 트렌드를 가장 민감하게 반영한다는 호텔 로비의 천장에 이재효 작가의 나무 공 작품 10여 점을 매달았다. 갤러리보다 호텔에서 먼저 인정받은 작가, 너무 일찍 상업화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미술관에서 구입하면 바로 수장고로 들어가 작품이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몰라요. 반면 호텔은 365일 전시 중이잖아요. 대중에게 작품을 알리는 전시장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후 세계 유수의 호텔에서 그의 작품을 설치하길 원했고, 홍콩과 대만 등 아시아를 비롯해 미국, 영국, 스위스 등 세계 곳곳으로 작품이 팔려 나갔다. ‘밤송이’(그는 작품을 ‘밤송이’ ‘김’ ‘고드름’ 등 자신만의 애칭으로 부른다)를 설치한 스위스 제네바의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그는 VIP 대접을 받는다. “설치한 후 몇 년 지나 스위스 여행 중에 들러봤는데 호텔 벨보이가 저를 기억하더라고요. 금방 총지배인이 내려와서 반기고, 방값도 받지 않고 스위트룸을 내줬어요. ‘작품이 팔리니 좋네’라고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죠(웃음).”

4 거실 덱 앞에 놓은 나무 공 벤치. 은행 나무와 앞산을 보며 사색에 잠기는 공간이다.

집 짓는 조각가, 나무 깎는 건축가
그런 그가 집과 작업실을 지었다. 작업실보다는 미술관급의 전시장이라는 표현이 맞을 듯. 기존 작업실에서 100m 정도 올라간 윗산 언덕에 자리 잡은 집과 전시장은 커다란 은행나무와 앞뒤로 펼쳐진 둥근 산세가 백미다. 5백여 평의 넓은 부지에는 그와 아내의 전시장과 작업실, 살림집까지 다섯 개의 건물이 펼쳐진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이디어 구성부터 설계, 도면 작업까지 모두 이재효 씨가 직접 했다는 것이다. “조각하는 사람은 건축가 못지않게 공간 감각이 좋아요. 어떤 종류의 H빔이 어디에 들어가야 하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죠.”

숨 막히게 큰 그의 작품처럼 압도적인 규모의 전시장은 여느 미술관 못지않은 크기와 작품 수를 자랑한다. 대신 공간 디테일은 간소하다. 첫 번째 전시장은 1층과 2층이 뻥 뚫린 메자닌 구조로 5m의 거대한 나무 공이 천장에 매달려 있다. 한 칸 더 들어가면 천장에 수만 개의 나뭇잎이 매달려 있고, 또 한 칸 들어가면 시커먼 못 작업이 펼쳐진다. 역시 거대한 나무 공이 공간을 압도하는 두 번째 전시장의 2층에는 그만의 작업실이 있다. 방과 방을 지나야 나오는 밀실. 이 밀실은 그가 작품을 구상하는 장소다. 건물 3층, 전시장에서 가장 전망 좋은 명당에 들어서니 그의 대형 나무 공 작품을 반 잘라 만든 원형 테이블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은 테이블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이처럼 유리를 깔아 테이블로 사용하기도 하지요. 타원형 공은 반 갈라 소파처럼 쓰기도 해요. 미술이라는 게 생활에 적용했을 때 그 의미가 배가 된다면 작품을 가구로 사용하는 것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훨씬 더 자주 보고 가까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죠. 작품을 보고 사물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시각과 마음이 생기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요?”

(왼쪽) 천장 전체를 덮은 나뭇잎 작업(220×408cm)은 까다로운 설치 과정 때문에 갤러리나 미술관 전시에서는 볼 수 없다.

 
1 지도가 그려진 낡은 책을 파내어 산세를 형상화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
2 높이가 다른 몽당연필을 모아 양감이 느껴지는 벽 오브제.
3 건축 자재로 쓰이는 철빔으로 만든 CD장. 벽에 걸어 자그마한 소품을 전시하면 아트월로 손색없다.

작업을 하면서 가장 희열을 느낄 때는 좋은 작업 재료를 발견할 때. 두 갈래로 뻗어 나가는 나뭇 가지의 Y자형 연결 부위만 모아 바깥쪽을 비스듬히 자른 후 뒤집어 세운 설치 작품은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인 신작이다.


집에도 작품이 많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은 No! 아무리 작가가 퇴근 시간 없는 직업이라지만, 집에서까지 보면 계속 스트레를받지 않겠느냐는 것. 또 사람 살이가 담길 집도 단순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첫 번째 전시장 아래 언덕의 경사면을 이용해 지은 살림집은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부부를 위한 ‘맞춤’ 집이다. 항상 춥고 먼지(나무 톱밥) 많은 작업장에 있기 때문일까? 첫째는 단열, 둘째는 환기 그리고 오직 집이 가진 안온함에 초점을 맞춘 공간은 담백하면서도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단, 예상을 뒤엎는 광경이 있었으니 빨간색 포인트 월이 바로 그것이다. 좀처럼 색을 쓸 일이 없는 작업만 하다 보니 ‘집에나 한번 써보자’ 했다고. 그렇게 완성한 살림집은 거실, 침실, 게스트룸 세 개로 구성되었다. 구리에서 학교를 다니는 딸들이 한 달에 한 번쯤 이곳 양평을 찾고, 전국에서 친구들이 모여드니 마치 펜션처럼 빈방을 갖추었다. 새건물로 이사하면서 아내 차종례 작가의 작업실도 함께 옮겼다.

“잘나가는 작가인데 남편한테 치여 면목이 없다”며 겸연쩍어하는 이재효 씨와 작가로서 이재효를 존경한다는 아내 차종례 씨. 스무살 때 만나 결혼 18년 차가 되면서 부부애를 넘어선 우정, 가족애로 살아간단다. 단, 서로의 작품에 대해선 비판도 조언도 좀처럼하지 않는 영락없는 라이벌이다. “아이들한테 항상 ‘너는 다 가지고 태어났다. 남에게 무얼 해줄 수 있는지 그것만 고민하라’고 이야기해요. 살갑지 못한 아빠는 아이들에게 ‘여가 생활’ 같은 거죠. 못 보면 어쩔 수 없고, 보면 좋은 여가 생활. 예술가가 가장 못하는 관계가 바로 가족 관계 아닐까요.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전달된다고 생각하는데, 언젠가는 아이들도 느끼겠죠.”


거대한 스케일이 느껴지는 양평 전시장.

만날 보던 나무 조각인데
아르바이트비 받아 담 하나 쌓고, 강의비로 기둥 세우고, 대회 상금으로 지붕 올려 2년에 걸쳐 손수 지은 아랫마을의 집과 작업실은 여전히 이재효 씨의 작업실로 사용한다. 지난 1995년 이재효, 차종례 씨가 양평에 입성했을 때 시골 동네 사람들은 젊은 부부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왜 땔감을 주워다 깎고 다듬고, 태우다 마는지 이상하기만 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니 예술가 부부 덕에 동네는 활기가 넘친다. 커다란 나무둥치들이 컨테이너로 실려 나가고,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무려 열다섯 명, 땀내 가득한 작업장은 흡사 공장처럼 시끌벅적하다. 동네 사람들도 작가보다 ‘이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편하다. 그의 작업장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나무 창고. 겨울철에 벌목하는 사람들에게 몇 차 주문하고, 동네 할아버지들에게 껍질 벗기는 일감을 준다. 어떤 수입산 원목보다 귀한 재료라고 말하는 땔감용 나무. 이 나무가 모여 공이 되기까지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나무껍질을 벌려 말리고 쪄서 또 말리는 과정 모두 작업의 연장선. 말린 나뭇 가지를 모아 못으로 고정하고 겉면을 잘라내 구형이 완성되면 강한 불로 그을린다. 숱이 된 나무 겉면을 연마기로 갈아내면 나무 공의 안쪽은 까맣고 겉쪽은 하얀 속살을 드러내면서 흑백이 선명해진다.
“나무가 갖고 있는 에너지를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형태가 구求예요. 각도 없고 모서리도 없어 어느 쪽에서 보나 똑같은 모양이니까요. 재료를 모아 만들면 하찮은 것으로 강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습니다. 개구리 여러 마리가 동시에 울 때 커다란 울림이 있고, 광화문에 빨간 티셔츠 입은 사람이 몇백 명 모였을 때 엄청난 힘이 나오지 않습니까? 단순 반복하는 작업은 마치 선善을 행하는 일인 것 같아요. 나뭇가지가 모여 원을 이루고, 작업하는 하루하루가 모여 일생이 되는 것처럼요.”

1 땅에 떨어지고 말라 비틀어져 눈길조차 가지 않는 자연물과 고물, 쓰임이 다한 일상의 물건은 그의 손끝에서 새 생명을 얻는다. 
2 작업 동반자들. 작가는 디자인만 하고 기술자에게 작업을 의뢰하는 방식인데 기술자들은 어시스턴트가 아닌 테크니션technician으로 부른다. 왼쪽부터 못 연마 작업을 하는 오영수 씨, 미국에서 그의 전시를 보고 한국에 여행 왔다 제자로 들어온 스펜스 씨, 나무 공 작업을 담당하는 지경수 씨.


나무 작품만큼 마니아층이 두꺼운 ‘못’ 작업은 순전히 우연에서 비롯했다. 어느 날 작업장에서 그을린 나무토막에 물방울이 튀는데 반짝반짝하는 느낌이 좋았다는 것. 반짝이는 느낌을 어떻게 살릴까 궁리하다 떠오른 것이 스테인리스 스틸 못이다. 못을 박고 나무를 태운 다음 못을 그라인더로 갈아서 반짝이게 드러내고 나무를 숨기는 못 작업. 백미는 바로 못을 박는 위치다. 돌멩이를 던져 못 박을 위치를 정한다고 하면 믿을까? “의도적으로 놓으면 항상 부자연스러워요. 제 작업처럼 의도하지 않은 것은 또 있습니다. 바로 건물 외벽의 벽돌을 쌓은 방식이죠. 벽돌 크기와 모양이 세 가지였는데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숫자대로 쌓으라고 했죠. 자연스러운 불규칙은 의도한 규칙보다 훨씬 매력적이니까요.” 새로운 소재로 새롭게 작업하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일 터. 누구나 다 아는 흔한 재료로 작품을 만들었을 때 오는 강렬한 반전, 그 감동이 더 크지 않을까.

합천 기와집 막내, 두바이 가던 날 어느 미술 평론가는 그의 나무 공 작업을 두고 “부드러운 곡선과 풍부한 양감을 가진 조형작품으로 가구의 개념에 접근하면서 현대 주거 공간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고 평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구 혹은 입방체라는 친숙한 조형미에서 오는 단점도 있다. 기억하기 좋은 모양을 가졌다는 이유로 굉장히 많은 작품을 ‘생산한다’고 여기는 것. 그래서 양평 전시관은 더욱 의미가 크다. 대학 시절부터 20년간 이어온 작품 세계를 볼 수 있기 때문. “갤러리에서 작품을 ‘보는’ 것과 양평 전시관에서 ‘만나는’ 것은 분명 다르다고 생각해요. 작가로서 작품을 보여주는 것은 의무지요. 기업도 제품을 알린 뒤 기업 이미지를 홍보하고 사회 환원 사업으로 넘어가듯이 작업 역시 작품과 작가를 알린 뒤에는 삶의 방식까지 모범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3 딸아이가 생일 선물로 받은 연필을 잘라 심이 바깥쪽을 향하도록 붙여 만든 벽 장식.
4 놀이하듯 간단한 도구만으로 연금술을 펼치는 그의 솜씨와 유머에 감탄하게 하는 양철 조각 소품.


삶이 작업과 같아야 한다고 믿는 이재효 씨. 그는 조만간 강원도 영월에 자그마한 큐빅 하우스를 짓고 독립할 계획이다. 작가가 상업적으로 한 계단 올라서면 그만큼 한계가 빨리 온다는 말이 있다. 양평에 있으면 ‘팔리는 작품’만 만들 것이고, 도와줄 사람이 많아 게을러진다는 것. 전화도, 인터넷도, 사람도 없는 곳에 들어가면 머리보다 마음이, 몸이 먼저 움직일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다.

“제가 어릴 때 저희 집이 합천에서 기와 공장을 했어요. 그래서 항상 흙을 만지며 놀았지요. 아무래도 유년 시절 감성이 많이 작용하는 것 같아요. 어린 시절 기계를 만들고 놀던 작가들은 미디어 쪽으로 관심을 갖겠지요. 반면 저는 휴대폰 쓰는 것, 문자 하는 것도 골치 아파요.” 새로운 소재와 첨단 기법을 추구하며 빨리, 먼저를 외치는 시대에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 늦게, 천천히 가고 싶다고 말하는 이재효 씨. 그래서 이 디지털 시대에 망치질이나 하고 있다며 허허 웃는다. 흔하고 보잘것없는 사물에서 세계적 스케일로 고속 성장하는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니, 작가의 자그마한 체구와 까만 눈동자가 산처럼 크게 느껴졌다.

‘나의 작업은 재료가 가진 성질을 보여주는 게 우선이다. 군더더기가 있으면 안 된다. 젊을 때는 더하는 과정이지만 나이가 들면 결국엔 다 빼내지 않나. 작업이 바로 더하기 빼기의 과정이다’

*이재효 씨의 20년 작품 세계를 조명한 <자연을 탐探하다>전이 5월 27일까지 성곡미술관에서 열린다. 성곡미술관의 중견 작가 시리즈 전시로, 1991년부터 2012년까지 작업한 드로잉, 조각 소품, 설치 작업 등 3백여 점을 망라했다.
문의 02-737-7650
글 이지현 기자 | 사진 박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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