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가난이란 이런 게 아닐까. “가난한 집에 가진 거라곤 책 다섯 수레뿐/ 그것을 제외하면 남길 물건이 전혀 없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서책을 못 떠나니/ 전생에는 틀림없이 좀 벌레였나 보다.” (이하곤의 <검서> 중). 가진 거라곤 책 다섯 수레뿐이라니! 그 다섯 수레의 책 속에는 누군가의 삶 속 지층이, 인간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으니 세상에서 이렇게 풍족한 가난뱅이는 없을 것이다. 오늘 밤, 가난한 책벌레가 되어 책장에 꿀처럼 침 묻혀가며 그 지식의 옷을 한 겹씩 벗겨가는 즐거움!
<행복> 11월호 표지 ‘베스트셀러’를 들여다보시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제 린저> <셰익스피어 전집> <주홍 글씨>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오만과 편견>…. 문신한 제 이름을 번쩍이며 반가이 우릴 맞는 고전들이다. 스무 살 처녀의 가슴팍에 수줍게 안겼을 책들, 그 적벽돌색 양장본 표지를 들추면 까만 글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가슴속에 박혀올 것만 같다. 서유라 작가는 세월이 주저앉은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가슴에 품었다.
“구해온 책을 쌓고, 펼치고, 세우고, 꺼내고, 뒤집고, 이리저리 섞어봐요. 책을 쌓을 때도 제목의 관계, 제목이 충돌하면서 만들어낼 의미와 이미지를 생각하죠. 구하지 못한 책은 어림 짐작으로 상상한 다음 쌓아 보고 취사선택해요. 그다음 그림으로 그립니다. 책등과 책 표지를 실제 디자인과 좀 다르게 그리기도 하고요. ‘베스트셀러’는 별 모양으로 책을 배열해 나만의 스타라 할 문학작품을 칭송한 거죠.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듯, 제 사념에 따라 쌓고 배열한 책들은 삶의 지층, 지식의 지층을 이루는 겁니다.” 자분자분한 설명을 들으니 그의 그림은 들여다볼수록 보는 재미, 읽는 재미가 크다.
‘인간의 내밀한 역사’란 작품을 들여다볼까. <인간의 내밀한 역사-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류의 경험에 관한 기록>이 전면에 보이는데, 그 책 표지는 손 하나가 여성의 젖꼭지를 살짝 꼬집는 회화가 배경이다. 이 그림 전체에 묘한 기운을 불어넣는 부분이다. 그 뒤로 쌓인 <전쟁의 역사> <광기와 우연의 역사> <권력과 탐욕의 역사> <여왕의 시대> <로마, 세계의 정복자>를 보면 작가가 하려는 이야기를 어림짐작할 수 있다. 인간의 내밀한 역사를 이루는 이 복잡다단한 것들! 2008년 개인전에서는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한 문제를 언급하기도 했다. ‘한국 문화재 수난사’란 작품은 동명의 책 <한국 문화재 수난사>를 앞으로 배치하고, 그 위로 <문화재 반환> <문화재의 보존> 등을 쌓고, 일제강점기에 약탈당한 ‘수월관음도’, 관리 소홀로 사라진 낙산사의 동종 등을 그려 넣는 식이다. 그는 이렇게 책 그림에 자신만의 은유와 상징을 담아내는데, 마치 조선의 책가도 화가를 닮았다. 그의 그림은 가히 ‘현대판 책가도’라 할 만하다.
책의 몸뚱이가 내는 소리
서유라 씨의 그림은 ‘책의 초상화’라 할 만큼 책의 얼굴을 아름답게 ‘재현’한다. 회화적 구도에 따라 새 옷을 입히기도, 분칠을 하기도 한다(‘베스트셀러’는 향수와 역사를 담고 싶어 실제 책보다 흐릿한 색조로 그렸다). 의미나 상징 따위는 제쳐두고라도 그림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는 이야 기다. 또 일부러 알몸뚱이 처녀처럼 표지가 벗겨진 책들도 그리고, 한쪽 귀퉁이가 찢어진 책장도 그린다. 햇빛이 갉아먹어 누렇게 뜬 책갈피도 그린다. 그런데 그렇게 그린 책들은 표지만 보아도 그 속 살을 다 알겠다. ‘이 책은 눈물이 없다, 이 책은 눈곱만 가득하다, 이 책은 하품 나는 잠언만 가득하다, 이 책은 눈 밝은 사람에게만 보이는 빛이 있다’, 책등과 책 표지에서 이런 ‘소리’가 흘러나온다. 몸이 사람의 정신을 어느 정도 대변하듯, 책의 얼굴은 책 안에 담긴 말들을 대변한다.
(오른쪽) ‘인간의 내밀한 역사’, 캔버스에 유채, 97×130.3cm, 2010
“책이 자신의 말을 들려주고 있다면, 저는 제 그림으로 욕망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올봄에 연 개인전의 제목이 ‘솔 트립Soul Trip’이 었잖아요. 현실로부터 이탈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커져버린 내 욕망, 떠나고 싶은 욕망을 그림에 담았지요. 탈현실적 보라색과 핑크색 그림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일 겁니다. 여행, 세계, 역사, 여성, 패션 등 요즘 제 관심과 욕구를 자극하는 것들도 그림으로 그리고 있어요.” 떠남의 욕망을 잠재우려 함인지 그는 요즘 고지도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새롭게 시도 중이다. 조만간 그가 지도 그림으로 만든 책(책등과 책 표지까지 고지도로 그린) 한 권 들고 엷은 햇살 짊어진 채 어디론가 떠나기를. 그게 예술의 나라든, 현실 속의 이국이든 어디라도 좋겠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밤, 각시처럼 집에서 나만 기다리고 있을 내 책들에게 꿀보다 달콤한 애무를 선물함이 어떨까. 묵언의 종이가 은밀한 밀어를 건넬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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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협조 롯데갤러리(02-726-4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