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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하우스] 통인동 김순영 씨의 유기 예찬 놋그릇 가지런히
서촌의 고즈넉한 정취와 어딘지 닮은 듯한 놋그릇 가게 ‘놋:이’를 찾았다. 놋쇠 소리의 울림이 그리워 대를 이어 유기 공방을 운영하는 이경동 씨와 좋은 놋그릇으로 대중과 소통하겠다는 아내 김순영 씨의 ‘놋’ 이야기.


은과 동일한 항균 효과, 보온과 보냉 기능을 비롯해 궁극적으로 식문화의 격을 높여주는 유기의 매력을 대중에게 알리고 싶다는 김순영 씨. 갤러리 ‘놋:이(02-736-6262)’와 카페 ‘놋그릇 가지런히’를 통해 모던한 감각의 놋그릇을 선보인다.

몇 달 전 일이다. 소품 숍 마켓엠에 들렀다 우연히 공사 중인 옆 건물을 바라보았는데, 1층의 쇼윈도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구도, 조명도 없는 텅 빈 공간 창가에 놓인 다섯 개의 소반. 뭐가 그리 급해 소반만 덩 그러니 두었을까. 고가구점? 아니면 전통 찻집?
얼마 전 다시 찾은 골목.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그 공간에는 ‘놋그릇 가지런히’라는 손글씨 간판이 붙었고 소반 위에 놋그릇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여기 좀 봐도 되죠?” 정식으로 오픈하기 전 불쑥 찾은 손님을 허물없이 맞으며 오디차처럼 말간 미소를 건네는 주인장 김순영 씨. 두 손에 퍼지는 따뜻한 차의 온도와 손으로 잡는 느낌이 좋아 찻잔을 유심히 살피는 기자에게 놋그릇 예찬론을 편다. “아버님과 남편의 뜻을 알리고자”로 시작한 자못 비장한 스토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16년 전 경남 거창으로 거슬러 오른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태어난 황금빛 그릇
김순영 씨는 경남무형문화재 14호 이용구 선생의 넷째 며느리다. 그의 남편 이경동 씨는 토목을 전공하고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다 16년 전부터 놋그릇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김순영 씨는 서른 살 젊은 나이에 가업을 잇겠다는 남편의 뜻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집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어요. 농공 단지에서 공방 식구들에게 밥을 지어주며 일을 돕는데, 어찌나 서럽고 속상하던지 밤마다 눈물을 훔친 기억이 나요. 한동안 자존심이 상해 친구들도 안 만났어요. 하지만 남편이 땀 흘려 만든 놋그릇을 직접 사용하면서 비로소 유기의 진면목을 알게 됐죠.” 징, 꽹과리를 비롯한 농악기부터 수백 가지의 그릇과 소품을 선보이는 ‘두부자 공방’은 경상도 일대에서는 제법 유명하다. 국내 유명 사물놀이패 수장인 김덕수 씨도 이용구 선생에게 징이나 꽹과리를 주문한다. 유명 사찰에서도 부자의 그릇을 사용하고 있다. 주문이 밀릴 때면 부자는 한 달간 꼬박 공방에 들어가 작품을 완성한다. 철없던 막내며느리는 이제 직접 납품을 다니며 놋그릇의 장점을 알리는 데 누구보다 열심이다. 1200℃의 뜨거운 불길 속에서 황금빛 그릇을 빚는 데 평생을 바친 시아버지와 남편의 노고에 보답하는 길이 무얼까 고민하다 ‘서울행’을 결심했다고. “무엇보다 놋그릇이 그저 한식당에서 쓰는 그릇으로 인식되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자연차와 주전부리를 담는 것으로 놋그릇을 생활에 쉽게 적용하는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게 1차 목표예요.”

(왼쪽) 곧 서울로 전학 오는 상석 군과 소민 양, 거창에서 놋그릇을 짓는 남편 이경동 씨.

많은 사람에게 유기의 장점을 알리기 위해 김순영 씨 부부는 좀 더 젊은 감각의 유기 브랜드 ‘놋:이Noshi’를 론칭했다. 전통 제기 모양을 시원스레 길게 뽑아내거나 놋사발 테두리를 감각적으로 굴려 모던하게 응용한 제품은 모두 남편 이경동 씨의 디자인이다. 군더더기 없는 단순한 놋그릇은 모두 ‘열단조기법’으로 제작한 것. 유기는 보통 세 종류로 나뉜다. 두드려서 만드는 방짜, 불에 녹인 쇳물을 주물 틀에 부어서 만드는 주물, 이 두 가지를 절충한 게 반방짜 기법이다. 반방짜 기법과 비슷한 ‘열단조기법’은 만두피처럼 동그랗고 편편한 판을 주물로 찍어낸 뒤, 물레로 도자기를 빚어 내듯 불에 달구며 형태를 늘려가는 방식을 말한다. 보통 ‘방짜 유기’라 부르는 식기류는 대부분 이 열단조기법으로 제작한 것. 맑고 깊은 소리가 생명인 악기는 실제 방짜 기법으로 두들겨 만들지만, 식기류 같은 일상 생활용품은 열단조기법을 적용해 퀄리티는 유지하면서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다.

“놋그릇이 무겁다지만 오히려 묵직해서 좋은 점이 많아요. 놋으로 만든 머그잔는 오랫동안 온도를 따뜻하게 유지하는 것은 물론, 양손으로 쥐었을 때 안정감이들죠. 또 요즘 놋그릇은 색이 잘 변하지 않고 관리하기도 편해 누구나 쉽게 생활 용기로 쓸 수 있어요.”


1 옥상에 별채로 지은 4층. 햇살이 듬뿍 들어오는 이 공간은 가족 모두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된다.
2 놋으로 인연을 맺은 MBC 공연 전시 전문 프로듀서 최종미 씨(가운데)와 효재의 차재숙 이사(왼쪽), 김순영 씨가 게스트룸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최종미 PD는 놋쇠 소리를 응용한 뮤지컬 음악을 기획 중이다.


3 앤티크 가구로 꾸민 딸 소민이의 방.


4, 5, 6
놋그릇을 데코 소품으로 활용하는 아이디어. 접시는 액세서리 함으로, 커다란 유기 볼에는 과일을 소담하게 담아둔다.


놋그릇이 이렇게 화려할 줄이야!
숱한 담금질과 불질을 반복해야만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유기는 그릇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술품에 가깝다.


1
단팥을 곁들여먹는 홍시. 
2 현미로 만든 인절미에 미숫가루, 검은깨소스를 곁들인 아이스크림을 얹어 먹는 디저트.


통인동 골목길의 고즈넉한 정취에 잘 어우러지면서도 단정한 멋이 느껴지는 놋그릇 가게 ‘놋:이’와 카페 ‘놋그릇 가지런히’.

천천히 완성하는 작고 겸손한 집
지난 6개월간 거창과 서울을 오가며 지은 작고 아담한 건물. 1층 카페에서는 자연 차와 곁두리(주전부리)를 판매한다. ‘식문화’라는 것이 결국 감정을 다루는 일이라 무엇보다 사람들 간의 교감이 중요하다고 믿는 김순영 씨는 이곳에서 손님들과 소통하며 전통문화의 멋을 전파하고자 한다. 단팥을 곁들인 홍시, 제주 금귤차, 대추 라테, 미숫가루와 검은깨소스를 곁들여 먹는 인절미 와플 등은 전통 먹을거리를 응용한 메뉴. 모든 음료와 디저트는 유기에 담아내는데, 사용하면서 불편한 점 등 손님들의 의견을 수렴해 보완할 생각이다. 2층에 자리 잡은 ‘놋:이’는 유기 작품 전시 공간으로 이용구 선생의 전통 방짜 유기와 이경동 씨의 모던 식기가 어우러져 있다. 유럽 앤티크와 고가구, 서양 촛대와 전통 한지등 등 이국적인 요소가 조화를 이룬다. 특히 놋그릇과 샹들리에의 화려한 매치가 돋보이는 테이블 세팅은 손님 초대나 파티에도 활용해봄 직한 아이디어다.

3, 4층 주거 공간은 밝고 정갈하게 꾸몄다. 꼭 필요한만큼 적당한 크기의 방, 합리적 수납장도 통일성 있게 갖췄다. 또 크고 작고, 길고 짧은 다양한 형태의 놋그릇은 화장대에서는 액세서리 함으로, 거실에서는 화기로, 주방에서는 저장 용기로 쓰인다. 4층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아들 상석 군의 공간이다. 옥상과 연결되어 햇살이 듬뿍 들어오는 이곳 거실은 새로운 일에 도전장을 내민 엄마에게도 가장 편안한 안식처다. 마지막으로 이 집의 백미는 지하의 한실 게스트룸이다. 넓은 좌탁과 한지등으로 여백의 미를 완성한 이 온돌방은 ‘놋’으로 인연을 맺은이라면 누구나 편히 머물다 갈 수 있는 쉼터다.

(왼쪽) 놋그릇을 샹들리에와 매치하니 화려하면서도 격조 높은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천천히 하나씩 채워가면서 대중과 교감하는 공간을 완성하고 싶다는 김순영 씨. 그래서일까, 들여다볼수 록 새롭고 이야깃거리가 생겨나는 ‘놋:이’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편안한 멋이 흐른다. 그는 얼마 전 채소 소믈리에 과정도 마스터했다. 건강 먹을거리를 전통 식문화와 접목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요즘에는 금속공예를 배운다. 이렇게 쌓은 노하우로 하반기에는 클래스도 펼칠 예정이다. 겉멋보다는 내실을 다져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그에게 ‘놋:이’는 대중을 향한 즐거운 과제이자, 개인의 삶에 훨씬 많은 이야기가 채워질 가족의 앨범이다.

글 이지현 기자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