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그 설렘의 나라
쿠바로 가는 비행기표를 받은 순간부터 나는 혁명가나 된 듯 가슴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분단국가의 국민으로서 느끼는 사회주의국가에 대한 묘한 호기심일까? 아니면 체 게바라라는 영웅(혁명가라기엔 영화배우 뺨치게 잘생긴!) 때문일까? 쿠바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속속 생각나기 시작했다. 아바나라고 쓰인 컵에 담긴 모히토 칵테일의 이미지며,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음악이며…. 쿠바는 야릇한 매혹의 땅이면서 선뜻 떠나지 못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내가 쿠바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구체적으로 들기 시작한 건 미국에 사는 작가 친구 둘 때문이다. 동부에 살고 있는 친구는 쿠바의 판화 작가들과 책을 만들고 교류전도 하면서 그들의 작품을 세계에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미국 서부에서 사진작가 겸 교수로 활동하는 다른 친구는 쿠바에 대한 사진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이들에게 쿠바와 그곳 작가들에 대해 들어왔고, 쿠바 작가들 역시 ‘나라는 삶’의 이야길 전해 들었다. 그러기에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는 마음으로 아바나로 떠난다.
아바나의 거리 풍경.
아바나 속으로 한 걸음
도착하는 순간부터 이국적인 분위기에 압도당한다. 남미 같기도 하고, 아프리카 같기도 하고, 북유럽의 느낌도 있고, 오래된 할리우드 세트 같은 분위기까지 갖춘 이 도시. 그 안의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쿠바에서 살았던 미국 동부의 친구 스티브가 소개한 민박집으로 향한다. 루마니아 출신의 일흔이 막 넘은 할머니 마사는 영어도 잘하고 여배우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얼굴과 몸매도 아름답다. 민박인데도 여권 번호며 비자, 관광객 의료보험 번호까지 확인한다. 쿠바에서는 현지인과 관광객의 환율 차이가 꽤 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호텔보다 민박이 훨씬 안전하고 편하다(집만 좋다면!)고 한다. 마사 할머니네에서 처음 먹은 아침 식사 때 꿀과 망고가 얼마나 맛있던지 한 입에 삼켜버렸다.
1 시간의 흔적과 쿠바 사람들의 감각을 모두 드러내는 간판.
2 체 게바라는 영웅이자 쿠바인의 일상과 함께하는 아이콘이다.
(아래) 관광객을 위해 작품을 판매하는 동네 상점.
쿠바에 예술가가 많은 까닭
모든 교육이 무상인 쿠바에는 미술 전문대학이 많지 않아 재능 있는 아이들과 미술대학에 가고 싶은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미술 교육을 따로 받는다. 많은 사람이 쿠바의 예술가가 잘사는 이유를 쿠바인이 굉장한 문화 애호 시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이들에게 예술이란 민중을 선도하고 뭉치도록 하는 정신적 지주 같은 것이다. 가수들은 노랫말에, 화가들은 작품에 의미와 암시를 주기 위해 엄청난 인문학 공부를 한다. 물론 작가라고 해서 다 잘사는 것은 아니다.
해외에서 기자작품이 많이 팔리고 유럽이나 미국 컬렉터에게 인정받아야 부유한 예술가가 될 수 있기에, 그들은 작품의 개성과 표현력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들은 외국 관광객이나 미술계 종사자가 쿠바를 방문할 경우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갤러리를 능가하는 연출력으로 집에 작품을 전시해놓기 때문이다. 작가에 따라 자신만의 작품만 선보이기도 하고, 동료와 선후배의 작품을 함께 소개하기도 한다.
아내가 미국인인 화가의 집
살림집을 포함한 쿠바의 많은 건물은 한때의 명성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매우 크고 아름다운 골조로 지었다. 그런데도 수리와 보수를 제때 하지 못해 집들은 허름하고 낡았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집을 보면서 놀라운 역사와 시간을 느끼고, 낡음의 편안함을 생각하게 된다. 근래 우리 주변의 집들은 세련되고 비싼 재료 때문에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사람을 긴장시킨다. 사람을 위한 집이라기보다는 훌륭한 집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들곤 한다. 아바나의 집들은 일하다 돌아와 고무줄 바지와 늘어난 티셔츠를 갈아입은 순간의 기분처럼 편하고 익숙하다. 사람의 손때가 묻은 집이기에 행여 흠이라도 낼까, 사용법을 몰라 고장이라도 내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손잡이는 손 모양대로 낡았고, 복도는 식구들의 발자국 따라 반들반들 길이 나 있다. 이런 낡은 집을 작가들은 작품의 배열과 색의 조합으로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집은 일 때문에 쿠바에 왔던 미국 여성이 쿠바의 서양화가와 결혼해 사는 집이다. 사회주의국가답게 쿠바는 모든 상품을 구입하기가 쉽지 않기에 페인트나 벽지 등 인테리어 공사를 위한 자재는 더더욱 구하기 힘들다. 오래된 물건은 스스로 고치거나 이웃 또는 친구의 도움으로 손을 본다. 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 눈을 사로잡은 것은 한쪽 벽에 세워진 작품인데, 버려진 캔을 사람 모양으로 자른 작품이다. 서양화가인 집주인은 이불ㆍ텐트 등 일상용품을 붙여 작품을 만드는데, 주위 모든 것이 작품 소재로 손색없다고 한다.
이 집은 높은 천장과 아름다운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벽과 벽지는 쿠바의 여느 집들처럼 낡은 모습이다. 집 안 곳곳에 화려한 컬러와 큰 사이즈의 작품이 걸려 있는데, 앤티크 벽지로 장식한 벽보다 더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집에는 손님 거실, 일반 거실, 손님 식당, 가족 식당 등 작은 방이 여러 개 있는데 방마다 어울리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또 주인의 눈길과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작품이 놓여 있다. 살림 공간과 작품이 조화를 이루는 이곳이야말로 완벽한 갤러리다.
(오른쪽) ‘아내가 미국인인 화가의 집’. 복도에서 바라본 손님 거실이다.
1 이바나에서는 집 안에서 종이 만드는 풍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2 ‘아내가 미국인인 화가의 집’. 조명이 설치된 벽걸이형 작품과 오래된 집의 콘트라스트가 아름답다.
3 아내가 미국인인 서양화가가 만든 작품으로, 오래된 캔을 사람 모양으로 잘랐다. 그는 오래된 일상용품을 붙여서 작품을 만든다.
4 ‘아내가 미국인인 화가의 집’의 화룡점정은 작품이다.
사랑을 노래하는 작가
두 번째로 방문한 집은 들어서자마자 코가 긴 피노키오가 빨간 천의 작품(온 벽을 덮은)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화가인 집주인에게 이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자, 책을 밟고 탱크를 등 뒤에 감춘 피노키오가 동심의 얼굴로 전쟁의 광경을 바라보는 작품이란다. 정치가들의 위선과 지식인들의 얄팍함, 어릴 때부터 의식을 지배하는 미국의 상업성(어린이용품의 상업화로)을 고발하는 것이라고 한다. 집 안의 철학책과 심리학책에서 눈치챘지만 그는 매우 깊은 뜻을 담은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 그의 남동생은 유명한 심리학자다.
그의 집 역시 갤러리처럼 작품이 많이 놓여 있는데, 두 개의 침실에 있는 매우 에로틱한 판화 작품은 ‘쿠바=사회주의’라는 나의 강박관념 때문인지 더 놀라움을 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여자는 국민을, 남자는 지도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작품 아래 있는 번호는 연도를 뜻하는데 그해의 쿠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느 해의 여자는 사랑받으며 환희에 차 있고, 어느 해의 여자는 외로움에 빠져 스스로 자위한다. 이것이 은유적 묘사라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특이한 것은 집 안 곳곳에 보이는 비행기와 새장 같은 작품과 소품이다. 자유와 넓은 세상에 대한 갈망 때문일까?
마침 그날, 나는 쿠바의 다른 작가들과 함께 이 집의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았는데,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심리학자 동생도 와서 새벽까지 미술과 사랑과 의리에 대해 길고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참 뜨거운 사람들이다. 일에도, 국가에도, 연인에게도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들, 삶의 최고 목표는 사랑이라 믿는 사람들이다. 전시 때문에 외국에 자주 나가본 그들에게 다른 나라에 가서 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더 자유롭고 잘사는 나라가 많지만, 모국이 아니기에 떠날 마음이 간절하진 않단다. 집을 꾸밀 때 가장 염두에 두는 점을 물으니 “어디서든 식구들의 움직임이 보일 것, 공간마다 존재 이유가 있을 것” 등이란다. “집은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곳, 나와 함께 사랑의 시간을 나누는 곳, 그래서 참 중요한 곳”이라는 그의 말이 오래 가슴에 남는다.
1 ‘사랑을 노래하는 작가’의 집을 들어서면 이 작품이 가장 먼저 보이는데, 탱크를 등 뒤에 감춘 피노키오가 붉은 작품을 바라보는 작품이다.
2 ‘사랑을 노래하는 작가’의 집 2층으로 오르는 계단.
3 ‘사랑을 노래하는 작가’가 만든 에로틱한 판화의 동판이 손님방에 걸려 있다.
4 ‘젊은 쿠바가 느껴지는 집’에 들어서면 거실 바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젊은 쿠바가 느껴지는 집
그다음 들른 작가의 집은 젊은 작가의 실험적 시도가 느껴지는 곳이다. 거실 바닥부터 흑백으로 처리해 매우 활기차 보이는 공간인데, 오래된 집이라 조명등이 많지 않은데도 수많은 미디어 작품으로 실내가 전혀 어둡지 않다. 마치 현대적 인테리어의 레스토랑이나 화랑에 들어온 느낌이랄까. 특히 이 작가의 작품은 총알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오래된 철제 간판에 판화를 한 작업으로, 시간과 역사의 흐름 그리고 모든 게 다 지나간 후 느끼는 세월의 무상함이 그 안에 들어 있다. 간판을 이용한 작품 때문인지 상업 공간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손님 거실을 가득 메운 젊은 작가들의 손 그림 때문인지 사람 냄새도 물씬 풍긴다. 쿠바의 이곳저곳, 이 집 저 집을 들르며 느낀 건 낡고 볼품없는 곳에서든, 화려한 장소에서든 늘 사람의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특히 작가들의 집은 뜨거운 가슴으로 작업하는 그들의 열정이 강하게 스민 공간이었다.
아바나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집 안에 전시한 작가
‘아바나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집 안에 전시한 작가’의 집. 표구도 없이 거실에 진열된 작품을 하나씩 넘겨보는 재미가 남다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쿠바에는 한 개의 미술 전문대학과 한 개의 종합예술대학이 유명하다. 따라서 활동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작가는 동문인 경우가 많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후배 작가에게 기회를 주고자 애쓰는 모습은 참으로 따스한 광경이다. 컬렉터에게 인정받아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작가는 다른 작가의 작품을 집 안에 따로 모아서 전시하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집 안에 가장 많은 작품을 전시한 집은 칠레 여성과 결혼해 살고 있는 작가의 집인데, 작품이 얼마나 많은지 뉴욕의 모마MoMA(뉴욕 현대미술관) 관계자들까지 작품을 보러 오곤 한단다. 특히 그의 집에는 회화 외에 조각 작품도 많은데, 전부 흰색으로 칠한 집에 조각과 표구도 하지 않은 그림이 수없이 걸려 있다. 그 조화 역시 매우 개성 있고 강한 느낌이다. 작품과 집과의 조합이라기보다는, 작품과 작품의 조합이 바로 인테리어가 되는 집이다.
(왼쪽) ‘아바나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집 안에 전시한 작가’의 집 현관에 들어서면 이 작품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쿠바를 여행하며 만난 쿠바 작가들의 집은 외부 활동이 적은 그들에게 주거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공간이었다. 집은 그들의 삶과 쿠바가 겪은 시간의 일부이며, 아무리 허름한 공간에서도 그들은 사람과 사랑이 주는 희망을 발견하고 있다. 그저 화려한 인테리어로 치장한 집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쿠바 작가의 집. 다시 한 번 ‘하우스’와 ‘홈’의 차이에 대해 생각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글과 사진 신정희 ((주)안단태디자인 대표, 작가)
- [행복으로 떠나요] 집은 나와 함께 사랑의 시간을 나누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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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른 감각과 감성을 지닌 디자이너이자 작가인 신정희 씨가 쿠바 아바나 여행기를 보내왔다. 단순한 산수 유람, 도시 일람이 아니라 맹렬한 활동을 펼치는 쿠바 예술가들의 살림집을 ‘순방’한 여행이다. 살림집을 그럴듯한 전시 공간으로 겸하는 쿠바 예술가들의 감각, 시간의 역사를 고스란히 유산으로 이어가는 힘을 이들의 집에서 읽을 수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