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 비행기 탔을 때를 기억하는가? 거대한 여객기가 굉음을 내며 활주로를 달리다가 공중으로 떠오르는 순간, 창 너머 광활한 육지 앞에서 눈을 떼기 어려웠던 동심! 동력으로 하늘을 나는 꿈은 20세기 초에 실현됐지만, 여전히 창공을 나는 일은 놀랍기만하다. 새의 깃털을 달고 하늘 높이 날고자 한 이카로스의 신화는 현실로 이루어졌고, 여객기 운항의 서비스를 논할 정도로 비행기는 평범한 이동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하늘을 난다는 것’은 여전히 동경과 환상의 영역이다. 정유진 씨의 비행 도전도 마찬가지. 우연처럼 시작했지만, 밑바탕에는 강의실 너머 종종 보이던 비행기를 향한 근원적 호기심과 동경이 있었다. “원래 특별한 취미를 즐기거나 몰두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새로운 것을 시작해도 금세 싫증을 내는 편이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비행은 달랐어요. 비행길이 학교 근처에 있어서 비행기가 자주 보였고 그때마다 막연한 동경을 가슴속에 담았어요. 육지 사람들을 놀리듯 창공을 나는 비행기를 보고 나도 답답한 강의실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비행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드림항공의 윤종준 대표가 그의 학교에서 비행에 관한 강의를 했고, 그것이 계기가 됐다. 비행이 현실에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항공 스포츠라는 점, 자동차 ‘장롱면허증’ 소지자인 그도 하늘길에서는 오히려 충돌 걱정 없이 질주할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되었다. 그 이후로는 프로펠러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늘을 나는 그 꿀맛을 아시나요
“드림항공 비행장에 무작정 찾아갔어요. 강의를 들은 뒤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죠. 당시 대학교 4학년이었고, 출처가 불분명한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을 때였어요. 졸업반이었으니까. 활주로에 서 있는 비행기를 보니 가슴이 두근거리더군요. 조종석에 앉아 모양새 좋게 날고 싶은 욕망을 온몸으로 느낀 거죠.” 비행을 향한 그의 타고난 호기심은 비행과 가까워질수록 더욱 왕성해졌다. 상담을 받은 그날 바로 체험 비행을 했다. 그의 옆자리에는 능숙한 비행 솜씨의 윤 대표가 앉았다. 오후 3시경이었고 바람이 제법 많이 불어 귀가 아플 정도였다. 대형 여객기와 달리 경비행기는 동체가 작아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창공에서 날렵한 물고기처럼 움직이지만 기상 상황에 민감해 착륙할 때까지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런 이유로 탑승 직전에는 살짝 떨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직접 조종 키를 잡은 것이 아니기에 두려움보다는 놀이 기구를 탈 때의 떨림과 흡사했다. 비행길 주변의 이름 없는 언덕을 넘어 저수지인 의림지까지 다다랐다. 이륙할 때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비행의 꿀맛을 맛보게 됐다.
한 달 만에 조종 키를 잡은 정유진 씨. 발랄하던 표정은 사라지고 사뭇 진지하고 진중한 자세로 비행을 준비한다. 이착륙은 비행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계다.
“바람을 맞으며 직접 비행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함께 비행한 윤 대표님과 하늘에서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체험 비행은 일종 의 테스트였어요. 비행과 바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어느 정도 인지, 정말 단독 비행을 즐길 만큼 열의가 있는지. 그런 자세가 없으면 비행에 도전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꾸준한 반복을 통해 몸이 비행기와 동체同體가 되어야 합니다.” 첫 체험 비행이 테스트였다면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는 바로 비행 연습에 돌입했고, 4개월간 비행 교육을 받았다. 일주일에 세 번 이상 비행장을 찾았다. 단독 비행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을 받으려면 20시간의 교육 이수는 필수다. 당시 다니던 학교와 비행장이 멀지 않아 어렵지 않게 비행장에 드나들 수 있었으니 어쩌면 그가 비행을 시작한 것 자체가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동체와 몸이 하나 되는 과정
시작은 동경과 호기심이었지만 그다음은 몸으로 익혀야 할 과정이다. 연습 시간이 축적될 때마다 긴장감은 더욱 고조됐다. 고도의 정신력으로 바람을 다스리는 일은 쉽지 않은 과정이다. 그는 그것을 ‘동체와 하나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13시간 정도 비행 교육을 받았을 때였어요. 처음에는 멋 부리는 여고생처럼 재미만 가득했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진 다음에는 발끝에서부터 울렁거림이 심하게 반복됐어요. 바람의 방향을 인지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신속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생각에 울렁거림이 심해지자 ‘과연 내가 비행을 할 수 있을까?’ 의심한 적도 있었죠. 그 시기가 가장 힘들었어요. 정신은 오롯한데,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순간, 그 경계를 잘 넘어서야 해요.”
울렁거림은 특별한 대안이 없단다. 바람의 움직임에 몸을 맡길 수 있는, 반복 비행을 통해 동체와 몸이 분리되지 않을 그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울렁거림 못지않게 힘들었던 것이 ‘발바닥 통증’이었다. 여자 신체 조건으로는 조종석 규모가 큰 데다 페달을 밟아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에 힘 조절을 잘하지 않으면 비행기가 고꾸라지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조종 키를 움직이면 기계의 반응 속도가 한 박자씩 느리다 보니 자전거처럼 몸으로 감각을 익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빨리 배워서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강해졌어요. 비행 교육을 시작한 지 3개월쯤 지났을 때 마음의 여유가 조금씩 생겼어요. 그때부터였어요. 창 너머를 곁눈질하게 된 것이.”
그제야 눈앞에 풍광이 들어온 것이다. 바람과 싸우기 급급하던 초보 파일럿이 창밖 진짜 세계를 만나자 가상의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무는 표지판이 되고, 교회 건물은 거리 측량기가 되고 산봉 우리를 보고 항로를 결정한다. 영월의 강줄기를 따라 지그재그 비행을 할 때는 조종석으로 들어오는 바람 소리에 짜릿한 통쾌함과 배움이 주는 성취감이 뒤따랐다. 풍광을 즐기게 되면서 환경 보호에도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성격도 적극적으로 변했다. “조종석에서는 바람 소리 때문에 통신용 헤드셋을 착용해도 가능한 한 큰 목소리로 말해야 해요. 크게 말하다 보니 어느 자리에서든 적극적인 자세가 되더군요. 운전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기계를 다루는 능력이 잠재돼 있던 모양이에요! 자동차 운전보다 비행 운전이 쉬워요.”라고 말하는 그를 보니 타고난 재능처럼 보인다.
활주로 앞에 선 그는 자동차 운전보다 비행기 조종이 쉽다고 말한다.
(왼쪽) 비행에 앞서 필요한 주요 세 가지는 지도, 선글라스, GPS.
(오른쪽) 2011년 가을, 그는 경비행기 조종 자격증을 취득했다.
세상을 마주하는 법을 배우다
그는 새벽 비행을 가장 좋아한다. 비행을 즐기기 가장 좋은 기상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바람이 잔잔해 새벽의 고요함을 만끽할 수 있고, 풍치도 한적하게 관찰할 수 있다. 낮에는 바람과 강렬한 태양광 때문에 비행하는 데 장애가 상대적으로 많다. 그가 20시간의 비행 교육을 마치고 자격증 시험을 볼 때는 기상 여건이 좋지 않았단다. 바람은 물론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릴 넘치는 추억이라고 담담하게 말을 잇는 그였지만, 생사의 경계 또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형 참사’라는 말을 꺼낼 만큼 비행기 사고는 곧 사망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사고율은 낮지만 한 번 사고가 발생하면 피해가 큰 탓이다. 그런 두려움에도 비행을 즐기는 이유는 그 이상의 묘한 흥분과 성취감이 강하기 때문이리라.
“개인 비행기로 자유롭게 비행을 즐기는 할아버지가 계세요. 비행 경험이 많다 보니 제주도까지 쉽게 다녀오실 정도지요. 저는 아직 비행 경험이 많지 않지만 장거리 비행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가깝게는 동굴이나 유적처럼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을 지닌 영월이나 멀게는 독도와 제주도처럼 섬으로 비행해보고 싶어요. 그런 날이 올까요?” 사실 비행을 취미로 즐기는 일은 오랜 노력이 필요하다. 20시간의 교육 비행은 물론 그 이후에도 비행 감각을 잃지 않으려면 꾸준한 반복 비행이 뒤따라야 한다. 비행을 즐 기고자 하는 의욕적 열정과 시간적 투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활주로가 필요한 탓에 대부분 비행장이 도심 외곽에 있는 것도 아 쉬운 점이다. 하지만 그가 어린 나이에 비행에 도전해 운전보다 더 수월하게 하늘을 날 수 있게 됐듯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근사한 항공 스포츠라고 힘주어 말한다.
“비행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이와 성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남녀가 신체 조건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비행 조종을 하는 데 결정적인 신체적 단점이 있지 않다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답니다. 가장 좋은 첫걸음은 체험 비행이에요. 연륜 있는 교관과 함께 경비행기를 타는 경험을 해 보면 스스로 본인의 가능성과 의지를 느끼게 돼요. 비행을 시작한 것은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예요. 인생의 특별한 재미를 만든 셈이니까요.”
날고 싶으면 날면 돼!
인터뷰를 마치고 정유진 씨는 오랜만에 비행 준비를 했다. 직장인인 탓에 주말에도 비행장을 찾는 일이 쉽지 않다. 한 달 만에 비행에 도전한다는 그는 함께 창공을 질주할 비행기를 애인처럼 쓰다듬고, 작은 것까지 잊지 않으려는 듯 구석 구석 눈으로 사진을 찍었다. 조종석에 앉으니 발랄하게 말하던 앳된 얼굴은 사라지고 어느새 비장한 비행사가 되어 있었다. 프로펠러가 굉음을 내고 비행기가 활주로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비행기의 앞머리가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창공 사이를 가로질러 날아갔다. 그의 담대한 도전이 자유로운 경비행기의 몸짓과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20분의 고공 행진을 마치고 다시 활주로로 들어온 비행기가 무도회를 막 끝낸 신사처럼 사뿐하게 땅에 안착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활짝 웃던 그에게 비행 소감을 물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날고 싶으면 날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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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링 박명선 취재 협조 드림항공(www.flydrea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