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귀 기울여 들어보니] 뮤지션 양방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재일 한국인’ ‘음악을 위해 의사 가운을 내던진 남자’ ‘최고의 크로스오버 뮤지션’… 그를 소개하는 수식어는 많고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진짜 어울리는 수식은 ‘꿈의 탐험가’일 겁니다. 음악이라는 꿈을 위해 치열하게 삶을 담금질한 그는 아직도 신생의 봄 같은 꿈을 몸에 채우고 있으니까요. 역사와 나라와 운명을 초월하는 힘이 음악에 있음을 믿는 신실한 음악가의 이야기입니다.


치파오 디자인의 슈트와 블랙 팬츠, 워커 슈즈는 모두 장광효 카루소 제품.


바람이 불던 날이었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뭐라도 묻지 않으면 누군가 굉장히 어려운 질문을 해올 것만 같은, 그런 날. 얼음 강을 건너온 바람에 잔가지들이 휘청이는 밤, 그가 왔습니다. 일본 가루이자와 시의 산속 집에서 방금 날아온 그의 옷깃에 바람 냄새가 묻어 있다고 느낀 건 착각일까요. 생각보다 작은 몸피와, 도나텔로의 조각상처럼 감정을 가득 채워 빚은 듯한 얼굴, 기운을 아끼려는 듯 낮게 흐르는 목소리까지. 이 인상적인 남자의 등장은 스튜디오의 공기를 미세하게 흩뜨려놓았습니다.

촬영 준비로 짬이 생기자 그는 착한 눈 그늘을 만들며 스태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를 챙기고(그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 그의 인간적 매력에 반한다는 말이 사실!), 사진가의 카메라 렌즈를 신기한 듯 들여다보고, 끊임없이 질문을 건넸습니다. “제가 하는 우리말이 이해가 되세요? 통하는 건가요? 잘한다고요? 나는 나의 실력을 알고 있어요. 하하. 근데 부족하지만 우리말로 소통하고 싶어요. 우리말로.” 재일 한국인 2세에게 듣는 서먹한 우리말. 그 성긴 발음으로 꾹꾹 눌러 말하는 ‘우리말’이란 단어에 불현듯 나는 KBS 다큐멘터리 <세 번의 만남>에서 그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이건 파스포트(‘패스포트’가 아닌 ‘파스포트’란 발음). 유효기간이 좀 지난 여권인데 왜 이것을 지금 가지고 있냐면, 저는 한국인이지만 다시 일본에 돌아가야 해요. 그때 재입국이라는 허가가 필요해요. ‘나는 일본에 사는 외국 사람입니다’라는 증명. 이것이 없으면 일본에 못들어가죠. 이걸 갖게 되기까지 30여 년이 걸렸어요.” 이 암호 같은 말은 분명히 어떤 사연을 담고 있을 것입니다. 많은 곡절을 주름치마처럼 접어둔 그의 이야기.

양방언梁邦彦. 그는 클래식ㆍ록ㆍ월드 뮤직ㆍ재즈 등 장르를 넘나들며, 아시아와 유럽을 넘나들며, 작곡가ㆍ연주가ㆍ편곡가ㆍ프로듀서 등 영역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세계적 뮤지션입니다. ‘의사 출신 피아니스트’ ‘크로스오버 뮤지션’이라는 별칭도 매양 따라다닙니다. 영화, 게임, 다큐멘터리, CF 등 그의 음악을 활용하지 않는 미디어는 찾기 힘들 정도이기도 하죠. 2002 부산아시안게임 공식 주제가 ‘프론티어Frontier!’, 임권택 감독의 1백 번째 영화 <천년학>의 OST, 성룡 주연의 영화 <썬더볼트>ㆍ드라마 <상도>ㆍ이청강 감독의 애니메이션 <천년여우, 여우비>ㆍ일본 애니메이션 <십이국기><채운국 이야기> 등의 OST, 다큐멘터리 OST 역사상 최다 판매고를 기록한 〈차마고도〉의 음악, 흥행 기록을 매달 갱신하는 온라인 게임 ‘아이온’의 배경음악….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입이 버썩버썩 마르는 업적까지 더한 그. 이렇게 폭넓은 세계를 담기에 몇 시간의 인터뷰가 가당키나 한 걸까요. 어쩌면 인생은 사는 것보다 설명하는 게 더 어려운지도 모릅니다.

경계인 또는 중간 사람
그의 이름엔 ‘나라 방邦’ 자가 불도장처럼 찍혀 있습니다. “재일 교포 1세대인 아버지가 의미를 담아 지은 이름이죠. ‘지금 우리 세대는 어렵지만 네가 자라면 나가서 많은 나라를 보고,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우리나라에 돌아와라’라며 이름을 지어주셨어요. 어릴 땐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어요. 그런데 나이를 먹고 여러 나라를 ‘만나다’ 보니 아버지의 말씀이 와닿았어요.” 제주가 고향인 아버지와 신의주가 고향인 어머니 사이에서 다섯 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 의사로 번 돈을 조총련계 학교를 운영하는 데 보태던 아버지는 자식들 모두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한국 국적도, 북한 국적도 아닌 조선적籍(일제 패망 이후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에게 자동으로 부여된 국적. 남 북한 정부 수립 이후 일본 정부에서는 이 국적에 대해 무국적 처리를 했지만 조선적을 가진 교포들은 하나의 조국을 바라며 남북한 국적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일본 영주권만을 가진 채 아무런 정치적 권리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으로 당당하게 살려면 의사만큼 좋은 직업이 없다는게 그 이유였다지요(그를 뺀 나머지 4남매가 모두 의사 또는 약사가 되었다).

(왼쪽) 바람과 숲의 소리, 나무의 향기에게도 음악의 지위를 부여하는, 그렇게 바람 같은 음악을 하고 싶다는 양방언 씨. 맨발이 잘 어울리는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블랙 셔츠와 팬츠는 모두 장광효 카루소 제품.

“나는 조선적을 가진 채 조총련계 초ㆍ중학교를 다녔고, 조총련 학교를 학력으로 인정하지 않는 제도 때문에 일본계 고등학교엘 다녔어요. 중학교 시절 ‘퇴폐적인 서양 음악’을 들었다는 이유로 체벌을 당한 적도 있고, 고등학교 때는 ‘일본인이 왜 조선인과 함께 공부해야 하는가’란 기사가 실린 학급 신문을 보고 놀란 적도 있죠. 하지만 나는 냉대와 차별을 일부러 의식하지 않았어요. ‘조센징’이란 말을 들은 날 집에 와서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풀리는 거예요. 학교에서 피아노를 치면 날 ‘조센징’이라 부르는 아이들도 내게 오더라고요. 혼자 괴로워하기보다는 마음으로 소통하길 원했어요. 어릴 때 아버지는 늘 ‘너는 한국 사람이다. 그러나 일본 사회에서 살아간다. 그러기 위해서는…’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셨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성인이 되고 보니 알겠더라고요. 우리들은 중간에 있는 거예요. 어느 쪽이냐보다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무게중심을 두면 우린 양쪽을 보고 있는 사람이죠. 일본 사회도, 한국 사회도 모두 보는. 우린 이상한 사람이 아니에요. 양쪽을 본다는 건 좋은 거예요. ‘중간 사람’ ‘경계인’ 그게 제 운명입니다. 그렇다면 중간 사람만 할 수 있는 음악을 하자고 생각했죠.” 우린 ‘이방인’이라는 틀에 그를 놓고, 거미집에 잘못 자리 잡은 잠자리의 사투 정도를 예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 아니라 중간 사람입니다. 초나흗날 노을과 여명 사이를 배회하는 달그림자 같은.

중간 사람의 음악이어서일까요? 그의 음악에서는 바이올린이 아쟁 소리를 내고, 퍼커션이 북 소리를 내는 등 동서양 악기가 부딪치며 격정적으로 몸을 섞습니다. 각각의 고유한 음성에서 경계를 허문 소리로 나아가는 기이한 풍경이죠. 또 클래식ㆍ록ㆍ월드 뮤직ㆍ국악 등의 장르를 넘나들지만 장르적 요소는 모두 버린 음악. “ ‘그 곁을 지나오면서’ 영향을 받았고, 또 영향을 받고 있는 거죠. 나는 내 음악이 이념을 떠나 서로 다른 세계,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 좋겠어요. 아버지가 준 ‘나라 방’이란 글자는 이렇게 큰 의미를 담고 있었어요.”

여러분,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공식 음악인 ‘프런티어’를 떠올려보세요. ‘동양적’ ‘서양적’이란 수식이 불가한, 차라리 실크로드의 광막한 사막을 추억하게 하는 선율, 그 대륙적 음악은 이렇게 탄생한 겁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음악이어서일까요? 그의 음악은 올림픽에서 IOC 위원이 입장할 때도, 명절에 홈쇼핑에서 갈비를 판매할 때도, 동이 터오는 새벽이나 비오는 밤에도, 공연장에서도 ‘유효’합니다. “바로 다가오는 음악, 어렵지 않은 음악, 머리가 아니라 가슴속에 먼저 들어오는 음악. 소리가 아닌 울림으로 기억되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심지어 그는 바람의 소리, 숲의 향기나 습기에게도 음악의 지위를 부여하고 싶다는군요. 그래서 10여 년 전 가루이자와(나가노 현의 작은 도시)로, 그것도 내비게이션에서도 검색되지 않은 산중에 자리 잡았습니다. 보통 음악 작업실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방음인데 그는 큰 스튜디오 창문을 열고 연주도, 녹음도 합니다. 다큐멘터리 <세 번의 만남>에서 PD가 “왜 산속에 사나요?”라고 묻자 창문을 열고는 잠시 고요하게 있더니 “바람이 불면, 새소리가 들리면 연주가 이렇게 달라지는 거예요” 하며 피아노 치던 그 장면이 다시 떠오릅니다.


“너는 바보다”
그의 인생은 수정으로 된 계단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의사라는 ‘성공과 명예 보장 직종’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요. 이 삶의 갈피를 더 들여다볼까요? 야구를 하고 싶었으나 누나 손을 잡고 피아노 학원에 끌려다니던 여섯 살배기, 형 방에 몰래 들어가 듣던 바흐와 모차르트, 정수리에 벼락이 내리꽂히듯 록 음악에 이끌려 밴드에 들어간 고교생 방언, “의대에 가지 않을거면 집을 나가라”는 아버지의 통보에 음대 진학을 포기하고 들어간 일본의과대학, 대학 록 서클(퓨전 밴드로 유명한 티스퀘어를 배출한)에서의 활약, 대학을 그만두고 곧장 음악에 뛰어들고 싶은 그를 주저앉힌 아버지의 와병, 의대 졸업 후 의사 면허를 따고 시작한 마취과 의사 생활, 1년 만에 의사 가운 대신 음악을 선택한 스물다섯 살의 청년…. 강물 같은 이 이야기 속에는 음악과 어질머리 같은 사랑을 앓는 한 남자 그리고 그 아버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의사로 살면서 음악을 취미로 하지 그랬냐고요?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은 취미가 아니었어요. 음악을 인생으로 삼는다는 절실한 선택이었어요. 아버지의 원대로 의사 면허를 받은 뒤 바로 음악의 길로 가려 했는데, 이런 생각이 들데요. ‘혹시 음악 하다가 힘들어지면 의사를 할 걸 그랬나 후회할 수 있다, 일단 해보자’. 1년 후 답이 나왔어요. ‘이 또한 훌륭한 직업이지만 역시 나는 음악을 해야겠다’라는. 그 길로 가출을 감행했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버지를 만났죠.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그 후 아버 지는 제게 그 어떤 말씀도, 용서도 하지 않으셨죠. 돌아가실 때까지도, 하늘에 계신 지금도…. 인정을 못 받은 상태에서 아직도 음악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 말끝에 그가 미소 짓습니다. 그 미소 한 귀퉁이에 슬픔이 있는 것 같다고, 나 혼자 생각합니다. “의사 그만둘 때 의사 친구들도, 뮤지션 친구들도 ‘너는 바보’라고 했죠. 50만 원 들고 가출했으니 좀 힘들었어요. 하지만 음악을 할 수 있으니 그걸로 좋았어요. 음악이 바로 내 인생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나만의 오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내가 행복해지면 아주 좋은 거죠. 내 행복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되니까. 음악을 한다는 것만으로 난 행복할 수 있으니까.”


“나 행복하냐고요?”
이후 무명 연주가 시절을 거쳐 세계적 밴드 카시오페아의 세션맨, 전설의 가수 하마다 쇼고와 홍콩 밴드 비욘드의 음반 프로듀싱을 거치며 아시아의 히트 뮤지션으로 우뚝 섰다. 30대에 프로듀서 겸 작곡가로 승승장구했으나 자신의 음악 열정이 상업적 구도 속에 마모된다고 생각하고 돌연 순수 음악을 선언한 열혈 청년, 1996년 처음 나온 음반 <더 게이트 오브 드림스The Gate of Dreams>,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한국 국적을 얻게 되면서 찾은 모국으로부터의 감동, 아버지의 고향인 한국과 제주도의 기억이 불러일으킨 음악적 영감, 고국에서도 명성을 드날리는 음악가가 된 1960년 1월 1일생의 한국 남자, 누에고치처럼 몸속 음악을 마구 뽑아내 만든 여덟 장의 솔로 앨범 그리고 올겨울 선보인 9집 앨범 <플로팅 서클Floating Circle>…. 모든 걸 던져야 실마리를 조금 내보이는 음악의 이기적인 힘 때문일까요? 지금까지 그의 생은 가쁘고, 치우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과연 음악엔 매혹 이상의 무엇이 있는 걸까요? 그걸 이해하려면 그의 음악 앞에서 진중한 청중이 되어야겠지요. 여치 떼처럼 화려한 불빛으로만 뛰어드는 인간 속에서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데 몰두한 이 남자의 세계.

“나 행복하냐고요? 오를 땐 힘들지만 마침내 산꼭대기에 서면 다른 봉우리들이 보인다는 거죠. 그래서 계속 산을 오르듯 음악에 빠져 사는 거예요. 이번 새 음반 타이틀 곡이 ‘아워 스텝Our Steps’인데, 그건 희망이라는 말과도 통해요. 한 걸음 한 걸음 즐거워하면서, 비록 그 행복이 오해라 할지라도 즐거워하면서 자기 인생의 산꼭대기를 향하는 과정이랄까.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지 않냐고요?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인생이 재미없어져요. ‘이걸 이만큼 할 수 있다면 다른 것도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요. 이 말엔 아버지도 동의하실 거예요. 나를 용서하지 않고 돌아가셨지만 내 이름과 나에 대한 바람을 음악으로 이뤄드렸다고 생각해요. 인생을 다 걸 만큼 음악이 가치 있었냐고요? 있었죠. 이 시점에서 그게 없다면 그만두겠어요.” 마침 ‘아워 스텝’이 온수처럼 스튜디오 안의 낮은 곳을 흘러 다니고 있습니다.

(왼쪽) 지난 12월 선보인 양방언 씨의 아홉 번째 솔로 앨범 <플로팅 서클>

이야기가 끝나고, 저녁이 됐습니다. 겨울바람이 빌딩 모서리를 돌아 옷깃 속으로 파고드는 밤, 어디선가 바람의 노래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의 음악 ‘서클 리미트Circle Limits’가 MP3 플레이어 안에서 가로등처럼 깜빡이고 있습니다.


스타일링 박명선 헤어&메이크업 제갈경 의상 협조 장광효 카루소(02-547-0753)

글 최혜경 기자 사진 민희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