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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당신의 삶을 치유하라 그리기의 즐거움 樂
‘그림 읽어주는 여자’ 유경희 씨가 읽어주는 네 번째 그림입니다. ‘예술가’라 불리는 창조자들은 그리기를 통해 어떤 쾌락을 맛보았는지, 생의 즐거움을 그림에 어떻게 투영했는지 들여다보세요. 그 즐거움(樂)은 우리 같은 범부의 것과 빛깔이 어떻게 다른 것일지 상상해보면서.


마티스, ‘음악’, 캔버스에 유채, 260×398cm, 1910, 샹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미술관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공자의 낡은(?) 말씀은 너무나 온당해서 더 이상 새롭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말씀이 여전히 유효해 보이는 까닭은 이 경지에 다다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즐김과 즐거움은 좀 다른 뉘앙스를 지니고 있습니다. 왠지 즐김에는 “즐겁지 않아도 즐겨”라는 말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어로 ‘주이상스jouissance’라는 말이 생각나는데요,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즐겨 사용하던 이 용어는 ‘고통 속의 쾌락’이라는 뜻입니다. 예컨대 성교, 마라톤, 등산 같은 것들을 떠올려보세요. 어떤 고통의 순간을 넘어서는 엄청난 쾌감이 있지 않나요? 그러니 오늘의 테마 역시도 그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닌, 기묘한 고통과 쾌락이 맞물려 있는 즐거움 혹은 즐김을 예술(가)과 관련시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최초의 감각의 즐거움, 그림 놀이
가만 보니 즐거움은 육체적인, 그러니까 분명 감각적인 것과 불가분의 관련이 있습니다. 기쁨은 영적인 경지가 느껴지지만, 즐거움은 왠지 육체와 그 감각이 무엇인가에 온전히 도취된 듯하다는 것이죠. 얼핏 기쁨은 근원적으로 느껴지고, 즐거움은 말초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네요. 그렇지만 예술 속에서는 이런 구분이 아주 간단하게 와해되고 해소됩니다. 그런 구분이 필요 없는 경지가 바로 예술이고, 예술이야말로 감각을 통해 사유를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장르니까요.

그래서 오늘, 감각을 즐겁게 하는 미술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미술은 무엇보다 몸을 써야 하는 예술 장르입니다. 몸 중에서도 손을 많이 쓰지요. 칸트는 “손은 튀어나온 뇌”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림 그리는 일은 두뇌를 쓰는 것이 되어버리는군요. 그래서 화가들이 비교적 치매를 앓지 않고 오래도록 장수하는가 봅니다. 나는 대중에게 강의를 할 때마다 자주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합니다. 덧붙여 “전시는 하지 말고!”를 외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내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마구 깔깔대고 웃습니다. 전시하려고 그림을 그리면 자꾸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무게 잡게 되고, 그러면 그림이 이상해지니까요. 무엇인가를 의식하고 그리면 그림이 영 어색해지고 어려워지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그림을 가지고 그냥 노는 게 중요해요. 놀려고 하면 우선 단순해져야 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너무 바쁘고 생각이 많아요. 그리고 그 대부분은 지나친 걱정과 쓸데없는 생각인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릴 적 유희충동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 그것을 체험하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그려라!”라고 주문합니다.

그림을 그리면 세 가지 즐거움이 있어요. 첫째는 몸을 쓰니 육체적 감각이 살아나는 ‘감각의 즐거움’을 체험하게 되고, 둘째는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몰입의 즐거움’이 일어나며, 셋째는 그리거나 만들어놓은 것을 보는 ‘시각적 즐거움’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미술이라는 장르는 음악이나 문학과 달리 온전히 시각적 산물이라 자기가 만든 작품을 자기 두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게 더할 수 없는 충족감과 안정감을 주지요. 다시 말해 잘 그렸든 못 그렸든 사람들은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보고 눈을 의심하며, 잠시 동안이라도 스스로를 기특해하고 감동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각예술, 바로 그림만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자아도취적인 매력인 것입니다. 고백하건대, 나 역시 이런 도취감에 빠져 내가 화가가 되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착각(?)한 적도 꽤 여러 번 있었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림을 통해 만나는 이 세 가지 차원의 즐거움은 상처받은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한다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정신과 의사를 만나러 병원에 가지 않아도 목사님과 신부님을 만나러 주일마다 교회에 가지 않아도, 스스로를 얼마간 치유할 수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난과 고통, 굴곡과 절망 속에서도 과감하게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을 통해 셀프-힐링self-healing의 세계로 들어간 화가가 많습니다. 아마 유명한 미술가라면 이런 식으로 자기 치유를 하지 못한 이는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나는 병상에서도 즐거웠다! : 마티스

(왼쪽) 니스 레지나호텔의 화실에서 작업에 몰두해 있는 마티스. 1952.
(오른쪽)  마티스, ‘웅크리고 앉아 있는 파란 나부’, 종이 오리기 위에 과슈, 103×74cm, 1952, 니스, 앙리 마티스 미술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년)만큼 즐거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드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마티스는 진짜로 인생을 즐겁게 산 화가였을까요? 사실 그만큼 병원 신세를 자주 진 화가도 흔치 않을 겁니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예술에 거의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마티스는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법률 사무소에서 서기로 일한 그저 평범한 남자였지요. 그러던 중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급성 맹장염에 걸려 수술한 후 그 합병증으로 1년 남짓 침대 신세를 져야 했어요. 아마추어 화가인 어머니는 아들의 지루함을 달래주기 위해 물감과 함께 그림 그리는 법에 관한 책을 선물해주었습니다. 이때 마티스는 그만 미술의 매력에 홀딱 빠져버렸습니다.

마티스는 그 당시를 회상하며 “그림에 홀렸다. 자제할 수가 없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일종의 파라다이스로 옮겨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뭔가가 나를 몰고 갔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인간으로서 나의 평범한 삶에는 빠져 있던 어떤 것, 어떤 힘 같은 거였다.” 마티스가 맹장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일주일 정도 있다가 퇴원했다면, 그는 아마 현대미술의 선구자가 되는 대신 유명한(?) 변호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어쨌든 마티스는 변호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화가가 되기 위해 스물여섯 살 때 당대의 유명 화가 구스타프 모로의 아틀리에로 들어가게 됩니다. 마티스는 금세 미술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했어요. 바로 야수파의 선구자로 말입니다. 진정 그는 감각을 즐겁게 만드는 방법을 적나라하게 사용하기 시작한 첫 번째 화가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마티스는 “가장 아름다운 파랑, 노랑, 빨강 등 인간 감각의 저변을 뒤흔들 수 있는 색깔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의 대표작 ‘춤’(1910)은 사람이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색채가 춤을 추는 것 같습니다. 바로 단순한 세 가지 색채로 풍부하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죠.

1939년 일흔 살의 마티스는 아내 아멜리와 헤어진 후 고독한 생활을 했어요. 그러다가 그는 1941년 십이지장암 수술을 받는데, 생명은 건졌지만 그만 상처가 감염되어 탈장이 생겼지요. 마티스는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13년 동안 거의 침대에만 묶여 지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화가로서의 삶을 포기하기는커녕 신선한 기법으로 전혀 새로운 미술을 구상해내기에 이릅니다. 바로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대신 채색된 색종이를 오려서 붙이는 기법을 고안해낸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티스는 “가위가 연필보다 훨씬 감각적이다”라고 말하면서, 꽃과 구름, 별 등을 찬란한 색으로 표현하는 색종이를 이용한 작품을 만들었지요. 이 무렵 완성한 작품에는 어디에도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절망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고, 어린아이의 유쾌함과 쾌활함만이 풀풀 묻어납니다.

마티스는 또 한 번의 질병, 즉 기관지염을 치료하려고 간 니스, 젊어서부터 아주 좋아한 이 도시에서 여생을 보냅니다. 니스의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호텔에서 마련해준 널찍한 화실에서 오래전부터 자신의 모델이던 리디아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지요. 화실에 놓인 침대에 누운 채 기다란 장대 끝에 묶은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는 마티스를 보면 정말 말문이 막힙니다. 창조하는 자에게는 어떤 엄살과 변명도 모두 사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입니다. 마티스의 말년 작품은 젊을 때나 건강할 때보다 훨씬 더 낙천적이고 활력 있으며, 평화롭고 대담하고 완숙한 경지를 보여줍니다. 이때 탄생한 오려 붙인 종이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웅크리고 앉아 있는 파란 나부’(1952)입니다. 물론 이런 그림들은 그의 신체 상태가 그만의 예술적 수단을 요구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양식이긴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 속에 보이는 유희적 가벼움과 경쾌한 즐거움은 마티스의 생산적인 상상력과 다재다능한 성격에 또 다른 촉매제가 된 것이죠. 이처럼 마티스가 진정 유쾌하고 단순하고 즐거운 그림을 그린 것은 그의 말년, 더 이상 전혀 거동을 할 수 없을 때였습니다. 마티스는 병으로 고통받은 친구들의 침대 주변에 자기 그림을 걸어줄 정도로 자신의 작품에 사용한 색들이 건강하게 빛난다고 믿었습니다. 마티스는 고통 속에서도 그 작품을 즐겁게 만들었고, 그렇게 생명력을 부여받은 작품이 지닌 치유력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년 시절의 즐거움, 어린아이처럼 그려! : 샤갈
마르크 샤갈Marc Chagall(1887~1985년)은 우리나라 사람들, 그것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아주 좋아하는 화가지요. 왜 그럴까를 생각해보면, 그의 그림이 아주 천진난만하고 환상적이기 때문일 겁니다. 무엇보다 샤갈의 그림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림을 잘 그리지 않아도 참으로 따스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입니다. 샤갈은 마치 어젯밤 꿈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싶은 대로 편하게 그려도 좋다고 우리에게 말해준 첫 번째 화가가 아닐까요!

샤갈은 유대인 공동체에서 너무도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그 시절 겪은 가난이 주는 은총이 고스란히 작품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가 당시의 가난을 즐길 만큼 성숙한 아이는 아니었다고 해도, 가난이 얼마나 영적으로 풍요로운 것인지를 체험했지요. 물론 그런 배경에는 유대 종교인 하시디즘Hassidism(18세기 폴란드에서 일어난 유대교의 한 파로 신비적 경향이 강함)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샤갈의 작품이 화려한 색채와 환상적있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유년 시절의 순간순간을 경이롭게 관찰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유년 시절을 잃어버린 현대의 아이들은 자신들이 어른이 된 다음에 과연 무엇을 추억하고 그리워할까요?

특히 샤갈의 어머니는 그의 그림을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그림으로 만들어준 장본인이 아닌가 싶군요. 어머니는 늘 어린 아들을 애달프게 생각하면서 화가로 인정하고 격려했어요. “그래, 내 아들아. 나는 알아. 너는 재능이 있어. 우리 집안에서 어떻게 너 같은 애가 태어났을까?” 샤갈의 어머니는 빈곤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다만 몇 푼이라도 벌기 위해 구멍가게를 차리면서 가족을 열정적으로 돌보았습니다. 샤갈은 어머니의 구멍가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통 속에 든 청어, 귀리, 각설탕, 밀가루, 푸른 봉지에 담긴 초, 이런 것을 모두 팔았다. 동전이 짤랑거렸다. 농부들, 상인들, 성직자들이 낮은 소리로 속삭이고 냄새를 풍겼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분은 시적이지만, 침묵을 지키는 민중의 가슴을 지녔다. 한 번도 자른 적이 없는 수염, 잿빛이 도는 밤색 눈동자, 황토색으로 그을린 주름진 피부…. 노랗게 떴어도 맑은 그의 얼굴엔 가끔 미소가 떠올랐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오른쪽) 샤갈, ‘곡예사’, 캔버스에 유채, 65×32cm, 1930, 파리, 국립근대미술관


샤갈, ‘생일’, 캔버스에 유채, 81×100cm, 1915, 뉴욕, 근대미술관


이처럼 샤갈은 가족, 일상사, 이웃 사람들을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주의 깊게 관찰했습니다. 모든 가족은 안식일 등 유대 전통의 의식을 지켰으며, 이웃 사랑에 기초한 경건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샤갈 예술의 푸근함과 따스함은 바로 이런 고향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에서 온 것이며, 그것은 그에게 영원한 향수로 환기되고 있는 것이지요. 샤갈은 날아다니는 연인들, 날개 달린 물고기, 날아다니는 괘종시계 등을 그렸습니다. 게다가 색채는 얼마나 호사스럽고 현란한지요!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가주는 듯한 황홀한 즐거움이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이처럼 샤갈의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가장 큰 쾌락은, 갑자기 꿈속에서처럼 몸이 가볍게 부유하며 하늘로 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몽환적이고 몽상적인 초현실주의적 분위기야말로 샤갈 작품의 백미입니다. 그것은 그가 유난히 가난한 유년 시절의 ‘풍요로움’과 유대 신비교 등이 빚어낸 즐거운 판타지가 아닐까요? 험한 세상의 다리를 가볍게 건널 수 있게 만드는 판타지 말입니다. 올겨울은 유난히 추울 거라고 합니다.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 더욱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샤갈의 마을은 추워도 춥지 않은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마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왼쪽) 샤갈의 초상 사진.



유경희(미술평론가) 

담당 최혜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