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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나무> 저자 김태영 씨 이 땅의 나무에 미친 남자
누군가는 <한국의 나무>가 세상에 나온 것 자체가 ‘사건’이라 했다. 자신의 전공(역사학)과도, 직업(통번역가)과도 무관한 나무 도감 만들기에 인생을 건 한 남자의 열정과 인내 때문이리라. 10여 년 동안 여름에는 암벽, 겨울에는 빙벽을 타며 이 땅에 사는 나무들의 서식지를 찾아 하나하나 사진으로 옮기고 글로 기록한 투지 때문이리라. 식물연구가 김태영 씨와 ‘꿈꾸는 정원사’ 이동협 씨가 만나 그 내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김태영 씨 뒤로 보이는 그림은 ‘먼나무’다. ‘열매와 잎이 멋있다’라는 뜻의 ‘멋나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나무는 우리에게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할 정도로 감동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초록색 덩어리로 보일 뿐이다.”_윌리엄 브레이크(영국 시인)
1월이 다 가고 남녘의 미나리밭에서 봄 냄새가 살짝 풍길 듯한 아침에 ‘구슬댕댕이 겨울눈과 송양나무 열매’라는 신선하고 낯선 제목의 일간지 에세이를 보았다. 우선 구슬댕댕이는 내게 낯설지 않았고, 송양나무는 처음 들어보는 나무인지라 이런 제목으로 글을 쓴 작자가 궁금해서 읽어보았다. 에세이라기보다 <한국의 나무>라는 도감을 만든 저자의 소회를 토로하는 글이었는데 거기서 넘치는 열정을 엿보았다. 도감을 사야겠다, 어쩌면 저자와 연락도 한번 해봐야겠다 하고 가위로 오려 스크랩해두었다. 그리고 까맣게 잊었고, <행복> 편집장의 인터뷰 부탁에 응하고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스크랩 정리를 하며 놀랐다. “가가 가가가?”(내가 인터뷰할 사람이 바로 그 스크랩 기사의 필자였다. 간절하면 끌어당기는 것인가?)

사진 속의 그는 답사하다 산중에서 찍었는지 등산용 선글라스를 이마 위로 올리고 있었다. 목에 두른 카메라 끈 때문에 군복을 입은 야전군처럼 보였고 터프가이 같은 느낌이 들어 살짝 걱정이 되었다. 무슨 걱정? 도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사물의 실체를 정확하고 명확하게 독자에게 전달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정보 사전으로 그림 또는 사진을 곁들인 책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단 한 톨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치밀함과 섬세함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 것이고, 더구나 식물도감 만들기는 인간의 부지런함과 재주만으로 어쩔 수 없는, 시간의 작업이다. 언젠가 노건축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정원에 꽃나무를 한 그루 심고 싶다고 했다. 홍매화였나? 홍화벚꽃이었나? 개화 기간이 워낙 짧아 일장춘몽 같은 수종이었다. “좀 길게 피는 수종으로 심으시면 어때요?”라는 정원사의 우문에 “그 짧은 순간을 위해 1년을 기다리겠네”라는 현답이 돌아왔다.
식물도감을 만드는 이들은 이런 꽃들을 찍기 위해 1년을 기다려야 한다. 말이 1년이지 어디 1년뿐이겠는가? 기다린 1년의 어느 날이 바람 불고 비 오는 날이라면 ‘말짱 도루묵’이다. 다른 날을 기약하다가 속절없이 꽃이 져버리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한다. 매사가 이런 식이다. 꽃 하나, 잎 하나, 열매 하나를 찍고 기록하기 위해 천 리를 마다 않고 찾아가야 하는 과정이 도감을 만드는일 중 하나이기에, 도감을 만드는 사람은 대범하고 거친 게 아니라 찌질할 정도로 꼼꼼하고 섬세하고 치열해야 한다.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인터뷰를 위해 단정한 개량한복을 입고 나온 그는 다행히 거칠지 않았고 다소곳했다. 자신은 도감을 만드는 10년 동안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 했지만, 월급쟁이 하는 또래의 남자들에 비해 피부도 곱고 팽팽해 보였다. 아마도 산과 들을 헤매고 다녀 몸이 건강해졌고, 나무들을 보고 살아 마음이 평안하게 순화되었기 때문이리라. 그의 첫 직업은 통번역(통역과 번역)이었다 한다. 아직도 고쳐지지 않은 경상도 억양으로 보아 분명 사투리 영어를 구사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살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 역시 첫 직업에 몰두하기보다 복잡하고 힘들었던 젊은 시절의 일상을 피해 등산로와 암벽에 매달려 살았다 한다. 산을 즐겨 찾아 산에 익숙해지다 보면 나무, 풀, 야생화를 보통 사람보다 많이 접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가 산에 빠져 돌아다니던 시절 처음 야생화에 가진 관심은 자연스레 나무로 옮아갔고, 나무를 알기 위한 공부 때문에 도감과 카메라를 끼고 살았다. 한번 시작하면 ‘뽕을 뽑아야’ 하는 그의 성정은 갖고 다니던 국내의 도감과 현장의 실체를 일일이 비교 검토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도감의 오류와 허술함이 그를 힘들게 했고, 한편으로 보다 정확 하고 완벽한 도감을 만들어야겠다는 오기(?)를 부리게 했다. 그러나 방대함과 작업의 지난함에 한계를 느끼고 지지부진하다가 패기와 전문성으로 무장한 젊은 도반道伴 김진석 씨(공저자)를 만났다. 그때부터 가속도가 붙어 <한국의 나무>라는 10년에 걸친 도감 작업의 끝을 보았다.

디지털카메라에서 핸드폰, 스마트폰, 태블릿에 이르기까지 카메라를 장착해서 바야흐로 전 국민이 사진작가인 시대를 살고 있다. 카메라를 잡은 지 40년쯤 되는, 아마추어인 나의 사진에 대한 지론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담고, 감동하고 즐겁고 슬프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 지론의 요체는 기본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 기본은 사물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물성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전과 도감은 이 지론의 시작이다.

식물도감 <한국의 나무>는 우선 무겁다(어쩔 수 없이). 남한 땅에 있는 6백50여 종을 한 권에 담아야 했고, 컬러는 양면인쇄를 해 서로 비치지 않아야 하니, 종이는 두껍고 책은 무거워졌다. 또 휴대용으로 써야 하니 그 많은 내용을 한 권으로 압축해야 했다. 그런 이유로 편집은 촘촘하고 사진은 작다. 텍스트는 객관적이고, 설명적이며, 학술적이고, 딱딱하다. 겨냥한 독자층은 대학생과 동호인, 숲 해설가 수준이라 했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죽과 밥의 경계 지점에 있다.” 다소 어렵고, 딱딱하고, 촘촘하고, 무거운 불편함은 도감이라는 도서의 특성과 현실적인 판매 전략을 기꺼이 이해해준다면 될 일이고, 나머지는 박수를 크게 쳐야 할 책이다.

첫째, 식물도감은 발로 만들고 시간이 만드는 것이다. 단, 자연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도감의 사진을 꼼꼼히 살펴보면 멋 부리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생생하고 정확하게 찍었고, 거의 현장에서 직접 찍은 흔적이 보인다. 식물 사진 찍기는 참으로 쉽지 않은 작업이다. 꽃잎과 이파리 한 장은 미세한 바람에도 떨린다. 이런 사진을 5천여 장 수록한 저자들의 노력과 시간에 경의를 표한다. 둘째, 편집 내용의 꼼꼼함과 다양한 관찰과 기록이 돋 보인다. 수형, 수피, 꽃, 잎, 열매 등의 일반적 구성에 덧붙여 화관의 구조, 유사 수종과의 비교, 변이 과정, 곤충들과의 공생 관계, 열매의 치수까지 낱낱이 기록한 치밀함으로 지금까지의 여타 도감과는 차별화하고 여러 단계 업그레이드한 도감이라 평할 수 있다.

교수가 정치를 하고, 개그맨이 시사 평론을 하고, 의사가 경제 평론도 하고, 소설가가 정치 활동도 하고 일반인도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언론 플레이를 하는 멀티태스킹의 시대다. ‘통섭’이란 단어는 유행을 넘어 대중적 단어가 되었고, 학문과 산업에서 경계가 모호해지고 교류와 합종연횡이 활발한 시대를 살지만 불편한 진실이 있다. 어정쩡한 양다리와 가짜가 양산되고 세상의 주류인 양 물을 흐리는 것이다. <한국의 나무> 공저자 김태영 씨는 인문대학에서 미술고고학을 전공한, 식물학 분야의 비주류이자 주변인이다. 그러나 어설프게 아는 것을 싫어하는 성정은 강호의 20년 수련 과정에 다 들어 있다. 취미로 시작한 나무 공부의 기초 자료(도감)를 만들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 독학으로 닦은 무공, 그걸 정리해 스스로 하산한 강호무림의 낭인 고수다. 산을 내려온 그는 상아탑의 학벌과 위계질서, 관습과 안일의 굳건한 성벽으로 보호막을 친 기성 학계에 통렬한 일갈로 옆구리 차기 한 방을 날렸다. “한 가지라도 똑바로 하자고!” 상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오른쪽)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나무를 가장 정확하고 방대한 세부 사진과 함께 정리한 나무 도감 <한국의 나무>. 김태영 씨와 김진석 씨가 자생지에서 촬영한 5천여 장의 컬러 도판과 함께 발로 뛰며 찾아낸 살아 숨 쉬는 정보를 담았다.

정통의 주류 프로페셔널 그룹과 아마추어 오타쿠(한 분야에 마니아 이상으로 심취한 사람)인 이 사내의 일합을 관전하며 우리는 즐거울 수 있을뿐더러 이 사회의 희망을 본다. 왜냐하면 기습을 당한 기성 학계와 출판사는 몸을 추슬러 더 나은 도감을 만들어 독자들에게 선보일 것이고, 이렇게 외부 자극과 견제 속에 핵심 가치는 집중되고 진정성이 발현되어 분야별로 진화하고 발전해갈 것이기 때문이다.

“죽과 밥의 경계에 있는 도감”을 만든 그에게 “<행복> 독자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말랑말랑한 도감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떠냐?” 하고 물으니 “성격상 이 또한 잘 만들어야 하는데 아직 공부가 부족하다”고 했다. 언론과 전문 독자들의 호응으로 요즘 산 아래서 조금 바쁜 나날을 보내는 그가 머지않아 산을 올라 또 다른 유익한 궁리를 할 것이라 믿는다.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내공이 더욱 충만한 낭만 자객의 등장을 우리는 즐겁게 기다리면 된다.
“한곳에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저 조용한 나무들이 실은 나름 분명한 자기주장을 가지고, 다양하고 창의적인 생존 전략을 구사해가면서 누구 못지않게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에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결국 나무들 역시 인간들과 함께 이 지구에서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동반자가 아니겠는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지혜로운 이들과 더불어 나무 공부의 소박한 즐거움을 나누고 싶다.” 그가 책을 내면서 힘주어 강조한 이 바람은 결국 인생의 성찰에 관한 자기 고백과 권유다.

소년 시절부터 부산의 황령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바닷바람과 햇살과 녹색 숲에 익숙해 있던 그는 이 책이 10년의 작업 결과가 아니라 30년의 세월이 녹아 있는 책이라 했다. 젊은 시절 먹고사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편집광적인 집중을 보인 그는 제대로 된 도감을 만들겠다는 야심 찬 작업을 진행하던 중 깨달음을 얻었다. 사실 이렇게 장기간의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는 일은 개인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좋아하고 사랑해서 내밀히 들여다보면 서로 다른 생명의 존재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간 들어간 노고의 시간과 비용을 따지자면 지금의 환대와 박수는 무의미하리라. 그는 현실 대신 나무와 숲을 통해 삶을 성찰했고 그 평화를 세상 사람들과 나누고자 한다. 지금까지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 풍경이 그저 무심하였다면, 이 봄 녹빛 새잎을 내는 나무를 마중하러 눈을 반짝거리며 가보자.

글을 쓴 이동협 씨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쌍용건설을 시작으로 KBS, SBS 미술부 등에서 일했다. 현재 SBS 아트텍 경영지원팀장이다. 1997년 집을 짓고 인생의 첫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정원에 대한 관심이 천리포수목원으로 이어져 천리포수목원을 101차례 방문해 정원의 속살을 담아냈다. <정원 소요>가 그 결과물이다.

 

김태영 씨가 추천하는 한국의 아름다운 나무

후추등(바람등칡)
일본(혼슈 이남), 타이완, 한국에 분포하는 나무로 국내에선 제주도와 거문도, 손죽도의 낮은 지대에 자생한다. 길이 10cm, 지름 4cm까지 자라는데, 줄기 마디에서 뿌리를 내어 나무와 바위에 붙어 산다. 꽃은 암수딴그루로, 5~6월에 황록색 꽃이 피는데 꽃잎과 꽃받침이 없다.

초령목 꽃 제주도에 드물게 자생하며 남부 지역에 간혹 식재되어 있다. 회색 또는 암갈색 수피, 녹색 또는 갈색의 누운 털이 있는 어린 가지, 광택이 있는 꽃눈이 특징이다. 꽃은 2~3월에 잎겨드랑이에 지름 3cm 정도의 백색 양성화가 달린다. 길이 5~10cm의 타원형 열매도 달린다.

황벽나무 제주도와 전남을 제외한 전국의 산지에 자생하는 낙엽 교목으로, 높이 10~30m, 지름 1m까지 자란다. 7~13개의 작은 잎이 마주나는데, 길이 5~10cm의 난상 타원형으로 끝이 꼬리처럼 뾰족하고 가장자리에는 밋밋하거나 얕게 둔한 톱니가 있다. 6~7월에 황록색 꽃이 모여 달린다.

구상나무의 암구화수 한반도 고유종으로 지리산, 덕유산, 한라산의 해발 고도 1000m 이상 산지에서 자생한다. 상록 교목이며 높이 18m, 지름 1m 정도로 자란다. 암수한그루로, 수분기는 4~5월. 수구화수(수꽃에 해당)는 타원형이며 암구화수(암꽃에 해당)는 짙은 자주색, 흑색, 녹색 등 색상이 다양하다.
글 이동협(꿈꾸는 정원사) | 사진 이경옥 기자 | 진행 최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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