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평상시 마음속 깊이 숨어 있다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갑작스럽게 치밀어 오른다. 심리학적으로 억압된 것은 어김없이 귀환하기 마련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른바 화병이라는 것이 한국인 특유의 정신적 질병이었으나 이제 어엿하게(?) 국제 명칭이 될 만큼 보편적 질병의 이름이 된 것이다. 쉽게 말해 화병은 우울과 분노를 억누르고, 그 억압된 분노가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고백건대, 나 역시 어마어마한 분노를 느낀 적이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괴롭힌다. 처음엔 그 분노를 대항할 만한 힘이 없었고, 다음 단계에선 침묵이라는, 당시로선 최선의 항변을 선택해야 했다. 사실, 분노를 행한 대상은 누군가의 분노로 매우 고통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나 역시 내가 받은 상처가 내면화되어 어느새 상처를 준 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곤 한다.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노를 다스려야 하는가? 분노해야 할 때와 분노하지 말아야 할 때를 아는 지혜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예술 혹은 예술가들의 분노는 어떤 것이었을까? 분노를 그린 그림 한 점과 분노로 인해 참담하던 두 예술가를 소개한다.
모세의 뿔 미술사에서 분노를 가장 잘 표현한 그림은 어떤 작품일까? 바로 미켈란젤로가 만든 ‘모세’(1513~16년경, 대리석, 높이 254cm)상이다. 시스티나 천장화가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사망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만든 묘당에 안치될 조상 중 하나가 ‘모세’상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머리 위의 뿔과 십계명이 새겨진 석판을 가지고 있는 신의 대리자로서 모세를 드라마틱하고 위엄 있게 묘사했다. 이처럼 미켈란젤로의 ‘모세’ 상은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의 석판을 받고 내려온 모세가 유대인들이 황금송아지를 우상 숭배하는 것을 보고 분노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모세가 고개를 돌려 황금송아지를 보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손으로 수염을 움켜잡았으나, 석판이 미끄러지자 이를 잡으려고 오른손이 물러나면서 한 손가락만이 왼쪽 수염 다발을 잡게 된 것이라고 추측했다. 즉 분노가 치밀었으나 이를 자제하고 난 다음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상은 분노의 서곡이 아니라, 분노를 삭이고 난 다음의 장면을 조각했다고 추정한다. 미켈란젤로는 그래야만 이 무덤의 수호자로서 품격을 부여받는다고 생각한 것일까?
미켈란젤로는 왜 뿔이 난 ‘모세’상을 제작한 것일까? 화가 났다고 뿔을 붙여놓을 정도로 그는 단순하지 않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시나이산에서 십계명 석판을 들고 내려오는 모세가 백성들에게 다가서자 얼굴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광선 ‘레이ray’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케렌keren인데,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 이 단어가 뿔horn로 잘못 번역된 것이다. 그래서 라틴어판 성서를 읽은 사람은 모세가 뿔이 났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다. 미켈란젤로 역시 그런 오류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다른 설이라면, 고대 사람들은 동물의 뿔에 초자연적 힘이 있다고 믿었고, 신적 존재를 이마에 뿔이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미켈란젤로가 참고했을 것이다.
분노 전이든 분노를 삭이고 난 후든, 모세의 분노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특히 모세는 여러 차례에 걸쳐 분노를 폭발적으로 일으킨 사람으로 유명하다. 모세는 지성과 영성을 모두 갖춘 온유한 사람으로, 쉽게 분노하지 않지만 한번 분노했다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쏟아냈다. 특히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백성들에게 그가 드러낸 분노는 ‘쓰나미’ 수준이다. 사실 구약시대 모세는 야훼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하느님의 뜻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모세의 분노는 물질만능주의에 의해 인간성이 피폐화되는 세상을 향한 분노였다.
우정의 분노, 세잔과 졸라
세잔은 소심하고 은둔자적 기질이 강한 화가였다. 한번 맺은 관계를 깊고 소중하게 여기는 세잔이 인생에서 가장 분노한 순간은 바로 에밀 졸라와의 우정에 금이 갔을 때였다. <목로주점>으로 유명한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졸라는 세잔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세잔과 졸라는 모두 이탈리아계로 남프랑스 엑스의 부르봉 중학교에서 우정을 맺은 후 30년 이상 우정을 지속하던 사이다. 중산층 가정에서 숨 막힐 정도로 과잉보호를 받은 세잔에 비하면 졸라는 매우 조숙했다. 두 사람은 함께 수업에 빠지기도 하면서 사춘기의 불안을 공유했고, 자주 서신을 교환하며 인문학적 토론을 벌이는 등 예술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특히 졸라는 법학과 미술을 동시에 공부하던 세잔에게 화가로서 철저한 삶을 살도록 종용했다. 그는 시종일관 세잔의 진정한 보호자이자 조언자 역할을 해왔다. 졸라는 세잔의 재능을 인정했지만 그의 게으름과 우유부단함, 조급함, 변덕스러움을 가차 없이 힐난하고 충고했다. 하지만 세잔은 그의 충고를 자연스럽게 수용하지는 못했다.
미술비평을 하는 등 지속적으로 미술계에 관심이 많던 졸라는 오랫동안 세잔의 작품에 대해 판단을 유보한 채 애매한 태도를 취해왔다. 궁극적으로 졸라는 세잔의 작품은 물론 인상파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 졸라의 이 모호한 태도에는 세잔에 대한 우월감과 함께 불신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어쨌든 졸라가 성공 가도에 올라서고 호화롭게 결혼한 1870년경부터 이들은 멀어지게 된다.
세잔은 순식간에 거머쥔 재산으로 안락한 생활을 누리던 졸라에게 역겨움을 느꼈다. 결국 두 사람은 졸라의 소설 <작품>(1886)의 출간을 계기로 30년 우정에 종지부를 찍는다. 졸라는 이 소설에서 세잔을 모델로 삼아 그를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실패한 화가, 그러니까 천재성이 있었음에도 끝내 개화하지 못하고 자기 화실의 실패한 걸작 앞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인물로 그려냈다.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세잔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오른쪽) <메당의 성>, 1880년 경. 졸라가 <목로주점>으로 성공하고 난 뒤 구입한 별장으로 세잔이 자주 이곳을 이용했다.
그들은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작품>이 간행된 지 10년 만에 두 사람을 잘 알고 지내던 친구가 그 둘을 만나게 하려고 시도했으나 모두 만남을 회피했다. 이미 졸라는 훈장을 받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의 후보로 선출되는 등 눈부신 대가의 반열에 오르고 있었다. 세잔 또한 유럽의 다른 국가에까지 명성이 자자할 만큼 세계적 예술가가 되어 있었다. 1895년, 세잔은 최초로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을 때도 자신의 전시회를 보지 않았다. 전시도 판매도 무관심하던 세잔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갔으나, 그는 그런 명성이 별로 달갑지 않은 듯 세속의 미술계나도 거리를 두면서 지냈다.
진정 졸라는 그의 책에서처럼 죽을 때까지 세잔을 실패한 천재 화가로만 생각한 것일까? 어쩌면 자신과는 너무 다른, 예술에 대한 지독한 몰입과 지나친 순수 그리고 현대미술에 혁명을 가져올 만한 그의 천재적 탐구 정신에 대해 부러움과 동시에 콤플렉스를 가진 것은 아니었을까? 졸라는 1902년 파리의 자기 방에서 질식해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을 옛 하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세잔은 불같이 화를 냈다. 죽은지 4년 후인 1906년에야 치른 졸라의 흉상 제막식에 참석한 세잔은 제막식 내내 흐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도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사랑의 분노, 클로델과 로댕
1883년 프랑스 파리의 사설 학원 아카데미 콜라로시에서 조각 수업을 받던 카미유 클로델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한 남자를 소개로 만난다. 스승 알프레드 부셰가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 조각가로서 황금기를 보내고 있던 오귀스트 로댕을 소개한 것이다. 로댕은 카미유의 발랄한 착상과 독창적 재능,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에 감동받아 순식간에 그에게 매료된다. 그들에게 스물두 살의 나이 차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로댕은 파격적으로 조수로 기용한 클로델에게 ‘지옥의 문’의 섬세한 부분을 맡긴다. 이미 둘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이 싹텄고, 로댕과 클로델은 서로 열렬히 사랑의 편지를 썼다. 클로델은 자신과 로댕의 열정적인 사랑을 ‘사쿤탈라’라는 작품을 통해 드러냈고, 이 작품으로 살롱전에 수상하면서 정식으로 조각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로댕 또한 ‘키스’ ‘영원한 우상’과 같은 작품을 통해 격정적 사랑을 표현하는 등 절정기를 맞는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은 이들의 사랑도 파국으로 치닫는다.
(오른쪽) 십자가에 못이 박힌 듯 카미유 클로델은 파리의 자택에서 세상을 외면한 채 살아갔다.
로댕에겐 30년 동안 동거하던 로즈 뵈레가 있었던 것! 로댕에게 클로델이 지적으로 통하는 영원한 정신적 연인이었다면, 로즈는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늘 엄마처럼 돌아가야 할 고향 같은 존재였다. 사실 로즈는 로댕의 첫사랑이자 젊은 시절부터 함께한 조강지처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로즈는 클로델의 작업실에 쳐들어와 그에게 심한 욕설과 분노를 퍼부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로댕은 두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로즈를 데리고 떠나버렸다. 당시 클로델의 드로잉을 보면, 로댕을 로즈에게 꼼짝 못 하는 늙은이, 우유부단한 남자, 자신을 버린 파렴치한으로 묘사하고 있다.
로댕은 비록 로즈를 버릴 수 없어 클로델과 헤어졌지만 그를 몹시 그리워했다. 그만이 끊임없이 예술적 영감을 준 뮤즈였기 때문이다. 로댕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클로델을 붙잡으려 했지만, 클로델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로댕과의 접촉을 원치 않는다는 편지를 써 보내는 등 로댕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로댕에게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조각뿐이라고 생각한 클로델은 오로지 작품 제작에만 몰두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지만 가장 뛰어난 작품을 내놓았고, 평론가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한 평론가가 그의 특정 작품을 두고 로댕의 흔적이 엿보인다고 혹평했다. 클로델은 분노했고, 당장 그 평론가에게 로댕이 데생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면서, 자기 작품의 독창성을 천명하고 정정 기사를 게재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도 클로델의 조각에는 여전히 로댕의 영향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로댕의 그늘이 너무도 컸던 탓이다.
게다가 로댕은 클로델의 작품 제작을 방해하기도 했다. 클로델은 ‘성숙한 시대’를 통해 한 여자에게 끌려가는 나약한 남자와 애원하는 여자를 그렸다. 누가 봐도 그 작품은 로댕과 로즈 그리고 클로델의 삼각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로댕은 이 작품이 몰고 올 스캔들을 감지하고, 이 작품을 주물로 완성할 수 없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한편, 로댕은 클로델 몰래 전시를 주선해주거나 고객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또 클로델의 대인기피증과 결벽증적 태도를 걱정하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대의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을 보는 것이 안타깝소. 자잘한 구설에 동요되지 마시오! 무엇보다 변덕스러운 싫증으로 친구들을 잃지 마오!” 그러나 로댕의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클로델을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왼쪽) 카미유 클로델과 로댕의 결별을 알레고리로 상징하는 작품 ‘성숙한 시대’.
클로델은 로댕의 흔적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더욱더 조각에 몰두했고, 생활은 점점 더 궁핍해져 최악의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이 모든 불행이 로댕 때문이라며 치를 떨었다. 클로델은 ‘망할 놈의 로댕’ ‘교활한 놈’이라고 부르며, 로댕이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고 믿기 시작했다. 로댕은 대표작 ‘지옥의 문’ ‘생각하는 사람’ ‘칼레의 시민’ 등으로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로 승승장구했다. 이러한 로댕의 대대적인 성공은 클로델에게 더 큰 좌절감을 안겨줄 뿐이었다. 그는 문을 걸어 잠근 채 은둔 생활을 시작했고, 자신의 작품을 파괴하는 등 우울증과 피해망상이 심해져갔다. 급기야 그는 “로댕이 나의 재능을 두려워해 나를 죽이려 한다”고 주장했다. 1913년 가족들은 그를 정신병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병세가 호전되어 퇴원 조치가 취해졌으나 가족들(특히 엄마)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30여 년 동안 클로델은 한 점의 작품도 제작하지 못하고, 그저 정신병원에서 꽃에 물을 주는 일로 소일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끌로델은 평생 로댕을 원망하며 그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렸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클로델을 파멸로 이끈 것은 바로 자신의 분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