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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장례식] 아티스트 백남준 씨 삶은 예술처럼 죽음은 해프닝처럼!
우리는 장례의 참뜻을 잊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세상에서 할 일을 다 마친 이를 떠나보내고 그가 한 줌 먼지로 돌아가 자연을, 세상을 이롭게 하도록 돕는 의식이 장례 아닐는지요. 우리가 원스톱 장례 서비스에 길들여지고, 대량생산한 ‘기성품’ 수의와 근조화만 찾는 이유도 바로 그 참뜻을 잊은 채 효율성이라는 기준만으로 장례를 치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행복>은 인생의 마지막, 미소 속에서 가족을 존엄하게 떠나보내려는 이들을 위해 새로운 장례 문화를 제안합니다.


2006년 2월 3일 뉴욕 프랭크 캠벨 장례식장에서의 故 백남준 씨.


백남준 선생은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나는 오래 살아야 한다. 아방가르드는 살아서 승부를 봐야 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사후에 대해 농을 던지곤 했지만, 죽음을 예상한 적은 없었다. “내가 나이는 먹었어도 비디오 아트는 아직 유년기야. 비디오 아트는 말하자면 2년마다 새로운 종류의 물감이 나올 정도로 빠르게 바뀌는 분야야. 나는 한 10년은 할 일이 남아 있어”라고 늘 외쳤고, 존 케이지 탄생 1백 주년 전 시를 본인이 직접 기획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생에 대한 집착은 곧 예술을 향한 집착이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작업에 대한 열정으로 생을 살았다. 예술과 삶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오로지 작품 활동에 에너지를 소진하는 삶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당뇨를 앓고 있었지만, 건강 관리에는 소홀했다. 휠체어에 앉아 간호사의 도움으로 뉴욕 소호를 산책하는 그를 떠올리면 가슴이 짠하다. 더 해야 할 일이 많았고, 하고 싶은 일이 넘쳐나는 태생적 예술가였다. 그러기에 그의 죽음은 많이 아쉽다.

2006년 2월 3일 오후 3시 뉴욕 프랭크 캠벨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이 진행됐다. 이곳은 재클린 케네디, 존 레넌 같은 명사들의 장례식을 치른 명소. 수백 명에 이르는 조문객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그의 부인인 시게코 구보다를 위로했다. 무용가 머스 커닝햄, 대지 미술가 크리스토, 존 레넌의 부인 오노 요코를 비롯해 유명 미디어 비평가 러셀 코너, 요나스 메카스를 비롯한 플럭서스Fluxus 동료들, 그리고 한용진 씨, 김수자 씨, 강익중 씨 등 한국 미술가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당시 백남준 아트센터 건립을 추진하던 전 경기문화 재단 송태호 대표이사와 함께 장례식장을 찾았다. 미국 장례 문화에 따라 시신의 얼굴을 보고 조문하는 뷰잉viewing을 진행했다. 꽃으로 둘러싸인 그는 굉장히 평온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 투병으로 얼굴이 붓고 육체적으로 나약해진 모습은 사라지고 장난기 가득하던 ‘청년 백남준’의 모습이 살짝 드러났다.


1 조문객들은 겐 하쿠다 씨의 제안에 따라 넥타이를 잘라 고인에게 바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2 한편에서는 백남준 씨의 작품 활동을 기록한 영상이 흘러나왔다. 
3 백남준 씨의 마지막 비디오 영상 설치작인 ‘엄마’. TV 화면 속에서는 색동저고리를 입은 소녀 세 명이 놀이를 하면서 “엄마”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 2012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우리가 현명하게 살도록 일깨워준 그의 존재에 감사한다.” 간결하고 함축적인 오노 요코의 추모사에 이어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백남준 아트센터)’의 설립 의미를 역설한 송태호 이사의 조문 낭독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의 조카 겐 하쿠다의 답사와 함께 이날의 하이라이트인 깜짝 제안이 있었다. 백남준 선생이 1960년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Performance of Etude for Piano Forte)’을 연주하다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해프닝을 선보인 것을 본떠 문상객들에게 미리 준비한 가위를 나눠주며 옆 사람의 넥타이를 자르게 한 것. 첫 번째로 오노 요코 씨가 하쿠다 씨의 넥타이를 과감하게 싹둑 잘랐다. 그리고 헌화하듯 자른 넥타이 조각을 고인 위에 올렸다.

그를 시작으로 조문객들은 서로 상대방의 넥타이를 자르고, 고인 위에 올려놓았다.겐의 제안이었지만, 과연 백남준 선생의 장례식다웠다. 마치 무대에서 관객(문상객)을 앞에 두고 퍼포먼스하는 것 같았다. 금세 벌떡 일어나 그 장난기 섞인 얼굴로 환하게 웃을 것만 같았다. 넥타이를 자르는 해프닝이 이어지는 시간 그 장소에는 우울한 공기가 전혀 없었다. 그를 추모하는 차원에서 진행한 퍼포먼스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쾌히 ‘작품’에 참여했다. 깔깔거리며 서로 넥타이를 잘랐다. 보타이를 맨 남성이나 넥타이가 없어 참여할 수 없는 여성들은 오히려 아쉬워할 정도였다. 그 자체가 하나의 공연이었다. 고인은 죽음을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가 장례 절차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본인의 뜻보다 유족의 바람이 더 컸다. 하지만 삶과 작업의 경계가 모호하던 그였기에 본인의 죽음조차 해프닝으로 마무리한 장례식을 그도 좋아했으리라 믿는다.

1979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한국에서 온 정신 나간 예술가가 있다. 피아노를 부수고 창피해 죽겠다”라는 말이 들릴 정도로 그의 인지도가 낮았다. 이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인식이 부족해 외국의 큐레이터 친구들이 ‘보석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하곤 했다. 장례식 날 밤 플럭서스 동료이자 나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래리 밀러가 찾아왔다. 그는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이상의 비전을 가진 글로벌한 사상가다. 그는 이미 반세기 전에 현재의 시각으로 미술의 역사를 확장하고 재편했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도 동감한다. 그는 시대를 앞서 간 진정한 아방가르드 작가이자 전 지구와 우주를 상대로 예술적 승부를 건 20세기 최고의 사색가이고 상상가였으며, 내게 큐레이터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많은 기회를 준 생의 멘토였다.
 

백남준 씨는 … 1932년 7월 20일 서울 서린동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서울과 홍콩 그리고 일본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63년 부퍼탈 파르나스 화랑에서 텔레비전 13대를 소재로 비디오 아트를 시작해 비디오, 조각, 설치, 퍼포먼스, 위성중계 등 영상으로 가능한 모든 장르의 예술을 시도했다. ‘비디오 아트 창시자’로 새로운 예술 영역을 연 선지자로 “나는 기술을 증오하기 위해 기술을 사용한다”라고 역설했다. 2006년 1월 29일 (한국 시간 1월 30일) 마이애미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디자인 안진현 기자 캘리그래피 강병인 어시스턴트 최고은 

구성 최혜경, 신진주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