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묵호등대에 불이 켜지면 오징어잡이 선박의 조명등이 수평선에 걸린다.
2, 3 7번 국도의 바다는 바람의 영역이다. 갈매기가 휴식을 취하고, 오징어도 춤추는!
7번 국도 여행의 시작
7번 국도 여행의 출발지는 강릉이다. 강릉은 커피의 도시다. 커피 명인으로 유명한 박이추 선생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보헤미안’을 비롯해 ‘테라로사’ ‘커피커퍼’ 등 유명 카페들이 도시 곳곳에 있다. 겨울 바다를 보며 커피를 즐기기에 안목 해변이 멋진 무대 역할을 한다. 10년 전만 해도 이곳은 강릉 사람들이 즐겨 찾는 횟집촌이었지만 지금은 해변을 따라 커피 전문점이 가득 들어섰다. 대부분의 카페에서 커피를 직접 볶고 내리는 까닭에 어느 곳을 가든 품질 좋은 커피를 만날 수 있다. 커피 맛만큼 풍치도 근사하다. 카페 대부분의 벽이 전면 유리로 되어 있어 바다가 창을 통해 마음속 깊이 들어온다. 커피를 마시며 바라보는 겨울 바다. 역시 떠나오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안목해변을 나와 다시 7번 국도를 따라 내려간다. 크고 작은 포구들을 지나면 어느새 정동진이다. 드라마 <모래시계> 촬영 장소로 알려진 후 숙박업소와 식당, 편의점과 주점 등이 정동진을 ‘점령’했다. 하지만 정동진을 지나 심곡항에 이르면 실망이 탄성으로 변한다. 심곡항에서 금진항까지 이어지는 2.4km 구간은 해안 드라이브 매력의 정점을 보여준다. ‘헌화로’라 불리는 이 길은 바다와 가장 가까운 해안 도로로 알려져 있다. 도로와 해수면의 차이가 2m밖에 되지 않아 바람이 거센 날이면 파도가 차창을 때리는 일도 생긴다. 도로 옆 바다에는 거북이 모양을 닮은 거북바위를 비롯해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해안단구의 풍경이 얼마나 경이롭고 근사한지 故 김일성이 이곳에 별장을 지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이야기까지 들린다.
한 잔 소주 같은 바다
“바다, 한 잔의 소주와 같은 바다였다.” 마르시아스 심의 소설 <묵호를 아는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이어서 “내게 있어 동해는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술, 한 잔의 소주를 연상케 했다. 어느 때엔 유리잔 벽에서 이랑 지어 흘러내리는 소주 특유의 근기를 느껴 메스껍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것은 단숨에 들이켜고 싶은 고혹적인 빛깔이었다. 파르스름한 바다, 그 바다가 있는 곳 묵호”라고 표현했다. 행간 속에서 먼저 만난 묵호가 보고 싶었다. 강릉을 빠져나와 7번 국도를 따라 달리니 어느새 동해 묵호항이 보였다. 묵호항은 동해안 포구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포구에 들어서면 코끝에 바다 비린내가 걸린다. 길가에는 오징어가 바닷바람에 펄럭거리며 널려 있고, 그 밑으로 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린다. 오징어를 판매하는 상인들의 외침이 들리는 포구는 큼지막한 아이스박스를 메고 어판장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관광객들과 교차되어 낯선 풍경을 만든다.
묵호 어시장 뒤편 산등성이로 고개를 돌리면 붉고 푸른 기와를 얹은 주택이 빼곡하게 붙어 있는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에 묵호등대가 홀연히 서 있다. 이곳에서 마르시아스 심의 표현대로 ‘한잔의 소주’가 떠오르는 동해와 만난다. 묵호항에서 이 마을까지 등대오름길이라 불리는 길이 이어진다. 길을 따라가면 과거 묵호항의 낭만과 마을 풍경을 추억해 그려놓은 벽화를 만날 수 있다. 출항하는 오징어잡이 선박, 해풍에 건조되는 오징어, 동네 주점과 이발소, 구멍가게 등이 그려진 벽화는 마음 한쪽을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묵호등대의 풍경은 해 질 무렵이 가장 볼만하다. 등대에 불이 켜지면 오징어를 유인하기 위해 배에 걸어놓은 조명등이 수평선에 걸린다. 바다에 떠 있는 어화漁火는 꿈처럼 아득하다.
4 묵호 어시장에서는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경매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경매사가 암호를 중얼거리면 시장 상인들의 손짓은 바빠진다.
5 오징어를 몇 마리 구입해 묵호항의 한 횟집에 들어가면 물회를 만들어주는데, 얼음물을 부어 마시면 숙취 해소에 으뜸이다.
쪽빛 바다가 부드러운 너울을 만들며 아름다운 풍광을 뽐낸다.
묵호 어시장 뒤편에서 만날 수 있는 소박한 낭만 마을.
묵호항에서는 물회가 제맛
도시인들이야 오징어라고 하면 말라비틀어진 것을 먼저 떠올리지만 묵호항에서 말린 오징어는 대접을 받지 못한다. 묵호항에서 오징어를 제대로 먹는 방법은 물회로 즐기는 것이다. 원래 물회는 과거 뱃일에 바쁜 어부들이 배 위에서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활어를 거칠게 썰어 초고추장을 푼 물에 말아 먹던 음식이다. 양념과 각종 채소를 넣어 버무린 생선회에 얼음물을 부어 먹는 맛은 얼큰하고 시원해 숙취를 해소하는 데 그만이다. “여기서 오징어를 사 묵호항에 있는 횟집 아무 데나 들어가. 그리고 물회 말아달라고 하면 금방 만들어줘. 그냥 양념값만 얹어 주면 돼.” 포구에서 만난 아주머니 말대로 오징어 몇 마리를 사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물회가 식탁 위에 올랐다. 큼지막한 대접에 오징어와 오이, 무채, 다진 마늘 등이 수북이 쌓였다. 초고추장을 뿌리고 육수를 넉넉하게 부어 물회를 말았다. 매콤하면서도 시원한 맛에 탄성이 절로 났다. 젓가락으로 점잖이 먹다가 대접을 집어 들고 후루룩 마셨다. 고작 유람선밖에는 타본 적 없는 서울 사람은 뱃사람들이 그물을 걷어 올리며 즐겨 먹던 맛을 결코 알 수 없다. 하지만 물회를 직접 먹어보니 어림짐작이라도 그 맛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부들은 그렇게 밤새 오징어 선주낙을 걷어 올리던 노곤한 몸을 물회 한 사발로 추슬렀으리라.
7번 국도는 이어 추암해변에 닿았다. 추암해변은 애국가 영상의 일출 장면을 촬영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해마다 1월 1일이 되면 일출을 보려는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에 모여든다. 해변에는 갖가지 모양의 기암괴석이 늘어서 있는데, 그중 절묘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하늘을 찌를 듯한 형상으로 우뚝 솟아 있다. 이 바위가 바로 추암촛대바위다. 바위 사이로 불쑥 솟아오르는 붉은 일출은 가슴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든다.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기찻길을 달리면 파도가 가슴속으로 들어온다.
곰칫국 그리고 다시 바다
추암을 벗어나면 곧 삼척이다. 삼척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시내에 죽서루가 있다. 예부터 대관령 동쪽의 아름다운 여덟 곳을 가리켜 ‘관동팔경’이라 불렀는데, 삼척에 흐르는 오십천川 절벽 위에 지은 누각 죽서루는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누각에 서면 ‘S’자 모양으로 흐르는 오십천이 내려다 보인다. 누각 입구에 대나무 숲길이 있어 기분 좋은 산책도 즐길 수 있다. 술과 우정을 나누며 인생을 담론하던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삼척에서 포구를 돌아보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삼척항에 도착하면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어시장과 선박들이 빼곡히 들어선 포구를 먼저 만난다. 빠른 손놀림으로 싱싱한 활어를 양동이에 담아 경매장으로 옮기는 시장 상인들, 그물에서 고기를 걷어내는 아낙네들의 고단한 손놀림, 눈앞에서 펄떡거리는 생선은 활기찬 포구의 일상을 보여준다.
1월에 삼척항에 가면 곰칫국을 먹어야 한다. 20여 년 전만 해도 곰치는 그물에 걸리면 그냥 버리는 생선이었다. 생김새가 뱀과 꼭 닮았기 때문. ‘텀벙텀벙’ 소리를 내며 헤엄친다고 해서 ‘물텀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이제 곰칫국은 삼척의 별미로 자리 잡았다. 비린 맛이 없고 육질이 연하며, 많이 먹어도 질리지 않아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는다. 곰치 몇 토막에 묵은 김치 썰어 넣어 푹 끓인 곰칫국은 얼큰한 국물과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는 살점 때문에 술을 좋아하는 뱃사람들에게 ‘으뜸’ 해장국으로 꼽힌다.
여행의 마무리는 맹방해변이다. 삼척에서 가장 큰 백사장이 있는 해수욕장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와 유지태가 나란히 앉아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파도 소리를 녹음한 해변이기도 하다. 햇살이 걸쳐 앉은 바다는 온통 쪽빛이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렁이고, 가끔 갈매기의 날갯짓이 반공을 휘젓는다. 사람들이 바다를 찾는 이유가 이런 여유로움을 그리워해서가 아닐까. 7번 국도 여행은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바다와의 조우다. 바다 앞에서 눈은 침묵하고 입은 호사스러우며 몸은 가볍다. 일상에서 만나는 온갖 괴로움은 바다 앞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위쪽) 묵호항에서 등대오름길을 따라 마을 언덕에 오르면 밤바다에 걸린 오징어잡이 선박들이 한눈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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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사진 최갑수(여행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