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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아뜰리에]개인전 앞둔 화가 백순실 씨의 헤이리 작업실 무의식의 일상이 최고의 예술이다
화가의 화폭에 담기지 않는 것이 무엇이겠느냐마는 백순실 씨의 캔버스 안에는 교향곡 선율이 흐르고 향기로운 커피 빛깔이 우러난다. 화가의 길을 걸은 지 벌써 42년, 모름지기 대가의 반열에 들어선 그에게 이렇듯 형이상학적 소재가 갖는 의미는 분명 남다르다. 헤이리 예술마을에 자리 잡은 백순실 씨의 아틀리에를 찾은 건 그래서 더욱 흥미로운 여정이었다.


화가로서 40여 년, 그 대장정을 걸어온 백순실 씨의 아틀리에는 7년 전 헤이리 예술마을에 완전히 정착했다. 대형 캔버스도 이곳에서는 보통으로 보일 만큼 탁 트인 공간, 이곳에서 그는 무한한 자유를 누린다.


백순실 씨의 취미가 집약된 다실. 클래식을 들으며 다도를 즐기는 시간은 그의 삶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가 백순실 씨를 아는 사람 중 일부는 그를 먼저 다도인으로 알았거나 또는 차 문화를 전파하는 사람이라 오해했을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화가로서 인생의 절반, 지난 20여 년간 차茶를 주제로 한 ‘동다송東茶頌’ 연작을 선보인 백순실 씨는 실제 차에 대한 철학이 남다를 뿐만 아니라, 생활 또한 차와 함께 시작하고 마무리하기에 오히려 녹차와 커피를 주제로 한 잡지에 많이 등장했을 정도. 그리고 이 ‘동다송’은 그가 여전히 탐닉하는 테마로, 오는 11월 2일부터 27일까지 서울 금산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 <근원을 향한 일상>에서 ‘동다송’ 최신작을 선보인다. “이번에 전시하는 ‘동다송’은 모두 커피를 사용해 그린 그림이에요. 전작에 등장한 차가 녹차였다면, 이번 작품은 커피를 주제로한 그림, 커피를 물감 삼아 그린 그림이지요.”

하나의 주제에 몰두하다 보면 결국 물아일체를 이루는 것일까. 그가 이전에 선보인 ‘동다송’은 은은한 녹차 향이 심신을 정화하는 그 청아한 울림을 다채로운 색상으로 표현한 것이건만, 지금 백순실 씨의 ‘동다송’은 주제 자체가 물성이 되어 직접 캔버스 안에 어우러져 표현되고 있으니. 범인凡人의 입장에서 예술의 시작과 끝을 예단하기란 최고의 무리수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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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시며 커피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 요즘 그의 일상이다.
2 엄청난 양의 붓과 물감, 안료가 작품처럼 쌓여 있는 작업실.

3 아틀리에 내 자리한 휴식처, 다실. 황토벽과 창밖의 대숲이 운치 있다.
4 개인전에서 선보일 ‘동다송’ 연작. 완성 후 말리고 있는 중이다.

예술의 근원은 일상이다
백순실 씨의 아틀리에는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있다. 삶터와 작업실, 갤러리와 카페 그리고 아트 숍까지 한 건물에 공존하는 곳. 정확히 표현하자면 백순실 씨의 아틀리에는 그곳에서도 유명한 나들이 코스인 헤이리 금산갤러리와 카페 블루메가 있는 곳, 그보다 더 쉽게 표현하자면 건물 외벽을 뚫고 나온 나뭇가지가 백미인 건물이다. 호젓한 자연 속에 세련된 문화생활이 가능한 복합 건물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커피를 마시며 그림을 그리는 멋진 화가 백순실 씨가 눈앞에 오버랩된다. 그리고 또 한 번 짐작하기를, 그래서 커피, 즉 ‘동다송’을 노래하는 게 아닐까. “벌써 헤이리로 온 지 7년이 되어가네요. 이곳에 온 후 제 생활도, 그림도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야생화 화단을 정리하고, 토마토ㆍ오이ㆍ고구마ㆍ배추ㆍ고추 등도 돌봐야 하고, 게다가 커피 생두가 들어오는 날이면 일일이 콩을 솎아내고 로스팅하니 커피 한잔 제대로 마시기 힘든 바쁜 일상이 연속되죠.”

이 멋진 아틀리에에서 화가 백순실 씨의 삶은 한마디로 자연 살림꾼 그 자체다. 집 주변과 갤러리 정원에 1백여 종의 야생화를 가꿔 놓은 화단도 백순실 씨가 직접 돌을 골라내 개간한 것이고, 시골에서 수백 년 된 능소화를 가져와 갤러리 건물안에 심고, 나뭇가지가 기를 펴고 살도록 외벽에 구멍을 숭숭 내준 것도 모두 그의 몫이 었다니 말이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토지>를 집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밭농사라고 했습니다. 땀 흘려 밭을 일구고 흙을 만지며 생명을 키우다 보면 저절로 명상이 되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지요. 저 또한 그런 경험을 이곳에서 매일 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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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내 자리한 카페 블루메. 오페라를 주제로 한백순실 씨의 판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2 클래식 음악회도 열리는 갤러리.

3 전시에 선보일 ‘동다송 1123’ 작품.
4 백순실 씨는 실제 원두를 직접 고르고 로스팅을 하는 커피 전문가이기도 하다.

생명을 노래하는 땅, 땅의 빛깔을 지닌 커피

그렇다면 지금 백순실 씨의 ‘동다송’을 커피를 통해 표현하는 이유는 이곳에서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백순실의 그림은 추상적이다. 갈색, 황금색 또는 회갈색의 두꺼운 질감의 바탕 위에 주로 흑백의 유기적인 형상들이 부유하듯 떠다니거나 점점이 심어져 있다. 그러나 이내 거친 질감과 갈색조의 바탕 화면은 흙바닥이나 갯벌을 연상하게 하고, 그 위에 그려진 형상들은 꽃봉오리, 마른 나뭇가지, 씨앗 같은 자연의 형태를 떠올리게 한다. 찻잎을 우려 마시고, 커피를 추출하여 그 맛을 음미하고 향과 색을 즐기는 일상적 행위 속에서 작가는 작은 찻잎과 커피콩이 물리적으로 연유한 땅의 생명력으로 일상의 초점을 확대한다. 사회 경제적 변화의 흐름에 함께 흔들려온 일상의 옆길에서 몇천만 년간 변함없이 생명을 길어 올린 대지의 힘을 담아내고 대지의 인상을 표현하는 백순실의 동다송은 생명이라는 근원적인 주제를 다룬다.(중략)”

이번 개인전 도록에 실린 서문을 보면 커피는 대지의 생명력을 표현하는 매개체요, 그 대지의 빛깔은 오로지 백순실 씨가 자연 안에서 체험한 생명의 다채로운 순간들이다. “사실 그 글은 제 딸이 썼어요. 누구보다 엄마의 삶과 예술가로서의 삶을 동시에 본 입장이다보니 작품의 의미를 단박에 짚어내더군요.”

물감을 버리고 커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 자체가 독특한 예술성을 부여받지 않을까 싶은 백순실 씨의 ‘동다송’. 그러나 그 탄생 과정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전적으로 땅의 생명력, 그 원초적 신비를 표현해야 하는 캔버스는 커피라는 새로운 소재를 호락호락 받아들이지 않았고, 작가 또한 원하는 질감과 색상을 얻기가 쉽지 않았던 것.

“누가 보면 커피 성분을 실험하는 화학자라고 했을 거예요. 커피 색상, 농담 조절을 위해 에스프레소를 뽑는 양 조절은 물론, 원두 원산지까지 구분하며 그 미묘한 차이를 놓치지 않았죠. 그리고 바탕의 질감이 흙처럼 연출되게끔 하기 위해 커피 분말까지 버리지 않고 실험했습니다.” 화가로서 재료를 탐구할뿐 아니라, 합성의 과정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그는 결국 석고를 통해 캔버스에 대지를 만들고, 그 위에 흙빛의 커피를 바르고 말리고 점 찍고 흘리기를 수백 번 반복하며 생명을 품은 땅의 노래 ‘동다송’을 완성했다.

땅 위에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고 싶은 화가

백순실 씨가 커피로 그리는 ‘동다송’은 어쩌면 바탕 그 자체가 그림의 주인공인지 모른다. 땅의 거친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물감과 화산석을 섞거나 석고로 미세한 질감을 만들고, 커피를 추출해 물로 몇 번씩 얼룩을 낸 화면은 반복과 기다림을 극복해야 하는 과정.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끝난 후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세상만사가 담긴 땅, 대지가 펼쳐져 있다. 하지만 이는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준비 과정일 뿐, 화가는 어릴 적 흙 위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듯 붓을 들고 떠오른 심상을 남기며 그 깊이 있는 바탕에 방점을 찍어 작품의 탄생을 알린다.

“신기한 것은 이토록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지향하는 것이 어릴 적 뒷동산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림을 그리던 때예요. 이걸 회귀 본능이라 해야 할까요. 그때는 나뭇가지 하나만으로 그릴 게 얼마나 많았던지. 무의식이 최고의 예술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돌이켜보니, 어릴 적 그때 그린 그림이 어떤 것이었을까 무척 궁금해요.”

(위) 카페 블루메 옆에 자리한 화단은 그가 ‘돌밭’을 개간해 만든 역작이다. 계절별로 1백 여 종의 야생화가 핀다고.


1 자연 화단과 작품으로 은근한 멋이 풍기는 카페 입구.
2 외벽 구멍 사이로 뻗은 나뭇가지의 잎이 건물을 아름답게 감싼다.


비록 어릴 적 그 그림은 바람결에 날아갔지만, 원숙한 화가로서 백순실 씨는 반복되는 일상, 커피를 마시는 행위에서 철학적 의미를 찾고 대지의 생명력을 밀도 있게 그려낼 만큼 무의식의 접점을 찾아가고 있다. 어쩌면 그의 작품은 이미 어릴적 그렸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백순실 씨의 개인전 <근원을 향한 일상>은 2011년 11월 2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중구 회현동에 있는 금산갤러리(02-741-6319 )에서 열린다.

글 이정민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