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에 속고 사랑에 속는 당신에게
토마스 만이 말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라고. 사랑에도 지고 이기고가 있을까? 그렇다면 설령 자발적인 희생이라고 할지라도 사랑에 지는 거다. 늘 이기는 사람, 받는 사람 입장에서 사랑은 위대하다. 그러나 언제나 지는 사람은 늘 대책 없는 사랑을 한다.
소설 속 봉순이 언니는 ‘집안일의 희생양’ 식모다. 같은 밥상에 둘러앉아 함께 밥 먹는 식솔이지만 가족은 아니다. 나에게는 늘 위로 받을 등을 빌려주고, 밤에 안아서 재워주는 존재일지라도 부엌데기 신분은 변하지 않는다. 도둑 누명을 씌워 제 발로 걸어나가게 했더라도, 나쁜 남자와 연애를 해서 집 나간 은혜를 모르는 년 일뿐이다.
‘우리 가족’은 봉순이 언니의 노동력을 원했고, 세탁소 총각은 봉순이 언니의 몸과 돈을 원했고, 봉순이 언니의 첫 남편은 아들을 원했고, 그 뒤에 만난 개고깃집 남자는 섹스와 노동력을 원했을 뿐이다. 봉순이 언니는 끊임없이 남자들과 도망을 쳤지만, 다시 혼자가 되어 돌아왔고 그때마다 아이와 가난을 하나씩 달고 왔다.
“그 사람은 달라. 내가 보듬어주어야 해”라는 건 사랑의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이런 대책 없는 사랑은 늘 질 나쁜 연애에 의한 질 나쁜 이별을 부를 뿐이다. <선데이서울>의 체험 수기처럼 시간과 장소, 등장인물은 달라도 늘 같은 줄거리다. 많이 배우나 적게 배우나, 돈이 많으나 적으나 대책 없는 사랑의 종착역은 이별이나 이혼 같은 암전이다.
“나는 안다. 그녀가 한 번 남자와 도망갈때마다 그녀가 얼마나 목숨을 걸고 낙관적이어야 했을지를.”(<봉순이 언니> 265쪽) 누가 헌신적인 사랑을 위대하다고 했는가? 그건 이기는 사람, 받는 사람이 바라볼 때 그러할 뿐이다.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봉순이들’에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어떻게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면 양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당신의 사랑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당신의 사랑을 받는 혹은 이용하는 인간들이, 아니 사회가 틀려먹었을 뿐이다”라고 편을 들어주었다면 마음이 조금 편해질까?
“삶에서 사소한 일이 없는 이유는, 매 순간 마주치게 되는 사소한 선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총체에 의해 결정되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사소한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사소한 것의 방향을 트는 삶의 덩어리가 중요하다는걸 내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봉순이 언니> 198쪽)
아니다,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사랑에 지는 존재들은 살아가면서 더욱더 사랑에 질 뿐이다. 그래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조차도 지독하게 고통스럽다.
고통이여, 도가니에서 끓어넘쳐라!
살면서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게 하는 것들은 깡그리 태워버리면 좋을 것이다. 끓어올라야 할 때 제대로 끓어오르지 못한다면 평생 자신만의 도가니 안에서 ‘끓는 지옥’을 견뎌야 한다. 도가니가 절로 깨지는 법은 없으므로. 서울에서 탈출구를 찾아 무진으로 온 강인호는 제자인 청각장애 아들이 오래전부터 성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아이들 편에 서서 자애학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파헤치지만 끝까지 싸움에 동참하지는 못한다. “당신은 여기서 그만하라”는 아내 때문이다. 누구나 혼란의 도가니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 용서받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서가 아니다. 혼란과 싸우는 동안 끊임없이 내 안에 작은 균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패배한 짐승’으로 남느냐, ‘갈망을 가진 인간’임을 발견하느냐! 홀로는 쓸쓸하고 더불어 있어도 외로운 사람들, 군중, 그래서 끝끝내 홀로이지도 더불어 함께이지도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거짓이다.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 세상이라는 호수에 검은 잉크가 떨어져 내린 것처럼 그 주변이 물들어버린다. 그것이 다시 본래의 맑음을 찾을 때까지 그 거짓말의 만 배쯤의 순결한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도가니> 246쪽)
정의는 실현될 수 있을까? 한 사람 한 사람은 구원될 수 있을까? 가진 자가 제 걸 뺏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걸 빼앗고 싶어 하는 에너지의 두 배인데!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다 알기 때문에 더욱 교활해지는데!
당신의 위악과 슬픔을 나는 사랑한다
누구나 살면서 자신의 인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조차 모르는 건 아니다. 다만 그것을 끊어내지 못할 뿐이다. 받은 상처를 숨기기 위해, 상처받는걸 두려워하기 때문에 위악으로 위장할 뿐이다. 그들의 위악이 잘못된 건 아니다. 잘못은 그들에게 상처를 낸 자들에게 있다.
어릴 때 성폭행을 당해서 사랑하는 남자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나(유정)와 어릴 때부터 버림받아 소년원과 교도소를 전전하는 그(윤수)는 위악을 떨며 살아간다는 면에서는 다를 바 없다. 한 사람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으로, 다른 한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상처를 드러내지만, 위악을 떨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아무도 그 상처를 몰라주기 때문이다.
“사랑은 관심이다. 정말 몰랐다,고 말한 큰오빠는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그러므로 모른다, 라는 말은 어쩌면 면죄의 말이 아니라, 사랑의 반대말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248쪽)
어쩌면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제삼자가 입회한 종교위원과 재소자와의 만남에서조차 사랑은 싹틀 수 있다. 내 이야기를 윤수가 귀 기울여 들어준다는 것, 윤수의 이야기를 내가 들어준다는 것, 내 이야기를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윤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를 찾아간다는 것. 슬픔은 둘 사이를 무장해제한다. 서로의 독백을 대화로 만들어버리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치유하게 한다.
“내가 마지막 말을 마쳤을 때 그의 눈빛이 출렁, 했다. 출렁, 하는그의 눈빛을 보자 내 가슴도 따라 출렁했다. 먼 계곡 양 가장자리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어떤 밧줄 같은 것이 우리 사이에 놓여지는 것 같았다. 그것을 잡은 이쪽에서 파르르 떨면 저쪽에서 잡은 손도 파르르 떠는 것 같은 기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203쪽)
슬픔에 빠진 자, 상처에 신음하는 자, 위악에 빠진 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산다는 건 서로 성장하라는 명령
누구나 자신의 존재가 무거워질 때는 고독해진다. 술을 마시기도 하고, 누군가 잡고 말하기도 한다. 울기도 하고, 원망도 한다. “하느님, 대체 왜 우리를 만드셨습니까. 내가 생각해봤는데요. 하느님이 우리를 죽게 하는 것, 병들게 하는 것, 그것까지도 다 이해할 수 있다 쳐도, 하느님 뭐하러 우리를 만드셨나요. 하느님 혼자 이 세상 만드시고 땅과 하늘과 바다의 짐승까지 다 지으시고 그냥 보기 좋았다, 하고 마시지, 뭐하러 우리를 만드셔서 하느님도 우리도 이 고생인가 말이에요.”(<수도원 기행> 30쪽)
봉순이 언니처럼 이기적이지 못한 사람(<봉순이 언니>), 유정처럼 상처를 감추기 위해 위악을 떠는 사람(<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인호처럼 늘 고뇌를 안고 있는 사람(<도가니>), 윤수처럼 절망한 사람(<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모두 아무리 힘들더라도 살아간다. 생명이라는 말의 뜻이 ‘살아 있으라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살아내는 하나의 이유는 오르막은 다 올라보니 오르막일 뿐인 거야. 가까이 가면 언제나 그건 그저 걸을 만한 평지로 보이거든.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눈이 지어내는 그 속임수가 또 우리를 살게 하는지도 모르지.”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15쪽)
참 다행인 건 사는 동안 누군가가 늘 이렇게 우리를 응원해준다는 것이다. <탈무드>에서처럼 풀잎마다 천사가 있어 날마다 “자라라, 자라라”라고 속삭이든, 누군가 사랑한다고 말하든, 누군가 위로의 손길을 보내든, 누군가 같이 아파해주든. 인간은 전적으로 선하지도, 전적으로 악하지도, 전적으로 약하지도, 전적으로 강하지도 않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살게 하는 것이다.
- [작가 공지영 씨의 소설들] 인간에 대한 예의
-
공지영 씨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하나의 말이 화두처럼 남는다. 인간에 대한 예의. 그의 첫 작품집 제목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는 누구보다 뜨겁게 ‘예의’를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인간은 <봉순이 언니>의 ‘식모’일 수도, <도가니>의 ‘청각장애인’일 수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사형수’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상처받기 쉬우므로 위악을 부리는 척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한없는 연민, 절절한 사랑의 시선일 수도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