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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기울여 들어보니]화가 노은님 씨 가장 행복한 날은 오늘
들여다보고 있으면 세수한 듯 마음이 말개지는 그림을 그리는 재독 화가 노은님 씨. 유럽 무대에서 ‘그림의 시인’ ‘동양의 명상과 독일의 표현주의가 만나는 다리’란 칭송을 받는 그, 대한민국 컬렉터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그를 2년 만에 한국 무대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만났다. ‘살아남으려면 전사가 되지 말고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처럼 그에게선 맑은 아이의 향기가 풍겼다.


11월 23일까지 개인전이 열리는 갤러리 현대에서. 평상시 그의 얼굴은 부처를, 웃을 때 얼굴은 소녀를 닮았다. 파마 한 번 한 적 없는 곱슬머리가 그 부처와 소녀의 얼굴 위에 구름처럼 올라가 있다.


무게를 버리고 날개를 얻은 공룡이 있었다. 날개를 버리고 중력을 되찾은 새도 있다. 누가 더 행복할까? 경복궁 길을 걸으며 하늘을 본다. 새털처럼 가벼운 낙엽도 무게가 있어 추락하고, 바위보다 무거운 비행기가 새처럼 날아간다. 세상에는 깃털을 무게로 바꾸는 사람과 무게를 깃털로 바꾸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오늘 “내 짐은 내 날개다”라고 말해온 사람을 만나러 간다. 사간동 두가헌 갤러리에서 그이와 마주 앉았다. 갤러리 현대와 두가헌 갤러리에서는 그이의 개인전 <가장 행복한 날은 오늘>을 알리는 현수막이 단풍처럼 선연했다.

“인생의 숙제를 푸는 데/그림은 나에게 도구였으며 길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나를 태우고,/ 녹이고, 잊고, 들여다보았다./ 살아남기 위해 전쟁터 병사처럼/ 싸울 필요는 없다./ 오히려 풀밭에서 뛰노는/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 노은님 시화집 <물소리, 새소리> 중에서

노은님, 저이는 화가다. 사람들은 저이를 ‘그림의 시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절반쯤 동의한다. 저이는 ‘그림’을 떼고도 ‘시인’이고 ‘시인’을 떼고도 ‘화가’다. 저이의 시화집에 실린 글은 화가의 작품 세계를 보조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독립된 경지를 확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글쟁이인 저는 그림보다 외려 글에 사로잡혔습니다. 화가로서 치명적이지 않나요?” 어깃장 놓듯 첫마디를 던진다. “저는 시가 그림이고 그림이 시라고 생각합니다.” 나직한 음성이 마치 답변을 준비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흘러나온다. “그림과 시뿐 아니라 사람도 시와 같다고 생각해요. 굳이 서로 구별할 필요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느 정도 올라가면 다 통일이 돼요. 그림을 못 그린다고 시인이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저도 제가 시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냥 사는 게 시요, 사는 게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인은 금언金言을 살고, 글쟁이(예술가)는 그것을 받아 적는다’고도 하지만, 저이의 예술은 이미 화폭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인격과 예술이 일치하는 화여기인畵如其人의 경지다. 그렇다. 모든 예술의 바탕은 삶이다. 그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

스스로를 ‘그림을 낚는 강태공’이라고 부르는 저이는 1946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스물다섯 살 때 간호조무사로 독일에 건너갔다. 남다른 그림 솜씨가 독일 사람들 눈에 띄어 함부르크 국립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199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함부르크 국립조형미술대학에서 화가이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화처럼 천진난만한 그이의 작품 세계는 ‘동양의 명상과 독일의 표현주의가 만나는 다리’로 평가받고 있다.

파독 간호사에서 비롯해 독일 국립대의 교수이자 화가로 자리 잡기까지 그이의 삶엔 어떤 굴곡의 징검다리가 놓여 있던 걸까? 그의 유년을 묻자, 뜨거운 찻물 속 매화꽃처럼 환하게 얼굴이 벙근다. 아니, 얼굴을 보았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목소리에서 느꼈을지도 모른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습니다.집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시냇물이 흘렀습니다. 낮에는 물고기를 잡아 고무신에 담아 와서 우물에 넣었습니다. 밤에는 병아리를 안고 자기도 했지요. 아버지는 화물차 운수업을 했습니다. 사업가였지만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가정적인 분이었어요. 동물을 좋아해서 울 안에는 늘 개와 닭과 돼지들이 “멍멍” “꼬꾜” “꿀꿀”거렸습니다. 어린 시절, 하지 말라고 금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는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완벽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조금은 의외였다. 어린 시절은 불우했으나 꿈과 의지로 그것을 극복해낸 입지전적 인물을 기대했지만, 일단 위인전의 출발이 너무 좋아 좀 실망했다.

(오른쪽) ‘생명의 맨 처음이 점과 같았다. 점 하나의 세포는 두 개가 되고, 물고기가 되고, 사람이 된다’라고 생각하는 그의 작품 속엔 수많은 점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옷에도 점 찍기를 즐긴다. 저 아리따운 점박이 스타킹까지! 뒤로 보이는 작품은 ‘나무 동물들’이다.

“작품 곳곳에 유년이 배어 있는 것 같습니다.” “대개 유년의 결핍 때문에 그것을 채우려고 성인이 되어서도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유년의 행복한 기억으로 아직까지 살고 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소녀는 의외로 남 앞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수줍음도 있었다. 교실에서도 늘 등이 넓은 친구의 뒤에 자리 잡아야 편했단다. 그러나 내면까지 수줍은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물어보면 본 대로, 느낀 대로 눈치 보지 않고 말하는 자기주장이 분명한 소녀였다.

열네 살 때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왔다. 그런데 1967년, 마흔두 살의 어머니가 갑작스레 암으로 돌아가셨다. 불운은 겹으로 온다고 했던가.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했다. 그이는 간호 보조 교육을 받고 경기도 포천군 면사무소에서 결핵 관리 요원으로 일했다. “간호사가 꿈이라기보다 서울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독일로 건너가게 된 계기는요?” “포천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신문에서 파독 간호보조원 모집 공고를 보았습니다. 가서 뭐가 되겠다는 생각보다 그냥 가고 싶었습니다. 일단 찬물에 풍덩 뛰어들고 본 거지요.” 경제적 동기보다도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그이를 이끌었다. “어려서부터 가본 데보다 안 가본 데 가는 걸 좋아했습니다. 익숙하면 지루해하는 체질입니다. 역마살로 지구를 한 바퀴 반은 돌았을 거예요.”

독일에서 저이가 배치된 곳은 항구 근처 시립 외과 병원이었다. 선원, 창녀, 술꾼, 거지들이 스물셋 꽃다운 저이의 보살핌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그곳에서 저이는 ‘벌 받는 기분’으로 살았단다. 철저히 혼자라고 느꼈다. 괴로워서 외로웠고, 외로워서 괴로웠다. “외로움 때문에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나는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따로 배운 적이 없어요. 생활이 단조로우니 일기를 쓰면 늘 그 말이 그 말이었습니다. 더 쓴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었지만,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으니 저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지요. 돌이켜보면 결국 외로움이 시가 되고 괴로움이 그림이 되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외로움과 괴로움 때문에 삶을 풍요롭게 산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삶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삶 하나하나가 다 소설감이죠. 저는 제 소설을 쓴 것밖에 없어요.”

(오른쪽) ‘나비와 함께’, 종이에 아크릴 채색, 2009

바닥에 넘어진 이가 바닥을 짚고 일어나듯, 외로움은 독인 줄 알았으나 약이기도 했다. 어느 날, 독감 때문에 결근한 노은님 씨를 문병하러 온 간호장이 그이의 그림을 보고 감탄했다. ‘여가를 위한 그림’이라는 제목으로 병원에서 전시회를 열어주었다. 재주는 스스로 기회를 열어주는 법, 함부르크 국립대학의 교수이던 한스 티만의 눈에 띄어 그이의 제자로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 학에 입학했다. 6년간 낮에는 미술 학도로, 밤에는 간호사로 주독야경을 했다. 1980년에는 화가가 되었고, 1990년에는 모교의 교수로 임용되었다. 나이 쉰일곱이던 2002년에는 같은 대학 교수인 독일인 게르하르트 바치Gerhard Bartsch와 결혼해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다.

“저는 원래 하도 이상해서 남자가 없을 거라 그랬는데, 우연히 아주 편한 사람을 만났어요.” 이상하다니, 아마 외모를 말하는 모양이다. 스스로 이르지 않더라도 특별한 외모이긴 하다. 천생 부처 같다. 둥근 얼굴, 곱슬머리, 미간의 점까지, 전문 석수장이가 아니라 민중들이 정과 망치로 툭툭 깎은 해학적인 민중 부처의 모습이다. “그이는 제 헌 옷같이 편해요. 장난꾸러기지만 설거지도 돕고 시장 보는 것도 좋아합니다.” 동료 교수로 알고 지낸 지 오래이던 어느 날, “내게 키스해줘. 나는 너의 개구리 왕자다”라며 프러포즈하던 남자다. 이 내외는 아름다운 도시 미켈슈타트의 2백60년 된 로코코 성을 35년간 빌려 14년째 살고 있단다. 부엌 뒤편의 개울에서는 송어가 뛰놀고, 숲으로 이어진 산책로가 있단다. 어느 때부턴가 저이를 보고 “팔자가 세다”는 사람 보다 “부럽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지금이야 화가이자 교수로서 자리 잡으셨지만 처음 간호보조원으로 일하실 때 동양계 외국인으로서 차별을 받으신 적은 없었는지요?” “전혀 없었습니다. 독일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는 없습니다. 그들이 가진 인간미는 굉장히 깊어요. 동양에서 온 이주 노동자인 저를 자식처럼 보호해주었습니다.” “차별은 아니더라도 차이는 있었겠지요? 인생의 반은 한국에서, 반은 독일에서 살아오신 선생님 안에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의 충돌은 없었는지요?” “기후나 역사 때문에 동서양이 다른 세계처럼 여겨지지만, 근본적인 것은 같아요. 동양 사람은 대개 감성적이고, 서양 사람은 이성적인 면이 강하지요. 동양 사람인 제가 그곳에 있는 게 그들에게는 어떤 여유가 느껴지나 봅니다. 그래서 제가 낄 자리가 있는 것 같아요.”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의 의문이 풀렸다. 나는 시종 저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독일에서 살다 온 사람이 아니라 지금껏 한국의 전통 마을에서 살다온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이었다. 언어도, 외양도, 글도, 그림도 철저히 한국적이었다. 저이는 서양에 가서 서양을 닮으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동양적인 자기 정체성을 고수함으로써 자기다움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사람끼리 의견 충돌이 생기면 저를 부르곤 해요. 제가 딱히 무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저대로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조용해져요. 그저 듣기만 하는데도 자기들끼리 해결의 실마리를 찾곤 합니다.” “동양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은 의도한 것인가요?” “전혀 아닙니다. 저는 저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순이 친구들’,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2011


그이가 사진을 찍는 동안 나는 그림을 살펴본다. 동화의 세계로 둥실 떠오른다. 현수막에 걸린 작품 ‘나비와 함께’를 들여다본다. 나무와 나비와 새가 한 몸이다. 검은 새는 제 등에서 자란 나무를 싣고 하늘을 난다. 나무는 사람처럼 허리를 구부려 저를 싣고 가는 새를 굽어본다. ‘나무 동물들’에서는 나무가 동물 형상을 하고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식물과 동물의 기원은 같다고 한다. 재료는 모두 하나, 지구라는 이름의 반죽에서 나온 것들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생명은 복잡하게 분화되었지만, 그이의 작품 속 세계는 분화 이전이다. 그이는 차이가 아니라 동일성을 강조하는 듯하다. 나는 나비이고, 나비는 새이고, 새는 나무다. 배제가 아니라 통합, 분열이 아니라 조화를 추구한다. 그이의 그림은 우리 모두 하나로 연결된 존재라는 불교적 연기론을 환기시켜주기도 한다.

“동화처럼 나무에도 눈을 그린 이유가 있나요?” “나는 동물과 식물과 사람을 구별하지 않아요. 생명의 맨 처음이 점과 같잖아요. 점 하나의 세포가 두 개가 되고, 물고기가 되고, 사람이 됩니다. 동화 같다고요? 저는 어린이에게는 장난감이 필요 없고, 어른이야말로 장난감을 갖고 놀아야 한다고 봐요. 친구를 꼭 사람에서 구할 필요는 없어요. 동물도 좋고, 인형도 좋아요. 동심으로 돌아가면 인생이 그렇게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거예요.” “화가로서 가장 즐거운 점이라면요?” “무심결에 그린 게 살아서 ‘나 좀 봐라’ 하고 말을 건넬 때입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그렸을까? 감탄하기도 하지요. 그림은 잘 그리려고 할수록 잘 안 됩니다. 그저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는 마음으로 그려야 합니다. 저는 한 번도 미리 계획해서 그린 것은 없어요. 그러면 거짓이 되니까요.” “선생님의 에세이집 제목 ‘내 짐은 내 날개다’는 무슨 뜻인가요?” “늘 화구가 든 가방을 끌고 다니며 짐을 진 당나귀처럼 살았습니다. 무겁게 살았으니 가벼워질 수 밖에 없어요. 무게가 익숙해지면서 가벼워지는 거죠. 무게는 벗어던져야 할 게 아니라 감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행복을 알려면 불행을 알아야 해요. 둘은 해와 달처럼 같이 다닙니다. 설사가 나오는데 화장실을 못 찾으면 불행, 찾으면 그만 한 행복이 없지요. 행복은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화장실에서 나오면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습니다.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불행은 없어요.”

갤러리 밖으로 나오자 은행나무가 더욱 노랗게 물든 듯했다. 화가가 인터뷰하는 동안 은행나무는 채색 작업에 몰입해 있던 것이다. 바람이 불자 낙엽이 떨어진다. 누구도 무게 없이 날 수 없고, 날개 없이 내려앉을 수 없다. 나비는 날개가 가장 무겁고, 목수는 망치가 제일 무겁고, 화가는 붓이 가장 무겁다. 그러나 가장 무거운 걸 가장 가볍게 다룰 때 비로소 나비는 나비이고, 목수는 목수이고, 화가는 화가다. ‘가장 행복한 날은 오늘’이라는 현수막 그림이 펄럭인다. 그림 속 동물이 속삭이는 듯하다. “짐이 무겁다고? 그게 널 번쩍 들어 올릴 거야!”

그의 작품은 물고기, 새, 나비, 어린아이 등을 빌려 삶의 기쁨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자연과 동화되는 삶이란 의미도 담겨 있다. 노은님 씨의 개인전 <가장 행복한 날은 오늘>이 11월 23일까지 사간동 갤러리 현대와 두가헌 갤러리에서 열린다. 신작 50여 점을 선보일 예정이다.



반칠환(시인) 사진 민희기 취재 협조 갤러리 현대(02-2287-3500)

진행 최혜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