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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들의 이구동성 당신이 우울하다고 말할 때

거래처 사장이 술 한잔 하자고 했다. 회사를 차린 지 1년이 되지 않은 그는 선배 사장에게 조언이 듣고 싶다고 했다. 그이의 속이 어떨지는 척하면 삼천 리, 안 봐도 비디오다. 원대한 꿈을 가지고 차린 자신의 회사에서, 사장이라고 폼 잡으며 결재만 하고 있기에는 현실이란 것이 그리 녹록지 않을 것이다. 매달 적토마의 속도로 다가오는 월급날에는 직원들 급여 챙기느라 정신이 없을 테고, 툭하면 사표를 던지는 직원들 눈치 보느라 가자미 눈이 되었을 것이다.

주변의 베테랑 사장 두 명과, 아예 심리 상담사 후배까지 대동해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사장 1년 차를 회상하며 오늘 후배 사장 앞에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자신의 고생담을 들려주리라 잔뜩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뒤늦게 나타난 주인공은 소주 석 잔을 벌주로 ‘원샷’ 한 후 우리의 기대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말을 했다. “사장님, 사실은 오늘 집안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 술 한잔을 청했던 거예요. 공장 이야기가 아니라요.”

아내 이야기였다. 결혼 7년 차, 아이 둘을 키우는 아내의 짜증이 요즘 너무 잦다고 했다. 우울하다는 말도 빈번해진다고 했다. 살림에 질리고 아이들 키우는 것에 지쳐서 그런가 보다 싶어 매일 도서실도 가게 하고, 문화센터 강좌도 등록해줬다. 그런데도 아내는 왜 자기만 이 고생을 해야 하냐며 불평을 한다는 것이다. 월급쟁이 시절에는 아내가 화를 내면 달래기도하고,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보내며 아이들을 챙겼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이 초보 사장의 하소연이었다. 회사를 설립한 후 하루 24시간을 회사 고민에 잠도 못 잘 지경인데 아내는 그런 사정을 전혀 몰라주고 자기 감정만 드러낸다고 서운해했다. 자기감정에 복받친 그이는 에라 모르겠다, 술김에 다 털어버리겠다는 듯이 울부짖었다. “도대체 여자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아니 그럼 사는 게 다 힘든 거지. 나는 안 외롭고 안 우울하나? 왜 툭하면 우울하다고 하고, 늘 자기만 죽겠다고 하냐고요?”

(왼쪽) 신현준, ‘고독’, 나무, 동, 22×17×49cm, 2007

사장 경험담을 잔뜩 준비한 다른 남자들은 예상치 못한 주제에 잠시 당황했으나, 그의 고민 속으로 어느덧 풍덩 들어가 고개도 끄떡이고 한숨도 폭폭 쉬는 추임새까지 넣다가는 한 명씩 자기 집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말도 마시오. 나는 그 문제로 10년 동안 소주 1만 박스는 마셨을 거요.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집사람의 감정은 정말로 예측 불허야. 어제까지는 좋다가도 갑자기 오늘은 기분이 우울해지고, 아까까지도 생생하다가 별안간 피곤하다며 짜증 내고.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지, 이랬다저랬다 하니 죽겠는 거라. 집사람도 우울증이란 말을 달고 살았어. 나는 이해가 안 되는 거야. 남편이 돈 잘 벌어다주겠다, 아이들 잘 크겠다, 누구네 집처럼 시댁이 속을 끓이기를 하나, 정말 왜 그리 유난인지 모르겠더라고.지금은 늙어서 싸울 힘도 없지만 말야.”

결혼 20년 차의 말이었다. 심지어 상담해주라고 데려온 결혼 2년 차 상담사 후배도 말문 트인 벙어리 삼룡이처럼 자기 아내 이야기를 쏟아냈다. 졸지에 그 자리는 ‘우울증’ ‘신경증’ ‘예민’ ‘변덕’과 같은 단어가 슝슝슝 창공을 날아다니는 자기 아내의 성토장으로 바뀌었다. 이전에 이런 식의 뒷담화를 해본 적이 없는 다섯 명의 남자는 묘한 동지의식까지 공유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찜질방, 미용실에 옹기종기 모여 자기 신랑 흉도 잘 본다지만 남자들에게 그런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부모 형제에게 아내 흉을 보면 못난 놈 소리 듣는 것은 기본이요, 집안 분파만 일어날 것이고, 친구들에게 자기 아내 흉을 보는 ‘쪼다’ 짓을 자초할 남자는 없다. 익명으로 여자 회원 많은 사이트에 가서 방금 했던 말을 했다가는 무식한 마초라는 욕만 듣고 강퇴 당할 것이 ‘뻔할 뻔’자다.

물론 이들도 감기처럼 자주 찾아오는 여자들의 우울증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도 알고 있다. 우리나라 여성 다섯 명중 한 명은 우울증을 앓고 있고, 선진국에서도 여성이 남성보다 두 배 이상 우울증 증세를 보인다는 말을 상담사가 했을 때도 다들 알고 있다는 분위기였다. 여성이 남성보다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고 육체적 변화, 일 조량이나 계절의 영향 등에서도 여성들이 더 민감하다고 할 때도 알고 있는 시험 문제를 푸는 학생의 반응이었다. 우울증과 신경증과 짜증과 예민함으로 마음고생하는 아내가 가엾고, 어쨌거나 자신들이 평생 책임지고 함께 가야 할 동반자라는 믿음도 흔들림이 없었다.

단지 그들은 단 한 번만이라도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울하다고 말하는 당신이 너무 안쓰럽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도 우울해서 미쳐버릴 지경이라는 것을 알아줘.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정말 많이 외롭고 불안하다고.” 그날 밤 남자들은 서로에게 그 말을 하며 건강하게 취해갔다. 앞으로도 없을 이 특별한 뒷담화의 시간은 “영업 끝났으니 쓸데없는 소리들 말고 어서 마누라에게 가라”는 욕쟁이 주인 아주머니의 잔소리로 그렇게 파장이 났다.

윤용인(노매드 미디어&트래블 대표, www.nomad21.com, 트위터 @ddubuk) 작품 이미지 제공 신현준(조각가) 

담당 최혜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