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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장례식] 헤어 디자이너 그레이스 리 분홍 꽃을 달고 탱고를 들려주오
우리는 장례의 참뜻을 잊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세상에서 할 일을 다 마친 이를 떠나보내고 그가 한 줌 먼지로 돌아가 자연을, 세상을 이롭게 하도록 돕는 의식이 장례 아닐는지요. 우리가 원스톱 장례 서비스에 길들여지고, 대량생산한 ‘기성품’ 수의와 근조화만 찾는 이유도 바로 그 참뜻을 잊은 채 효율성이라는 기준만으로 장례를 치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행복>은 인생의 마지막, 미소 속에서 가족을 존엄하게 떠나보내려는 이들을 위해 새로운 장례 문화를 제안합니다.


그레이스 리의 유언에 따라 장례식장은 아름다운 분홍 장미꽃들로 아름답게 꾸몄다. 다른 장례식장의 조문객이 들러 구경할 정도였다.

분홍과 빨강 장미, 은은히 흐르는 음악 그리고 다양한 장면의 사진이 돌아가는 모니터…. 마치 출판기념회나 칠순 잔치에 어울리는 풍경이 펼쳐졌던 헤어 디자이너 그레이스 리 선생의 장례식(2011년 2월 28일) 풍경은 매스컴에 소개될 만큼 특별했다. 그건 선생님의 소신이자 유언이기도 했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만났던, 선생님이 50대였을 무렵에도 그는 항상 죽음과 장례식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자연스럽고 즐겁게(?) 이야기하셨다. “내 장례식은 우중충하고 궁상스럽고 징징거리는 모습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충분히 근사하게 살다 죽었는데 뭐가 슬프고 뭐가 아쉬워? 그러니 하얀 국화꽃 대신 분홍 장미를 장식하고 음악도 탱고나 내가 자주 듣던 걸로 틀어줘. 그리고 음식도 장례식장에서 파는 것 말고 진짜 근사한 메뉴를 짜야 하는데 그건 아직 생각 중이야….”

1960년대에 세 아이를 한국에 두고 과감히 미국으로 떠나 미용 기술을 배운 도전 정신, 1970년대에 한국에 단발머리 열풍을 일으키고 미용실 아줌마가 아닌 ‘헤어 디자이너’란 칭호를 얻은 그레이스 리 선생은 일상에서도 평범함을 거부했기에 그저 ‘독특한 희망 사항’이라고만 여겼다. 그리고 장례식의 경우엔 망자가 아니라 유가족이 주관하는 것이니 그게 현실화되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효자인 김승용 씨는 모친의 뜻에 따라 연분홍, 분홍, 빨강 등 각종 붉은 빛깔의 꽃으로 단을 꾸미고, 조문객이 식사하는 장소에도 음악을 틀어놓고, 평소 선생님의 사진을 모아 영상으로 구성해 모니터에 계속 틀었다. 70세에 위암 수술을 시작으로 10년 가까이 세 번의 수술과 수십여 차례의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항상 씩씩하시던 선생님, 항암 치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져 머리를 짧게 자른 후에도 “이렇게 두상이 예쁜 줄 알았으면 진즉 쇼트커트를 하는 건데 괜히 단발을 고집했어”라고 유머 감각을 발휘하던 선생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도 독특한 반전이었다. 조문객들도 대한민국 여성의 평균 수명에는 못 미치는 아쉬운 나이, 그리고 너무나 많은 추억과 영향을 준 분의 죽음이 슬프고 안타깝고 막막하기는 했지만 분홍 장미꽃 속에 웃고 있는 선생님의 사진을 보며 다들 “아, 정말 그레이스 선생님다운 장례식이네요”라고 미소 지으며 선생님과 작별했다. 장례식만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생전에 제사도 평범함을 거부했다.

“내가 죽은 날에 모이지 말고 그냥 내 생일에 모여. 절대 홍동백서 같은 제사 음식 차리지 말고 맛있는 음식 만들어서 즐겁게 먹어. 내가 없으니 내 흉 실컷 보면서 실컷 웃어. 그럼 내가 하늘나라에서 지켜보고 따라 웃을 거야.” 확실한 효자인 김승용 씨는 선생님의 분부를 충실히 수행했다. 2011년, 선생님의 생일인 12월 9일에 친지들을 모아 제사가 아닌 추모 모임을 했다. 선생님이 평소 좋아하거나 잘 만드시던 음식(닭날개튀김, 헝가리안 수프, 파스타, 동파육, 김치국밥 등 국적 불문의 요리들)을 만들어 먹으며 선생님에 대한 칭송과 흉을 함께 나누며 추억을 새겼다.

그레이스 리 선생의 장례식과 제사가 이렇게 특별한 것은 단순히 그분의 요구 사항 때문만은 아니다. 평소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지인들에게 덕과 정을 베풀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장례식이나 추모 모임에 참석한 이들은 누구나 그레이스 리 선생이 직접 만들거나 사준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었고, 속상한 일이나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괜찮아, 잘될 거야”란 말에 큰 위로를 받았다. 세 번의 암 수술을 받은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잡지에 요리 칼럼을 연재하고 단골 고객을 위해 가위를 든 열정을 보며 나태해지는 자신을 추스르곤 했다. 충실하게 잘 보낸 하루가 달콤한 잠을 부르듯, 최선을 다한 삶이 아름다운 마무리와 장례식 풍경을 만든다는 것을 그레이스 리 선생께 배웠다. 지금도 그분이 너무 그립다.

(왼쪽) 제자인 헤어 디자이너 이희 씨는 그레이스 리 선생이 멀리서 걸어올 때도 그 에너지 때문에 위압감을 느낄 정도라 했다. 2009년 그의 인생 스토리를 담은 에세이 <오늘이 내 삶의 클라이맥스다>(김영사)를 펴냈다.

“그레이스 선생님은 ‘죽음은 삶의 한 부분일 뿐 특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곤 하셨어요. 누구나 생애 끝자락에는 죽음을 맞이하는 법이니 본인의 장례식에서도 슬퍼하거나 우울해하지 않기를 바라셨죠. 장례식장에서 선생님의 바람대로 생전에 가장 좋아하시던 핑크 바이올렛 컬러의 장미꽃으로 영정 사진을 꾸미고, 분홍 꽃으로 주변을 가득 채웠어요. 선생님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내드리고 싶었죠. 다른 장례식의 조문객이 들러 구경하기도 했답니다. 꽃이 주는 분위기 때문일까요, 장례식장은 슬픔에 억눌린 공간이 아니라 선생님을 추억하는 공간이 되었답니다. 사람들은 ‘그레이스 리 선생님답다. 참 곱고 우아하고 아름답다’라고 말하며 각자 가슴에 담고 있는 선생님과의 추억을 끄집어내거나 생각에 잠기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을 하기 직전까지 가위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어요. 병원에서도 즐겨 이용하던 화장품을 부탁해 멋을 부리는 것도 잊지 않으셨죠. 끝까지 ‘여성’임을 잃지 않고, 삶의 끈을 놓지 않으셨죠.
_ 제자 이희(헤어 디자이너)

그레이스 리는 … 결혼해 서른네 살까지 가정주부로 살다, 이혼 후 미국으로 떠나 헤어 디자이너의 삶을 살았다. 그는 1977년 4월 6일 대한민국 최초의 헤어 쇼를 열며, 1970~1980년대 한국 미용계의 판도를 바꿨다. 나이 일흔이 넘어 통영에서 음식점을 차리고 ‘중국 요리 이 선생’으로 세 번째 인생을 살았다. 생의 끝에서 만난 암으로 2011년 2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일흔아홉이었다.


 디자인 안진현 기자 캘리그래피 강병인 어시스턴트 최고은

구성 최혜경, 신진주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