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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휴대전화 속 당신의 이름은? 남편들의 이구동성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케빈 코스트너’라는 잘생긴 배우, 광활한 초원 위를 달리는 버펄로 떼, 인디언과 백인의 우정 등 넉넉한 볼거리로 흥행을 기록한 수작이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게 남아 있는 잔상은 인디언 작명법이다.

극 중 인디언 족장의 이름은 ‘열 마리 곰(Ten Bears)’이며 나중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여자의 이름은 ‘주먹 쥐고 일어서(Stands with a Fist)’이다. 영화 제목인 ‘늑대와 춤을’도 주인공의 인디언식 이름인데, 멀리서 늑대와 장난을 치고 있는 존 던비(주인공의 영화 속 이름)를 보고 족장은 느낀 그대로 작명을 해버린 것이다. 직감의 힘을 믿으며 세상의 사물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읽고 해석하는 인디언의 심상心象에 감동받았고, 그것을 그대로 반영하는 그들의 작명법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문제는, 무엇이든지 새로운 것을 접하면 한 번은 꼭 써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놈의 성격이다. 그즈음 결혼한 나는, 순정한 신혼의 단꿈에 흠뻑 빠져 있던 새댁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야, 살다 보면 지겹고 지루할 때도 있을 거야.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한 남자, 한 여자만 바라보며 산다는 게 쉬운 일이겠어? 그래서 말인데, 서로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부르자. 그러면 여러 명과 살고 있는 느낌이 들지 않겠어?”

비싼 밥 먹고 식은 소리를 무척이나 진지하게 늘어놓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당시만 해도 순진하고 순종적이던 아내는 남편이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머리카락을 잘라서라도 조력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러세요”라고 답한 것이다. 그 이후부터 나는 멀쩡한 아내의 이름을 놔두고, 마구 생각나는 대로 아내를 부르게 되었으니 “혜수야, 밥 좀 줘” “진실아, 뭐 하니?”가 그 용례였다. 국내파 여배우랑 사는 것이 좀 지루하면 ‘소피 마르소’ ‘피비 케이츠’ 등도 불러내서 같이 밥을 먹거나 TV를 보곤 했던 것이다. 아내도 나의 강요에, 정우성이나 장동건 등을 중얼거렸지만 이 게임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은 거의 없어 보였고 뭔지 찜찜한 느낌을 숨기지 못하던 찰나, 급기야는 일이 터져버렸다.

그날은 회사 가족 야유회로 남한산성에 갔는데, 우리 부부에게 동료들이 짓궂은 장난을 많이 했다. 특히 한 녀석이 아내를 보며, “제수씨 때문에 이 친구 장가가는 날, 우리 회사 노처녀 은숙 씨가 얼마나 울었는데요. 인간 ‘말종’도 결혼을 하는데 왜 자기는 못 하냐면서요. 둘이 워낙 친했거든요.” 그 자리에서는 아내도 호호 웃었는데, 행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은숙아, 재미있었어?”라고 말하자, “그래, 아예 은숙이랑 살아라 살아! 퍽퍽”을 끝으로 이 재미난 놀이는 영원히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인디언들은 그 사람을 하나의 풍경으로 묘사하면서 이름을 지어주고, 나는 아내에게 엉뚱한 이름을 불러대다 두들겨 맞았지만, 어찌 되었든 이름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의미다. 김춘수 시인도 전 국민의 애송시인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시인은 이름을 생명의 시작이며, 관계와 관계를 이어주는 오작교로 해석한 것이다.

연애 시절을 돌이켜보면, 지금 한창 연애에 빠져 있는 청춘들도 마찬가지로, 서로에게 특별한 이름을 지어주고 자기들끼리의 암호로 공유한다. ‘완두콩과 애기 돼지’ ‘알콩이, 달콩이’ ‘슈렉과 미녀’ 등등 남들이 들으면 그대로 닭살이 돋아 춘천의 닭갈비집 불판에 뛰어들고 싶은 이름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천인공노(?)하게도 중년이 넘어서까지 이런 닭살 짓을 하는 부부들이 있음을 최근 확인했다.

테니스장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마흔 중반의 후배가 두고 간 휴대전화가 삐리리 울린다. 슬쩍 액정 화면을 보니, 발신인의 이름에 ‘우리 자기’라고 찍혀 있다. 마침 후배가 왔기에 나는 놀려댔다. “천년만년 신혼일세. 우리 자기가 뭐냐, 우리 자기가. 크흐흐흐”. 그러자 후배가 발끈하며 물었다. “자기한테 자기라고 하지 뭐라고 해? 그럼 형님은 휴대전화에 형수님을 뭐라고 써놨는데?” “나? 마눌.” 나의 호연지기가 빛을 발할 찰나, 옆에 있던 중년남이 한마디 했다. “내 휴대전화 속 아내 이름은 밀루유떼 Miluju Te인데. 체코어로 ‘사랑해’라는 뜻이거든.” 졸지에 조선시대 고루한 남자가 돼버린 나는, 그렇다면 다른 중년들은 어떠할까 싶어 트위터를 통해 설문을 해보았다. 그랬더니 딱 두 파로 나뉜다. 아내의 이름을 ‘집사람’ ‘집’ ‘김○○(실제 이름)’ 등으로 쓴다는 내 과科가 거의 절반, ‘나의 여신님’ ‘중전 마마’ ‘짝꿍’ ‘소울메이트’ 등으로 쓴다는 남자가 나머지 반이다. 반면 여자들의 경우는 대부분 연애할 때처럼 남편의 애칭이 휴대전화에 저장돼 있었다.

나는 닭살파가 의외로 많다는 것에 자극을 받은 후 그렇다면 나도 아내의 이름을 ‘효리’라고 할까 ‘아이유’라고 할까 고민하다가, 나이 들어서 맞으면 약도 없겠다 싶어 테니스 모임 친구들에게 아이디어 하나씩 대보라고 말했더니 문제의 ‘자기 남’과 ‘밀루유떼 남’이 하는 말이 걸작이다. “형, 뭘 그런 걸 고민해? 그런 건 마누라들이 알아서 입력해놓는 거 아냐? 나는 휴대전화에 이름을 어떻게 바꾸는지도 몰라.” 헐! 그런 거였어? 남자들의 낭만은 진정 도라지 위스키 한 잔으로 ‘쫑난’ 거였어?

추신 지난 호에 작가의 도서 <사장의 본심>과 관련한 퀴즈 정답은 (4)번입니다. 너무나 많은 <행복> 독자들이 메일을 보내주셔서 놀랐습니다. 약속대로 선착순 다섯 명과 보너스 한 명, 총 여섯 명에게 작가 친필 도서를 보내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윤용인(노매드 미디어&트래블 대표, www.nomad21.com, 트위터 @ddubuk) 

담당 최혜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