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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의궤 속에 나타난 조선 왕조는 동방예의지국, 예술 강국이었다
외규장각 의궤를 꼼꼼히 들여다 보면 당시 왕실의 예법과 법도뿐만 아니라 반차도와 도설 속에 나타난 회화 기법, 책의 제본과 장정 방법까지 살필 수 있다.

왕실의 혼례식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왕실의 혼인 과정 중에서 첫 번째로 행하는 것이 규수를 선택하는 간택이었다. 국가에서는 왕실의 결혼에 앞서 금혼령을 내리고 결혼 적령기에 있는 전국의 모든 처녀를 대상으로 ‘처녀 단자’를 올리게 했다. 그러나 실제 처녀 단자를 올리는 응모자는 25~30명 정도에 불과했다. 실제 규수가 내정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경제적, 정치적 부담이 따르다 보니 기피하는 경향이 컸다. 왕비를 간택할 때는 세 차례의 심사를 거치는데, 대개 1차에 6~10명, 2차에 3명, 3차에서 최종 1명을 선택했다. 삼간택에 뽑힌 규수는 별궁에 모셔졌다. 별궁에서 왕실 법도를 배운 규수는 왕실 혼인 의식의 기본이 되는 육례六禮에 따라 국왕과 혼례식을 치렀다.

외규장각 의궤 중 <가례도감의궤>의 반차도는 국왕이나 왕세자가 왕비나 왕세자빈을 맞이하기 위해 별궁으로 가는 친영親迎 의식 후에 궁궐로 돌아오는 행차를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조선 후기 반차도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왕의 행차를 그린 앞부분과 왕비의 행차를 그린 뒷부분이 그것이다.

왕의 연輦(가마)은 부연 (임시 가마) 다음에, 왕비의 연은 왕비의 책봉과 관계된 교명敎命, 옥책玉冊, 금보金寶, 왕비가 입을 명복命服을 실은 가마들의 뒤쪽에 배치되었다. 행사가 열리는 지역의 관리와 정부 관리들이 선두에 서고, 호위를 맡은 무관들은 왕과 왕비의 연과 함께 중심부 를 이뤘다. 그다음 혼인 행사를 주관한 관리들인 도제조, 제조, 도청, 낭청들이 행렬의 뒷부분을 이룬다. 이밖에 상궁, 내시를 비롯 행렬의 분위기를 고취하는 악대, 질서를 유지하는 군뢰軍牢들이 임무와 역할에 따라 행진하는 모습이 의궤에 그려져 있다. 또 여성도 많이 등장하는데, 말을 탄 상궁을 비롯해 침선비針線婢 등 궁궐의 하위직 여성들까지 다양하다. 행렬에는 비단에 상징적 의미를 지닌 자연물이나 동물 또는 문자를 그려 세운 의장기儀仗旗와 도끼, 칼, 창 등 권력을 상징하는 의장물儀仗物이 배열되어 권위를 상징하며 행렬에 위엄과 화려함을 더했다.

8 헌종이 효현왕후를 맞이한 혼례식 과정을 기록한 효종효현왕후가례도감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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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풍습을 보여주는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
10 구름 무의의 인경왕후인현왕후인 원왕수존승도감의궤 표지.


엄숙하고도 특별한 왕실의 장례
왕이 승하하면 머리를 동쪽으로 눕히고 왕의 입과 코 사이에 고운 햇솜을 얹어 죽음을 확인한 후 곡을 하였다. 죽음이 확인되면 내시가 왕의 평상복을 가지고 궁궐 지붕에 올라가 “상위 복上位復”이라고 외치며 죽은 자의 혼을 불러오는 의식을 행했다. 이후 5일 간은 왕의 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장례 준비를 진행했다. 국왕이 승하가 선언되면 왕세자 이하 신료들은 흰 옷으로 갈아입고 3일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애도했다. 그다음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고 의복을 갈아입히는 습襲, 시신의 입에 쌀과 진주를 채우는 반함飯含이 진행되고, 3일째와 5일째는 옷과 이불로 시신을 감싸는 소렴小殮과 대렴大殮이 진행되었다. 5일이 지나도 왕의 혼이 돌아오지 않으면 입관했다. 시신을 가래나무로 만든 관인 재궁梓宮에 넣고 빈전殯殿에 모셨다. 승하 6일째는 왕세자가 성복 成服을 한 후 애도 속에서 즉위식이 이루어졌다. 예법에 따라 입관 후 약 5개월 동안 빈전에 시신을 안치했다가 국장을 치렀는데, 이 기간 동안 빈전의 제사와 호위는 빈전도감이 담당했다.

빈전에 모신 재궁을 장지인 산릉까지 모시는 의식은 왕이 임종한지 5개월이 되는 달에서 길일을 골라 치렀다. 국장 행렬은 재궁을 대여大輿에 옮겨 실은 후 대여 앞 호군이 흔드는 탁鐸(방울의 일종) 소리를 신호로 궁궐을 떠나 노제를 거쳐 장지로 향했다. 장지가 위치한 지역의 수령이 행렬을 인도하고, 그 뒤로 국장도감의 주요 책임자, 호위 군사, 각종 의장기와 의장물을 든 기수, 악대, 선왕을 위한 고명, 책, 향로, 신주, 제기류 등을 모신 가마, 국장도감과 중앙 관리들, 곡을 담당하는 궁인 등이 행렬을 이뤘다. 가장 후미에는 호위군사와 기수대가 배치되었다.

반차도의 회화 기법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반차도의 회화 기법은 일반적으로 17세기 중반까지는 모든 것을 직접 그린 육필화肉筆畵 반차도가 주를 이뤘으나, 17세기 후반기부터 판화와 육필화가 혼용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반복되는 같은 인물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눠 우선 윤곽선을 판화로 찍고 세부를 직접 그려넣었다. 후대로 갈수록 판화의 비중이 늘어났고 특정 가례 행사에만 등장하는 요소들만 직접 그리기도 했다. 1696년 <왕세자(경종) 가례도감의궤>의 부분을 살펴보면 옆모습으로서 있는 여인들을 우선 남자 모습의 윤곽선을 찍어 놓고 그 위에 치마를 그리고 노란 칠을 했으나 색채가 투명해 다리의 형태가 그대로 보이는 예도 찾아볼 수 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의 어람용 반차도는 모든 인물, 말, 지물持物들을 직접 그린 것으로 보이지만, 분상용 반차도는 몇 가지 인물 유형으로 나누어 윤곽선을 찍고 채색이나 기타 요소들을 조금씩 그린 것으로 보인다.

외규장각 의궤의 표지 직물에 숨은 비밀
의궤 표지를 싼 직물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복식에 사용된 직물 연구에 도움을 주는 귀중한 자료다. 당시 복식에 사용하던 직물로 표지를 감쌌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어람용은 초록색 비단 바탕에 제목은 흰색 비단에 쓰고 붉은색 비단으로 테두리를 두른다(바탕은 대부분 초록색이었지만, 소색素色과 붉은색도 각각 두 점씩, 하늘색도 석 점 있다). 분상용은 주로 붉은색 삼베를 쓰는데 표지에 그대로 제목을 적는다. 이번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2백97책 중 11책만이 원 표지 그대로이고, 나머지는 모두 표지가 개장된 상태다. 그러나 다행히 개장 후 따로 보관해오던 원 표지들도 함께 돌아왔다.

표지 직물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구름 무늬다. 구름의 머리와 꼬리 모양, 크기에 따라 시기적으로 구분되는데, 시대가 늦어질수록 머리가 작아지고 꼬리가 길어지는 특징을 보인다. 다음으로 많은 것은 연꽃 무늬인데, 동일한 연꽃이 상하로 반복된 것, 측면형과 보상화형寶相華形(반쪽의 팔메트-종려나무 잎을 좌우대칭시켜 심엽心葉형으로 나타낸 무늬)이 층마다 엇갈리게 배치된 것 두 종류다. 연꽃 주변은 만초 넝쿨이 원형으로 감싸고 있고, 사이에 둥글고 넙적한 연잎, 연밥 등이 달려 있다. 무늬가 없는 표지 직물도 보이는데, 주紬(명주)를 주로 사용했다. 무늬가 없는 대신 주의 밀도가 조밀하고 성근 정도, 섬유 한 올의 굵기 차이, 실의 꼬임 등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를 주었다.

<행복> 9월호 표지는 외규장각의궤 중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의 일부를 구성한 것이다. 장비인 정서오앙후와 사별한 영조가 삼년상을 마친 1759년에 정순왕후 김씨를 계비로 맞이하는 혼례식을 기록한 의궤다. 이 의궤에는 영조가 정순왕후를 데리고 궁으로 가는 50면에 달하는 친영반차도가 실려 있는데 3백 79필의 말과 1천2백99명의 인물이 들장한다.



자료 출처 특별전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도록(국립중앙박물관 발간, 2011)

구성 최혜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