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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궁금해요] 의궤에 담긴 뜻 우리 기록 문화의 꽃, 외규장각 의궤
요즘 ‘의궤’라는 단어가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이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면 의궤란 말은 생소한 용어였으며 더구나 프랑스에 있던 외규장각 의궤는 소수의 전문가 외에는 직접 본 사람이 없는 베일에 싸인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외규장각 의궤란 무엇일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우선 외규장각이 무엇인지, 의궤란 어떤 것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국왕이 본 외규장각 의궤
의궤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에 3천 책이 넘게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의궤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중앙 정부 기관이나 지방 사고에서 보관하던 소위 ‘분상용分上用’ 의궤라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번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 국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한 어람용 御覽用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조선왕실 문화의 보고, 외규장각
그렇다면 외규장각은 무엇일까? 조선의 22대 왕 정조正祖는 1776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뒤 창덕궁 규장각을 정식 국가기관으로 발족하였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의 왕실 도서관 겸 학술연구기관으로 출발하여 출판과 정책 연구의 기능까지 발휘한 특별한 기구였다. 이후 1782년에는 강화도 행궁行宮에 외규장각을 완공하여 왕실의 중요 자료를 옮겨서 보다 체계적이며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하였다. 규장각에 보관하던 임금이 보던 어람용 의궤가 강화도로 옮겨진 것도 바로 이때이다. 외규장각은 규장각의 분소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되어 이곳을 ‘규장외각奎章外閣’ 또는 ‘외규장각外奎章閣’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1 인조장렬왕후존숭도감의궤仁祖莊烈王后尊崇都監儀軌 1686(숙종 12년), 46.1×34.9cm, 어람용. 이 의궤는 원 표지를 유지하고 있어 어람본 표지의 재료와 장정 방법을 알 수 있다. 초록색 구름무늬 비단으로 표지를 싸고 놋쇠로 변철邊鐵을 대고 5개의 박을못(朴乙釘)으로 고정시키고, 박을못 밑에 국화무늬판[菊花瓣]을 대어 제본했다. 변철의 중앙에는 둥근 고리를 달았다.

왕실 의례 보고서, 의궤
이제 의궤가 무엇인지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의궤란 ‘의식儀式의 궤범軌範’이란 말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왕실과 국가에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준비부터 실행, 마무리까지의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그림이 실리기도 하였다. 의궤를 제작한 배경에는 의식이나 행사의 모범적인 전례典例를 만들어 후대 사람들이 예법禮法에 맞게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하는 의미가 있었다. 한편, 사업의 전말을 자세히 기록하여 이후에 동일한 의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의궤를 참고하여 시행착오 없이 원활하게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하는 뜻도 있었다.

의궤는 조선 건국 초기인 15세기부터 만들어졌으나 현재에는 임진 왜란 이후의 것들만 남아 있다. 17세기 이후 의궤는 꾸준히 제작되었고, 18세기에 들어오면 그 종류와 숫자가 더욱 늘어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의궤는 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한 어람용과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기 위한 분상용으로 구분되어 5~9부 내외로 제작되었다. 국왕이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 1부 외에 나머지 분상용은 의정부, 춘추관, 예조 등 관련 중앙기관과 봉화 태백산, 무주 적상산, 평창 오대산, 강화도 정족산 등의 사고에 보내졌다.

통상 어람용은 1부를 제작하는데,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는 대부분 어람용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어람용을 분상용과 비교해보면 필사, 재료, 장정 등에서 그 수준이 월등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종이는 어람본의 경우 고급 초주지草注紙(초기草記에 쓰던 종이)를, 분상용은 초주지보다 질이 낮은 저주지楮注紙를 사용하였다. 고급 종이에 해서체로 정성껏 글을 쓰고 천연 안료로 곱게 그림을 그린 후 고급 비단과 놋쇠물림으로 장정한 외규장각 의궤는 당대 최고의 도서 수준과 예술적 품격을 보여준다.

(오른쪽) 2 진종세자수책시책례도감의궤眞宗世子受冊時冊禮都監儀軌 1725(영조 즉위), 어람용. 같은 내용을 담았지만 이 어람용(왕의 열람을 위한 것)과 아래의 분상용(여러 곳에 나눠 보관하는 용도)을 비교해 보면 완성도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3 진종세자수책시책례도감의궤眞宗世子受冊時冊禮都監儀軌 1725(영조 즉위), 분상용.


이번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중에는 동일한 행사에 대해 어람용과 분상용으로 달리 제작된 것이 있어 의궤의 사용처에 따라 재료, 필사, 장정의 수준에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차도 장면을 비교하면 어람용과 분상용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어람용은 붉은 인찰선印札線을 긋고 붓으로 일일이 형태를 그려 다 양한 안료로 표현하였으나, 분상용은 도장을 찍어 반복되는 인물을 배치하고 큰 색상의 변화 없이 인물과 사물을 칠하여 어람용에 비해 그 완성도가 현격히 떨어진다.

의식의 진행과 의궤의 제작
왕실의 각종 의식 및 행사를 집행하기 위해 우선 임시 기구인 도감 都監을 설치하였다. 도감에는 일을 총괄하는 도청都廳이 있고, 도청 아래에는 일방一房, 이방二房, 삼방三房, 별공작別工作, 수리소修理所 등 업무를 분담하는 작은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도감은 여러 관청의 관리를 망라하여 조직하는데 임시로 설치하므로 겸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총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 1인은 정승급에서 임명하였으며, 부책임자급인 제조提調 서너 명은 판서급에서 맡았다.

의식이 완료되면 도감은 바로 해체되어 의궤청儀軌廳이라는 기구로 바뀌었다. 의궤청은 도감에서 주관한 행사 전반을 정리하여 의궤를 작성하는 기구로, 행사 전반을 총괄한 도청 담당자가 의궤청에 그대로 임명되는 것이 상례였다. 의궤청은 도감에서 행사 중에 작성한 등록謄錄, 행사 관련 문서들 및 반차도班次圖를 수집하여 의궤를 작성하였다.

의궤에 수록된 주요 내용으로는 첫째 의식을 집행하는 논의 과정, 둘째 의식을 준비한 관원, 도구道具를 만들었거나 공사에 참여한 장인匠人의 명단, 셋째 의식의 날짜별 진행 과정, 넷째 의식에 쓰인 비용, 즉 인건비와 물건비, 다섯째 의식의 주요 장면과 의식에 쓰인 주요 도구의 그림, 여섯째 의궤 편찬 과정 및 포상 내역 등이 있다.

의궤 속의 그림, 도설과 반차도
의궤에는 각종 도설과 반차도가 그려져 있어서 문자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의식과 행사의 여러 상황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도설은 행사에 쓰인 교명, 죽책, 옥책, 인장 등의 각종 의식구儀式具, 제기, 악기, 가구家具, 석물石物 등의 기물, 행사 시 착용한 복식 등이 간략하게 그려진 것이다. 때로는 이러한 기물 간의 배치 상태를 알 수 있는 도면이 그려진 경우도 있다.

반차도는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의장물의 수, 위치 등을 정해 놓은 그림을 말한다. 반차도는 행사 거행 전에 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되었으며, 실제 행사 전에 반차도에 따라 몇 차례 예행 연습을하여 실제 행사 때 최대한 시행착오를 줄이도록 하였다.

4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懿昭世孫禮葬都監儀軌. 1752(영조 28년), 유일본. 세 살에 세상을 뜬 사도세자의 첫째 아들 의소세손의 장례 의식을 기록한 의궤다. 부장용 복식의 도설인데 재료와 치수가 적혀 있다.

나라의 경사를 기록한 의궤
조선시대에는 거행했던 국가 의식과 행사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의궤를 제작하였다. 의궤의 종류는 왕의 일생과 관련된 것, 각종 제례와 의식과 관련된 것, 편찬 사업이나 건축과 관련된 것 등이 있다. 그중 그 수량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의 경사와 장례를 기록한 의궤를 살펴본다.

가례嘉禮는 원래 왕실의 큰 경사를 뜻하는 말로서, 왕실의 혼인이나 책봉冊封, 존호尊號, 각종 진연進宴, 진찬進饌 등의 의식 예법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가례도감의궤>에 나타난 가례는 곧 왕실의 혼인 의식, 그중에서도 왕이나 왕세자의 혼인을 뜻한다.

5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1759(영조 35년). 정비인 정성왕후와 사별한 영조가 3년 상을 마친 1759년에 15세 된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를 계비로 맞이하는 혼례식을 기록한 의궤다. 영조가 정순왕후를 데리고 궁으로 가는 50면에 달하는 <친영반차도>가 실려 있는데 3백79필의 말과 1천 2백99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책봉冊封은 왕세자, 왕세손, 왕세제 및 왕비와 세자빈을 임명하는 의식으로 책례冊禮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국왕은 대부분 앞의 왕이 사망하여 장례가 진행되는 도중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국왕의 즉위식을 기록한 의궤는 거의 없다. 왕의 책봉과 달리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 왕세손, 왕세손비를 정하는 일은 경사스러운 분위기로 치르는 국가의 중대사였다. 이러한 의례를 행할 때 왕권을 상징하는 예물인 어보御寶, 어책御冊, 교명敎命 등을 함께 올려 왕실의 권위와 존엄을 드러냈다.

6 정조왕세손책례도감의궤正祖王世孫冊禮都監儀軌. 1759(영조 35년).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후의 정조)을 왕세손으로 책봉한 과정을 담은 의궤로 흑칠궤黑柒 , 죽책竹冊의 그림과 재료 등이 기록되었다.
7 숙종국장도감의궤 肅宗國葬都監儀軌.1720(경종 즉위). 빈전에 모신 숙종의 관을 큰 가마(대여)에 실어 장지까지 모시는 발인 행렬을 그린 것이다. 관을 빈전에서 모시다가 5개월이 되는 달에 길일을 골라 치렀다.


왕실의 장례를 기록한 의궤
조선시대 왕실 의례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죽음과 관련된 의식이었다. 특히 왕과 왕비의 장례는 나라 전체의 애도 속에서 엄숙하게 치러졌다. 왕실의 장례는 그 대상에 따라 명칭이 달랐다. 왕과 왕비의 장례는 국장, 세자와 세자빈의 장례는 예장禮葬이라고 한다. 왕이 사망하면 당일로 장례 절차를 담당할 임시 관서인 국장도감, 빈전도감, 산릉도감 등 삼도감三都監이 설치되었다. 대개 좌의정이 이를 총괄할 총호사로 임명되고 이하 담당 관리가 차출되었다. 장례의 총괄과 국장 행렬은 국장도감이, 시신을 수습하여 빈소를 차리고 상복을 만드는 일은 빈전도감이, 장지에서 묘소를 만드는 일은 산릉도감이 담당하였다. 장례를 치른 후 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치르는 혼전을 담당하는 혼전도감이 별도로 설치되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빈전도감이 함께 업무를 담당하여 빈전혼전도감으로 불렸다.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
1866년 10월, 프랑스는 천주교 탄압 사건을 구실로 조선을 침략하여,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키고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같은 해 11월 11일, 프랑스군은 강화도의 외규장각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퇴각하였다. 이때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의궤를 약탈해간 것이다. 과거 속에 묻혔던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는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일하던 재불학자 박병선 박사에 의해 1975년에 알려졌으며, 이후 정부와 국내 학술 기관 및 민간 단체가 지속적으로 의궤 반환을 추진했다.

오랜 기간의 노력 끝에 프랑스국립도서관이 보관해온 외규장각 의궤는 2011년 4월부터 국내에 반입되어 1993년에 돌아온 1책을 포함하여 대상 의궤 2백97책이 모두 돌아오게 되었다. 글로는 형용할 수 없는 조선 사람들의 철저한 기록 정신과 예술적 품격을 이번 특별전에 전시된 외규장각 의궤를 직접 보면서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수미(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자료 제공 국립 중앙 박물관

구성 최혜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