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의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의 실험을 끊임없이 추구해가는 디자이너 임선옥 씨. 삶을 퍼포먼스로 즐기며 패션계의 조용한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1 방 안을 꽉 채운 소파에 빈티지 패브릭을 씌웠더니 패치워크한 듯 생동감이 느껴진다.
2 오래돼 틈이 벌어진 벽지 사이로 명함과 스티커 등을 끼워둔다. 선글라스와 안경을 조명등에 매단 아이디어도 재미있다.
3 고운 명주 이불의 빈티지 버전.
“이미 제 마음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 서 있답니다.” 패션 디자이너 임선옥 씨. 날씨는 점점 스산한 겨울로 치닫는데, 그는 이미 겨울을 지나 여름을 향하고 있다. 이번 S/S 컬렉션이 끝나면 바로 내년 봄에 열릴 2012 F/W 컬렉션을 준비해야 하니 족히 1년은 앞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패션 디자이너의 숙명이리라. 숙명을 거스를 순 없지만 상쇄할 수는 있는 법.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더디게 흐를 것 같은 동네, 종로구 부암동에서 은둔하며 첨단과 유행이라는 패션의 속성을 가뿐히 초월하고 있다.
임선옥 씨를 만난 것은 멀티숍 ‘382 플레이 그라운드PLAY ground’의 오픈 날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코끝이 맑아지는 동네’에서 생활한 지도 어느덧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신사동 가로수길의 상권이 활성화할 무렵, 왜 그렇게 외진 곳으로 가느냐 만류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패션계의 빠른 ‘속도전’에서 한 걸음 물러나 한숨 고르고 싶은 그에게 한적한 부암동은 구원의 안식처였다. 또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디자인 자체에 집중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 오기 전과는 스스로 느끼기에도 믿기지 않을 만큼 큰 변화를 경험했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쓰시던 재봉틀을 TV장으로 활용했다. 윤수인 작가의 작품과 항아리의 매치가 이색적이다.
(아래) 그의 패션 철학이 담긴 문구.
열린 노동, 창작의 ‘놀이터’
소담한 골목길 입구, 하얀 벽면으로 둘러싸인 ‘임선옥IMseonoc’ 쇼룸은 옷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드러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 엉성하게 천을 드리운 안쪽이 작업실, 바깥쪽이 쇼룸이다. 현란한 컬러의 패브릭 때문일까, 이곳을 지나는 이들은 언제나 호기심 어린 눈으로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곤 한다. “오리고 박음질하고, 피팅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나의 작업물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 자체가 의미 있고 고귀하다는 걸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반은 성공한 셈이지요.”
그리고 지난 10월 4일, 두 번째 쇼룸을 오픈했다. 같은 골목길의 안쪽에 자리 잡은 멀티 콘셉트 숍 ‘382 플레이 그라운드’는 패션, 문화 콘텐츠, 디자인 프로덕트, 패브릭 등을 보여주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컬렉션을 통해 크리에이티브한 옷을 보여준다면, 공간으로 규정한 이 장소에서는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하겠다는 것이 1차 목표다. “페인팅, 타일까지 온통 화이트 컬러로 마감해 아무 벽에나 설치 영상을 틀거나 영화를 상영할 수 있어요. 동네 사람들을 불러놓고 쇼룸을 캣워크 삼아 하우스 패션쇼를 열 수도 있고요. 아, 패션쇼를 한여름 밤 백사실 계곡에서 펼쳐지는 올댓재즈 공연과 함께 엮어도 재미있겠네요.”
그는 오픈 날 설치작가 이영호 씨, 현대무용가 박소정 씨와 함께 공연을 펼쳤다. 춤과 옷, 예술이라는 각자의 작업 특성 중 ‘속도’에 초점을 맞춘 공연은 예술을 모르더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매개체가 있었으니 바로 ‘패션’이다. “패션은 트렌드의 중심에서 끊임없이 대중의 관심을 받는 분야예요. 그렇기 때문에 디자이너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춰 앞으로 나가야 하는지를 항상 고민해야 합니다.” 그는 디자이너로서 사회와 환경에 대한 역할 문제에서 철학이 분명하다. 최근 논란의 대상인 패스트 패션의 가장 큰 문제는 획일화된 스타일로 진정한 패션의 의미를 퇴색한다는 점. 그 역시 한때는 유행을 좇았다. 이른바 잘나가는 신진 디자이너 시절 트렌디하고 컬러감 있는 옷을 원 없이 만들었지만, 그 시기를 지나자 장식이 하나씩 빠져나가고 점점 더 기본에 충실한 옷이 되더란다. 현재 브랜드 ‘임선옥’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디자인은 어떤 장치 없이도 그저 입었을 때 멋이 느껴지며 편안한 상태의 옷이다.
같은 공간을 사유하는 부부는 사무실도 위ㆍ아래층으로 나눠 쓰는 금실 좋은(?) 이웃이다. 섬유 신문 를 발행하는 남편 장석모 씨는 디자이너인 아내보다 더 디자인에 열려 있고 패션에도 관심이 많아 패션 사진집과 잡지를 즐겨 본다.
(아래) 할머니가 쓰시던 그릇. 국그릇, 밥그릇, 반찬 그릇 등 크기와 모양에 따라 필요한 자재를 분류해 넣어두었다.
2차 목표는 직원들의 쉼터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디자이너들은 생각과 손의 움직임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매일 트레이닝하지 않으면 힘들다. 하지만 공부할 시간은 부족하다. 이때 오너의 눈을 피해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머리를 식히고 싶으면 책 한 권 들고 가도 좋고 크게 음악을 들어도 좋다. 그러면서 아이디어가 나오는 법.
382 플레이 그라운드 공간 구석구석에는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숨어 있다. 우선 재단실을 형상화한 공간은 브랜드 임선옥에서 개발한 특허 기술이 펼쳐진 곳. 팔ㆍ다리ㆍ네크라인ㆍ등판ㆍ앞판 등 옷을 이루는 모든 부위를 패턴화해 원하는 사이즈, 원하는 디자인, 원하는 컬러로 조합할 수 있다. 재킷, 원피스, 가방 모두 가능하다. 그뿐만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코너에는 원단과 직접 담근 차, 피클도 선보인다. 매장 한쪽에는 지리산 구례 지역의 생수도 판매한다. 손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뭐든 즐겁다는 그는 요즘 가회동에서 도자를 배우는데, 코리아 헤리티지 패션쇼를 위해 청자와 백자를 모티프로 텍스타일을 개발했다. 은은한 백자 달항아리가 마치 도트 문양 같기도 한 헤리티지 시리즈는 벌써부터 반응이 뜨겁다. 도자 문양은 의상뿐 아니라 침구, 쿠션 등 홈 패브릭 아이템에도 잘 어울린다. 옷과 지리산 생수, 피클의 조합이라니!
부암동의 랜드마크가 된 임선옥 씨의 첫 번째 쇼룸 스태프들이 모두 모였다. (왼쪽부터) 기획과 홍보를 맡고 있는 김진 씨, 재단을 담당하는 김영희 씨, 임선옥 씨, 디자이너 이현경ㆍ이재림 씨, 웹 디자이너 김상현 씨, 디자이너 김국태 씨다.
Fashion is not business
“얼마 전 막내 디자이너에게 5만 원을 주고 티셔츠를 사오라고 했더니, 모 브랜드에서 석 장이나 사왔더라고요. 저희 티셔츠를 주면서 같이 입어보라 했어요. 직접 입어보고 느끼라고요. 며칠 입어보더니 ‘아’ 하더라고요.”
임선옥의 옷은 디자인이 특이한 게 아니다. 대상이 다를 뿐이다. 20~30대를 대상으로 하는 옷은 가늘고 타이트하지만,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임선옥의 옷은 트렌드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 낱장의 티셔츠지만, 그 위에 턱시도 재킷을 입고 시장에도 가고 사무실에도 가는 이 시대 여성을 위한 옷. 디자인은 평균적이되 누가 입어도 편안한 밸런스를 찾아주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고품질을 유지해야 한다. 예를 들어 동대문에서 1만 원짜리 머플러를 사서 문제가 생기면 싼 게 비지떡이라며 값을 탓하지만, 브랜드 임선옥에서 1만원짜리 머플러를 샀는데 문제가 생기면 얘기는 달라진다. 인지도만큼 리스크가 큰 것. “저희 스태프가 모두 여덟 명이에요. 패션업계의 기준에서 보면 생산량에 비해 직원 수가 많은 편이지요. 투자가 많은 것에 비해 수익이 크지는 않지만 감안할 수 있어요. 우리가 시장에 요구하는 것은 노동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달라는 것입니다.”
왜 굳이 10만 원짜리 티셔츠를 만드는 것인가. 수익성을 따진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가 지난 15년 동안 고집스럽게 지켜온 이유는 바로 ‘이상理想의 70% 정도’를 실현하는 삶을 살기 위함이다. “제가 아니어도 판매나 비즈니스를 맡아주실 분은 많지요. 저는 작업을 지속하는 것 자체가 목표입니다. 한국에서는 디자이너가 사람을 고용해 옷을 만들고 유통시키는 어패럴 회사와 같이 단순한 비즈니스 형태가 정착되어 있어 창작물이 거의 없어요. TV와 같은 매체에서도 다양한 수단을 통해 자극적인 경쟁을 부추기는 것이 현실이고요.”
사실 누가 제일 잘하는 디자이너인지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매출로 이러한 평가가 가능할까. 디자이너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노련한 방법을 통해 그 디자이너의 창의적 요소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크리에이티브한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집단’, 그것이 바로 디자이너 임선옥 씨가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이자 목표인 셈이다. 그는 2009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 실크 패브릭에 가면을 씌우고 늘어뜨린 설치 작업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이미 미술계에서 많은 러브콜을 받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의 의상이 예술화되면 미술관도 훨씬 부드러워질 수 있어요. 사실은 의상실에 있어야 하는 옷이 미술관으로 옮겨갔을때의 충돌과 서로 다른 감각을 받아들일 거라는 얘기죠. 저는 고물상에 다니는 걸 워낙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이들이 찾지 않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에요. 서로 소통하되 해석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 경계를 나누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창의력의 원천이지요.” 이쯤 되면 디자이너보다는 ‘크리에이터’가 더 맞는 역할인 듯싶다.
1 382 플레이 그라운드(02-3443-3937)의 프라이빗한 공간. 그간 모아온 서적과 자료들을 수집해놓은 아카이브로 직원들의 쉼터로 활용한다.
2 1998년 서울 컬렉션 초청 이후 결혼하던 해를 제외하고 매해 쇼를 진행했다. 쇼를 위해 준비한 아트워크와 2012 S/S 컬렉션 의상 보드가 한눈에 들어온다.
3 임선옥 씨의 디자인은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동양적인 선과 위트가 느껴진다.
4 핸드 빌트 숍에서 내 마음대로 디자인할 수 있는 백 컬렉션.
5 독일 브레맨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디자이너 이재림 씨가 일러스트가 그려진 스티로폼 오브제를 제작해 382 플레이 그라운드 입구를 장식했다.
6 옷의 각 부위를 패턴화해 원하는 컬러와 조합으로 재킷, 원피스, 블라우스 등을 제작할 수 있는 382 플레이 그라운드의 핸드 빌트 코너.
7 ‘과거의 경험은 이미 새로운 데이터가 될 수 없다’, 임선옥 씨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토 중 하나다. 그는 신진 디자이너가 들어오면 가르치는 대신 경험으로 깨닫게 한다.
섬 같은 나의 집
옷은 몸을 담는 그릇이다. 집 또한 사람의 삶을 담는 그릇이다. 그 프로젝트 단위가 크고 작을 뿐이지, 개념은 건축과 패션이 결국 같은 것이다. “2012 S/S 컬렉션에서 발표할 의상 중 ‘집’ 프린트가 있어요. 건축가 승효상 씨의 ‘빈자의 미학’을 나름대로 형상화한 것이에요. 빈집, 저의 삶의 모토와도 같지요.”
작업 외에는 아무것도 욕심부리는 게 없다는 그는 시어머니께 물려받은 집에서 살고 있다. 이곳은 남편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살던 집이라 의미가 크다. 주변 집들은 개발하거나 새로 지은 반면, 유일하게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마치 길 한가운데 섬처럼 떠 있는 듯하다. 부부는 어머니가 쓰시던 가구를 대부분 그대로 사용한다. 다양한 원단으로 감싸놓은 아주 평범한 소파, 특히 빨간 재봉틀 위에 놓은 스마트 TV가 인상적이다. 바로 그가 말한 이질적인 충돌에서 비롯된 매력이다. 그는 이 이질적인 충돌을 곳곳에 이용했다. 다양한 원단으로 감싼 아주 평범한 소파, 드레스룸에 떡하니 들어가 있는 김치냉장고, 낡아서 틈이 벌어진 벽지 사이에 끼워놓은 메모와 명함들…. 한마디로 ‘여백이 있고 편안해서 옷을 입는 사람이 그 안을 스스로 채울 수 있는’ 이라는 그의 디자인 모토와 닮은 집. 사람이 들어섰을 때 비로소 공간의 콘셉트와 스토리가 완성되는 집이다.
(왼쪽) 패션과 라이프스타일을 아우르는 그의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소품. 목에 칼라처럼 두르기도 하고, 스툴 위에 올려 방석으로 활용한다. 쌓으면 하나의 아트워크가 되는 일석삼조 아이템.
섬유 신문 의 발행인이기도 한 남편 장석모 씨와 그는 인터뷰로 만나 결혼에 골인한 케이스다. 디자이너가 만든 옷을 입고 신랑 신부가 하객을 맞았던 파티, 결혼식 역시 하나의 퍼포먼스로 재미있게 치렀다. “디자인을 하지 않았다면 화가가 되었겠죠. 하지만 디자인을 하면서 제 안에 갖혀 있던 무언가가 많이 열렸어요.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오히려 성향을 밝은 쪽으로 끌어낼 수 있었지요.” 바텐더를 동경하는 남편, 사람 좋아하는 아내는 ‘바’를 운영하는 것이 가까운 미래의 꿈인데, 382 플레이 그라운드에서 그 전초전을 벌일 예정이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계속되는 쇼를 준비하느라 “침대라도 갖다놓고 지낼 판”이라던 사무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벽면 한 구석의 선반 위에는 금속 정리함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메탈, 빈티지, 앤티크 등 정직하게 적혀 있는 견출지 네임 태그가 붙은 금속 정리함이 올려진 선반 너머 재단실 사이에 그의 자리가 있다. 생각과 노동이 분리되지 않고 한꺼번에 수반되어야 한다는 그의 이상은 그의 공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작업실은 그 순간 무수한 의미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창조적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영감의 공간이자, 힘든 작업을 즐겁게 수행할 수 있는 노동의 공간. 그리고 모델들이 금방이라도 옷을 갈아입고 뛰쳐나갈 수 있는 캣워크가 된다. 작업실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작업대. 임선옥 씨는 작업대를 사이에 두고 춤추듯 그곳을 흘러 다니며 디자이너들을 진두지휘한다.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 그게 바로 디자인이야!”
- [라이프&스타일]패션 디자이너 임선옥 씨 진지함과 유쾌함이 공존해야 크리에이티브한 디자인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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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워크를 통해 보여주는 한국식 아방가르드, 날카로운 눈화장으로 위장했지만 결국 들키고 만 부드러운 성품, 초 단위로 생각이 바뀌어 얻은 별명 카멜레온. 패션 디자이너 임선옥 씨는 ‘속도’와는 거리가 멀 것 같은 한적한 동네에서 패션과 문화, 라이프스타일까지 아우르며 ‘이상理想의 70%’를 실현하는 삶을 살고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