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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의 대화]현대미술가 토마스 데만트 보이는 게 다 진짜는 아냐
가상과 현실, 평면과 입체, 진실과 거짓의 문제를 건드리는 작품으로 세계적 작가라는 면류관을 쓴 토마스 데만트. 서울에서 열리는 첫 개인전을 앞두고 그와 나는 인터넷이라는 가상 공간에서 만났고, 시간을 잠시 멈춰 세운 채 이메일로 대화했다. 범세계적 예술가와 평범한 서울 시민이 허구의 공간에서 가상의 얼굴을 맞대고 나눈 대화. 그 깊지도, 얕지도 않은 대화에 과연 진실은 숨어 있을까.


‘Kinderzimmer/Nursery’, 2009, C-print / Diasec, 140×230cm, Edition of 6, Courtesy of the Artist and PKM Trinity Gallery


‘Kontrollaum/Control Room’, 2011, C-print/Diasec, 200×300cm, Edition of 6, Courtesy of the Artist and PKM Trinity Gallery


한눈을 팔 때마다 수많은 ‘작가 양반’이 퍼붓듯 쏟아지는 세상에서 적자생존하며 이름을 얻는 예술가, 그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지금 토마스 데만트Thomas Demand라는 예술가를 만나며 현대미술의 한 축을 일람할 것이다. 세상이 원하는 예술이란 무언가에 대한 단서를 가늠하게 될 것이다.

세계적 작가 대열에 합류하며 유명세를 탄 지 오래됐건만 우린 아직 그를 잘 모른다. 보도 자료용 프로필과 꽤 많은 인터뷰 기사들, 인터넷의 바다를 표류하는 수많은 정보로 알아낸 그는 대략 이런 사람이다. 1964년 독일 뮌헨에서 태어나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조각을 전공했고, 현재 독일·영국·프랑스 등지를 유람하며 작업 중이다. 그는 여행을 즐기는 여행광이기도 하다. 실재와 허구라는 문제를 골똘히 탐구한 사진 작품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1990년대 뒤셀도르프 아카데미 출신 사진작가들이 세계 미술 시장에서 각광을 받으면서 그는 ‘세계적 작가’라는 면류관을 썼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 까르띠에 파운데이션,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 등 세계 정상급 미술관에서 이른 나이에 초대 개인전을 열었다. 2008년엔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했다.

이제 그를 양명의 터전 위에 서게 한 작품을 들여다볼까. 그의 작품엔 숨은 서랍이 너무 많으니 대충 흘려봐선 안 된다. 그의 작품속 모든 사물은 실은 종이로 정교하게 만든 세트다. 세상을 출렁이게 한 역사적·정치적·사회적 사건의 현장이나 자신의 기억이 머무는 공간을 종이(주로 cardboard라는 판지)로 창조한다.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 ‘오직 한 번만 허락받은 존재’인 종이로 시간과 공간을 ‘건축’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유령이 나오는 집을 샀다는 부부의 이야기를 신문 기사에서 읽고, 그 상황을 상상해 ‘유령(Ghost)’이란 작품을 만들었다.

2008년 광주비엔날레 출품작인 ‘옐로 케이크Yellow Cake(‘농축 우라늄’이란 뜻도 있다)’ 는 더욱 흥미롭다. 그는 ‘로마 주재 니제르 대사관의 문서 도난 사건’이라는 신문 기사 한 줄을 읽고 작품을 기획했다. 북아프리카의 니제르가 후세인 정권에 핵무기 제조용 농축 우라늄 5백 톤을 판매하는 계획이 담긴 비밀 문서가 도난됐다는 기사인데(미국 정보 기관의 조사 결과, 이 비밀 문서 내용이 가짜라고 밝혀졌는데도 미국은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 보유를 주장하며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는 도난 사건이 일어난 2001년의 범죄 현장을 상상으로 재현해냈다. 니제르 대사관 깃발이 보이는 건물로 들어서서 몇 개의 문을 지나면 도난 사건 현장인 사무실이 나타난다. 흐트러진 서류로 난장판이 된 사무실을 바라보는 관람객은 꼼짝없이 도난 사건의 목격자가 된다. 이 작품은 미국의 대 對이라크 전쟁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실’이라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허구’일지도 모르고, 수많은 ‘사실’이 모여 ‘허구’를 만들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넌지시 건넨다. 신문 기사 한 줄에서 이렇듯 거룩한 뜻을 솎아내는 예술가, 그가 적자생존한 이유를 알겠는가?

어린 시절 자신이 쓰던 방을 기억하며 만든 작품 ‘아기 방 (Kinderzimmer-nursery)’, 1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를 추모하며 1931년 독일·오스트리아 국경에 만든 오르간(4천3백7개의 파이프로 된 오르간으로, 80년 동안 매일 정오에 똑같은 곡조를 연주한다)을 복제한 작품 ‘영웅의 오르간(Heldenorgel-Hero’s Organ)’, 독일 아이돌 그룹 ‘토키오 호텔Tokio Hotel’의 카우리츠 형제가 음악의 꿈을 처음 모의한 버스 정류장을 본떠 만든 ‘정류장 (Haltestelle)’도 있다. 물론 그는 오로지 종이만 사용해 이 공간을 창조해냈다. 그러고는 사진으로 고이 찍어두는 것으로 그 시간과 공간에 정중한 예의를 표한다. 그다음 그는 이 종이 모형을 없애버리면서 작업에 종지부를 찍는다.

현실에서 비롯한 가상 공간을 종이로 만들고, 그걸 카메라라는 ‘사실 재현’ 도구로 촬영하며(실은 그 사진이 조작된 실재를 촬영한 것으로, 결국 허구를 만들어낸 것이라는 데 아이러니가 있다), 그 허구인지 사실인지 모르는 공간을 폐기 처분하는 토마스 데만트. 그는 가짜가 더 진짜처럼 사는 세상, 가짜의 오르가슴을 이야기하려는 걸까. 어쩌면 거짓말 같은 사실을 이야기하려는 건지도 모른다. 역시 그에겐, 그의 작품엔 숨어 있는 서랍이 아주 많다. 그의 세계를 좀 더 이해하고 싶어 나는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그는 여행 중 시간을 쪼개 성실히 화답했다. 내가 보낸 질문엔 ‘프루 스트의 질문(마르셀 프루스트가 열네 살 때 <고백: 사고와 감정을 기록하는 비망록>이란 책을 읽고 뽑아낸 질문으로, 소소한 신변잡기의 질문이 오히려 상대의 철학이나 취향을 엿보는 단서가 된다)’도 포함돼 있다.

(왼쪽) ‘Tribute’, 2011, C-print/Diasec, 166×125cm, Edition of 6, Courtesy of the Artist and PKM Trinity Gallery
(오른쪽) ‘‘Paket/Parcel’, 2011, C-print/diasec, 108×93cm, Edition of 6, Courtesy of the artist and PKM Trinity Gallery


당신이 만드는 게 정치적·사회적·역사적 사건 현장이라고 해도 그 실제를 찍은 사진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런 면에서 당신은 상상력이 대단한 사람 같다.
사진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도 많고, 남아 있다 해도 대개 신문에서 발견한 작은 이미지밖에 없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를 대부분 다시 떠올리고 상상해야 한다(한 가지 예로 이미지를 통해서는 크기를 측정할 수 없으므로).

당신은 종이라는 인간과 친숙한 소재로 작품을 만들지만, 작품 속 공간은 건조하다. 똑같은 질감의 사물로만 이뤄져서인지 서늘하고 낯설기도 하다.
누군가 이 공간을 사용한 흔적이나 불필요한 세부 요소를 일부러 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장소가 유토피아처럼 보이기도 하고, 시간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건 컴퓨터로 만든 이미지와 비슷한 점이기도 하다. 또 판지로 공간을 재구성한다는 건 세상을 기하학적 형태로 해석한다는 뜻으로, 이것 역시 컴퓨터로 만든 이미지와 유사한 점이다.

그런데도 당신의 작품 속에선 그곳에 머문 인간의 행동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게 아주 흥미롭다. 내가 작품을 잘못 읽은 건 아닌가?
아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사진 속에 사람이 들어가면 ‘장소’가 ‘배경’으로 바뀐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른쪽으로 긴 창문이 난 도서관을 떠올려보자. 햇살이 먼지 자욱한 공기를 밝히고 책 몇 권이 놓인 탁자를 비춘다. 뒤로는 진갈색 책장에 낡은 책이 꽂혀 있다. 그다음엔 이 공간에 소녀 두 명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둘이 탁자에 앉아 서로 속삭이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미지는 도서관이라는 장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도서관의 두 소녀 이야기로 바뀐다.

보통 한 작품을 만드는 데 2~3개월이 걸린다던데, 공간을 만들며 자신이 ‘건축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나?
그렇지는 않다. 물론 건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내가 하는 작업 역시 실내 공간에 대한 것으로 모두 건축 영역이다. 또 관객이 보는 공간과 사물이 모두 실물 크기다. 하지만 나는 비율과 규모, 부피감을 중요시하는 조각가 출신의 예술가다.

사람들이 당신 작업에 대해 설명할 때 ‘사실’ ‘허구성’이란 단어를 가장 많이 쓴다. 당신이 생각하는 ‘사실’ ‘진실’ ‘허구’의 의미는 무엇인지 압축해 설명하자면?
감정을 담지 않으면 우리는 단 1분도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읽는 기사는 모두 기자가 감정을 담아 1백20줄로 요약해 신문에 실은 여과된 버전인 것처럼. 그런 점에서 ‘사실’이란 ‘진실’에 개인의 감정을 담아 걸러낸 것이다. 또 ‘허구’ 속에도 다른 방식의 ‘진실’이 존재하기도 한다. 바로 그 허구 속 ‘진실’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나는 기자보다 소설가에 가깝다

모형을 결국 ‘부순다’는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부수는 행위는 다른 프로젝트를 위한 공간을 만든다는 뜻인 동시에 내 사진에서 관객이 본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모형이 사진을 위해서만 이루어진 공간임을 뜻하기도 한다.

작품을 설명하며 당신은 이렇게 말했다. “결국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우리가 얼마나 지식을 공유하고 있는가’다”. 무슨 뜻인가?
서울 관객들에게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사고를 당한 파리의 터널을 설명하라고 하면 상당수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설명한 사람들 대부분은 그 터널에 가본 적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예술가에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모든 사람에게 어떤 장소를 무제한으로 알릴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러한 이미지로 작품을 만들 수 있다. 마치 2백 년 전의 조각가들이 대리석과 그리스 신화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듯이.


‘‘Heldenorgel’, 2009, C-print/Diasec, 240×380cm, Edition of 6, Courtesy of the Artist and PKM Trinity Gallery

여기까지 물었으니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은 사진작가인가, 조형 작가인가?(‘사실을 재현한다는’ 사진의 전통적 가치에서 출발한 질문이다)
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사실을 재현한다. 카메라 앞에서 그리고 카메라 뒤에서.

이제, 좀 더 폭넓은 질문으로 넘어가보겠다. 어릴 적에도 예술가가 되고 싶었나?
그렇다. 예술가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다.

다른 미술가들 또는 아주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과 토론을 하기도 하나?
물론이다. 항상 토론한다. 하지만 사진작가들과는 좀처럼 하지 않는다. 사진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기술을 논하는 사진작가들의 대화에 동참하기 힘들다.

당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어떤 말로 묘사할 수 있을까? 친한 친구가 설명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것 같나? 수수하지만 야자나무에 둘러싸여 그늘이 드리워졌다고 말할 것 같다.

이제 만족에 대해 묻고 싶다. 당신이 가장 만족스러웠던 인생의 순간이 언제였나?
그건 인생이 끝나면 말해주겠다.

가장 만족하는 작품을 꼽을 수 있나?
없다. 항상 다음 작품이 가장 큰 숙제다.

오늘날 예술의(또는 예술가의) 가장 큰 실수는 무엇이라고 보나?
관객과 예술 작품 사이에 흐르는 침묵, 시적 정서, 고독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

과거의 예술가 중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한스 홀바인, 에두아르 마네, 마르셀 브로타에스, 르네 마그리트.

현재 활동 중인 예술가 가운데에서는?
나의 친한 친구인 더그 에이트킨, 올라퓌르 엘리아손, 타시타 딘, 토마스 샤이비츠.

잡지를 보는가?
잡지를 보는 정도가 아니라 닥치는 대로 씹어 삼킬 지경이다. 다음 작품이 어디에 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 않나.

당신의 일상에 기쁨과 행복을 주는 건 무언인가?
8시간 수면,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

당신이 미래에 대해 근심하는 바는 무엇인가?
내 손과 눈, 두뇌와 호기심을 잃게 되는 것.

*<토마스 데만트 개인전>은 11월 23일부터 2012년 1월 10일까지 서울 청담동의 PKM트리니티갤러리에서 열린다. 2009년 이후 제작한 작가의 대형 사진 작품 10여 점을 선보일 예정이다. 문의 02-515-9496



취재 협조 및 자료제공 PKM트리니티갤러리(02-515-9496)

글 최혜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