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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클래식이다 만년필 글씨에선 잉크빛 바다가 출렁인다
어떤 사람들은 성능만으로 펜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펜이란 지식인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좋은 펜을 갖는 것은 훌륭한 필체를 지닌 것만큼이나 그 사람의 품위를 나타내는 징표와도 같지요. 적어도 교양인들의 세계에서는 말입니다.

펜글씨를 연습한 적 있나요?
기록을 위한 도구는 현기증이 날 정도의 속도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태블릿 PC, 넷북 등 디지털 기기를 이용해 기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만년필을 사용하는 멋과 기능은 특별합니다. 흔히 만년필 하면 고가의 명품을 떠올리지만 비싸거나 유명한 상표가 아니어도 쓰는 사람이 소중히 사용한다면 오래된 낡은 만년필이 오히려 깊은 멋을 풍깁니다. 만년필의 멋은 쓰는 사람에 의해 완성되기 때문이지요. 주인에게 애용되는 만년필을 종이에 대면 잉크를 먹은 펜촉이 금세 글씨를 쏟아냅니다. 소중히 잘 다루면 만년을 쓸 수 있다는 그 이름처럼 평생을 품 안에 넣고 다닐 수도 있습니다. 오래 쓸수록 쓰는 사람의 버릇을 닮아가는 점은 볼펜과 같은 필기구에는 없는 매력일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연주자의 악기, 야구 선수의 글러브처럼 만년필도 쓰는 사람의 개성을 받아들이기 때문이지요. 만년필의 또 다른 매력을 꼽으라면 펜촉 끝으로 미끄러지는 듯한 부드러운 움직임과 종이에 스치는 사각거림을 빼놓을 수 없지요. 손에 잡히는 펜의 묵직함과 글자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여 쓰는 점 역시 만년필에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손 글씨로 쓴 편지는 받는 이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아날로그가 오히려 경쟁력이 된답니다.

(왼쪽) 2012년에 첫선을 보이는 몽블랑 디바 컬렉션 그레이스 켈리 만년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펜
자체에 잉크를 지닌 만년필은 17세기 중반에 등장했지만 실용적으로 상용화된 것은 1884년부터입니다. 만년필을 발명한 사람은 뉴욕생명의 판매원이었던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Lewis Edson Waterman으로, 그는 정성 들여 준비한 계약서에 고객의 서명을 받을 때 펜의 잉크가 흘러 계약을 망치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한번은 계약서에 잉크가 떨어져 엉망이 돼버리는 바람에 새 계약서를 가지러 사무실에 간 사이 다른 판매원이 그 계약을 가로챘다고 하네요. 상심한 그는 잉크가 흘러내리지 않는 펜을 만들겠다고 결심했고, 결국 잉크통에서 소량의 잉크가 안정적으로 나오는 펜, 즉 만년필을 개발했습니다.

나에게 꼭 맞는 만년필을 찾아서
만년필을 갖고 싶다면 반드시 사용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편지를 만년필로 쓰고 싶다든지 비즈니스맨으로서 자연스럽게 잘 다루고 싶다든지, 또는 서명할 때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슈트 재킷 가슴 포켓에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등 만년필을 구입할 목적이 어느 정도 정해지면 매장 직원에게 추천받는 것이 좋습니다. 선택 사항으로는 몸통의 재료, 펜촉의 소재, 모양, 자폭, 중량의 균형, 잉크 흡입 방식 등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만년필 가격은 펜촉 값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가의 만년필에는 대부분 스테인리스 합금을 사용하고, 고급품은 주로 금촉을 사용합니다. 금촉은 독특한 탄력이 있어 사용자의 필기 습관에 맞게 글씨 쓰기가 쉽기 때문에 최고의 소재로 꼽힙니다. 잉크의 산성에 강하고 조정과 수리가 쉬운 점 역시 금촉만의 장점이지요. 최근에는 스테인리스 촉도 제법 좋으나 어느 일정한 힘 이상으로 쓰면 펜 끝이 슬며시 구부러지기 때문에 글씨를 힘주고 쓰는 사람에게는 금촉이 적합합니다.
만년필을 고를 때에는 개인마다 다른 필압을 고려해야 합니다. 글을 쓸 때 누르는 정도가 강하면 딱딱한 펜촉, 약하면 부드러운 펜촉을 선택하면 좋습니다. 펜 끝의 가공은 숙련된 직공이 수작업으로 하기 때문에 만년필의 가격을 좌우하는 부분입니다. 펜 끝의 갈라진 부분인 슬릿의 길이가 길수록 필기감이 부드럽고, 길이가 짧을수록 딱딱한 느낌을 줍니다. 펜 끝은 EF(Extra Fine: 극세사 0.24~0.28mm), F(Fine: 잔 글자 0.28~0.34mm), M(Medium: 중자 0.34~0.44mm), B(Broad: 크고 굵은 글씨 0.44~0.54mm)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첩에는 EF, 비즈니스 문서에는 F, 우편물이나 서명은 M이나 B가 적당하고, F는 어떤 용도에도 무난하게 잘 어울립니다. 만년필로 글씨를 쓸 때에 까끌까끌하거나 매끄럽거나 또는 탄탄하거나 낭창낭창하다는 느낌은 바로 이런 펜촉의 구조가 각기 다른데에서 오는 차이입니다.

(오른쪽) 1 그라폰 파버카스텔 엘리멘토 만년필은 창사 2백50주년을 기념해 올리브 나무 결이 살아있는 한정판으로 선보인다.
2 용의 해를 맞이하여 한정판으로 제작한 S.T.듀퐁 네오클래식 만년필.
3 몽블랑의 상징인 화이트 스타는 만년설로 덮여 있는 몽블랑 산의 여섯 개 봉우리를 상징한다.
4 견고함이 돋보이는 파카 듀오폴드 인터내셔널 펄 엔 블랙 만년필.
5 워터맨을 대표하는 모델, 에드슨 다이아몬드 블랙 만년필.
6 몽블랑 만년필은 하나의 완성된 펜이 만들어지기까지 6주 이상의 시간 동안 2백50가지의 공정을 거친다.

돌발 사태에 대응하는 법
만약 펜촉이 벌어졌다면 연필을 쓰듯이 꾹꾹 눌러쓴 탓입니다. 만년필을 쓰려면 손에서 힘을 뺄 필요가 있습니다. 펜촉이 아예 벌어졌다면 수리를 받거나 새 촉을 사서 바꿔 쓸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만년필에 잉크가 찼는데 글씨가 안써진다면 오래 묵은 잉크가 굳었다든지, 만년필과 궁합이 맞지 않는 잉크를 넣어서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컵 속에 미지근한 물을 붓고 펜촉 부분을 담가두세요. 몇 분 후 촉에서 잉크 물이 나오지 않고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씻어내면 펜이 술술 써질 겁니다. 이렇게 해도 안 되는 만년필은 만년필 구입처에 방문해 수리해야 합니다. 잉크는 다소 비싸더라도 몽블랑 만년필에는 몽블랑 잉크, 워터맨 만년필에는 워터맨 잉크처럼 만년필과 같은 상표의 제품을 쓰는 것이 펜을 오래 쓰는 비결입니다.

디자인 안진현 기자 손 모델 김범준 어시스턴트 최고은 제품 협조 그라폰 파버카스텔(02-712-1350), 듀퐁(02-2106-3592), 몽블랑(02-3485-6618), 워터맨(02-554-0911), 파카(02-554-0911)

진행 박경실 기자 | 사진 한정훈(H팩토리 스튜디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