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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치유하는 삶] 그림 속에서 만난 기쁨 희
모든 생명이 탄생할 때의 기쁨, 누군가를 만나 소통할 때의 기쁨, 무언가를 발견할 때의 기쁨…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지만 그 자체로 ‘영원한 순간Eternal Momentum’이 되는 기쁨을 화가들은 어떻게 표현했을까? 그리고 그 그림은 보는 이에게도 기쁨이었을까?


‘The Annunciation’, C.1450.

기뻐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이미 하나의 재능인 동시에 지혜이다. 예술가들은 누구보다도 삶을 기뻐하고 찬미한다. 그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이 순간을 영원히 기록했다. 예술가들은 보통 사람이 놓치기 마련인 아주 사소한 순간, 사물ㆍ관계에서 아주 큰 기쁨을 느낀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삶을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여 기뻐하기에 더 처절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시대적 고통이나 질곡, 개인적 불행이나 고난이 심할수록 그림 속의 빛은 더욱 찬란해졌다는 것이다.

불행 속에도 기쁨이 있고, 절망 속에도 기쁨이 있다. 우울한 가운데에도 기쁨이 있고, 고독한 가운데에도 기쁨이 있다. 노벨문학상 작가이며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생존자인 임레 케르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행복은 어떤 강제수용소에도 존재한다. 어느 순간 태양의 따사로움을 느낄 때, 혹은 매우 신비로운 여명이 수용소의 한 장소에서 시작될 때 그렇다.” 이렇듯 인간의 마음속에는 어떤 경우라도 생명의 탄생을 기뻐하고 찬미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때 현재의 불행을 압도하는 기쁨의 빛이 발현된다. 이렇게 기쁨은 순간이지만 영원한 느낌을 준다. 이렇듯 영원한 순간Eternal Momentum을 그린 그림 속으로 산책을 떠나 보자.

기쁘고도 두려운 만남, 탄생
서양미술사 중 가장 기쁜 그림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수태고지’라고 말할 것이다. ‘수태고지受胎告知, 그리스도교 미술의 주제’ 그림을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성화 모티프 중 하나라고만 생각해왔다. 그런데 들여다볼수록 그것은 그냥 종교화가 아니다. 모든 사랑과 예술에 관한 가장 강력한 수사rhetoric이다. 그 사실을 발견했을 때 벅찬 감동을 받았고, 어떡해서든 나 역시 그런 작업에 동참하리라 다짐했다.

그렇다면 수태고지annunciation가 정확히 무엇인가? 이 말은 신의 전령인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성령으로 신의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고 전한 일을 뜻한다. 처녀, 그것도 정혼한 사람이 있는 이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다. 당시 유대 풍습에서 처녀가 임신한 것은 돌로 쳐 죽일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화가들은 수태고지를 어떻게 그렸을까? 천사가 날개를 펄럭이며 홀연히 마리아 거처에 나타난다. 보통 손에 백합이나 홀 (지휘봉처럼 생긴 지팡이)을 들고 나온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너무도 놀라고 당황스런 표정으로 손을 가슴에 대거나, 거부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거나, 의자에서 떨어질 것 같은 모습이다.

마리아는 <구약성서>의 아가서(솔로몬이 하느님께 보내는 사랑의 시)를 음송하던 중이다. 꽤 지적일 뿐만 아니라 시적인 여자. 신은 그런 여자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고통을 주었으니 신은 사디스트가 아닌가? 그때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천사는 마리아에게 대답한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다시 마리아는 말한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그 일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수태고지는 단순히 성서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이 지상의 모든 영적인 사건, 눈에 보이지 않는 섭리에 대한 믿음을 상징한다. 성서의 핵심이 무엇인가? 말씀이 육화된다는 것이다. 즉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로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예술에 대한 최상의 메타포다. 특히 일정한 형상을 만들어내는 미술이야말로, 영혼과 정신이라는 비물질이 물질화된 것 아닌가 말이다. 수태고지는 신의 창조 작업중 가장 늦게 이루어진 것이지만(사실은 아직 창조가 끝나지 않으셨단다), 가장 인간적이고 창의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이루어진 것이다. 신은 수태고지를 통해 인간에게 탄생의 기쁨과 두려움 그리고 그 창조의 메커니즘까지 알려주었다. 모든 탄생과 창조의 순간을 명상하도록 하는 일, 그것이 수태고지(혹은 수태고지화)가 주는 두렵고 성스러운 기쁨이 아닐까.

기쁘지만 어려운 만남, 관계
만남은 기쁨이고, 기쁜 만남은 에로스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말이 통하는 사람과의 만남,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과의 만남, 내가 특별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만남 등 인생에는 숱한 만남이 있다. 이런 만남은 나라는 존재를 생성하는 원동력이다. 이런 관계는 내 안의 에로스를 만나게 해준다. 나를 활기 있게 만들어주는 모든 만남이 에로스인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태초에 세 종류의 인간이 존재했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남자와 여자 양성으로 이루어진 ‘안드로구노스 Anthrogunos’라는 인간이 그들이다. 이러한 최초의 인간은 구형으로 팔과 다리가 네 개씩이며, 둥근 목 위에 똑같은 얼굴 두 개가 붙어 있었다. 머리가 두 개인데다 여덟 개의 손발을 가진 최초의 인간은 머리가 비상하고 힘이 셌다. 사방팔방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고, 생각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인간은 급기야 신에게 도전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위협감을 느낀 제우스는 번개로 둘을 쫙 갈라버렸다. 그때부터 인간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반쪽을 찾으면 서로 껴안고 달라붙어 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식음을 전폐하며 사랑을 했다.

정신분석학에서 에로스는 ‘삶을 향한 충동’으로 정의된다. 인생은 자신의 반쪽을 찾기 위한 충동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성애를 나눌 수 있는 생물학적 남자를 만나든, 말이 통하는 동성 친구를 만나든, 인생의 멘토를 만나든, 모두 한결같이 잃어버린 반쪽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내가 좋아하는 모든 대상은 에로스의 대상이다.

(오른쪽) ‘Vase with Fourteen Sunflowers’.

반 고흐는 너무 절실하게 이런 ‘관계’를 갈망했다. 하지만 그에겐 예술을 제외한 모든 인간관계가 너무 어려웠다. 목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던 그의 순수한 열망은 타인에게는 그저 무겁고 부담스러운 것일 뿐이었다. 어느 날, 반 고흐는 자신이 좋아하는 훌륭한 화가들과 공동 작업을 꿈꾸며 아를로 떠났다. 마치 12사도를 모르는 사람처럼 아를의 집에 열두 명의 화가들이 작업할 수 있는 의자를 놓아두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사람을 그리워했고, 결국 가장 사랑했던 남자인 고갱을 불러들였다. 반 고흐는 고갱이 온다는 사실에 무척 기뻐했다. 그는 고갱이 쓸 방을 온통 노란색으로 칠하고, 가구를 배치하고, 꽃을 꽂고, 해바라기를 연작으로 그리는 등 마치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처럼 들뜨고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고흐는 고갱이 곧 도착하리라는 희망으로 매우 행복해하는 한편, 그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낙담하기도 했다. 그는 혹시 고갱이 브루타뉴만큼 아를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며, 그래서 화를 내거나 조롱하며 떠나버릴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했다. 반 고흐의 이런 긴장은 극에 달해 몸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나 고흐에게 평생 이보다 더 기쁜 순간은 없었다. 그만큼 누굴 사랑하며 기다린 적이 없었다. 육체보다는 정신, 게다가 영혼에 더욱 충실한 사랑, 그것을 필리아 phila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정에 가까운 사랑이었으며, 이성 간의 열정 이상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비록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고흐가 고갱을 기다리며 기뻐했던 순간은 많은 사람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주 큰 기쁨에는 꼭 그만큼의 슬픔이 녹아 있다는 것을.

기쁘고 소중한 만남, 발견
최고의 기쁨은 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연애도, 친구도, 책도, 여행도 나를 발견하기 위한 일이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충동과 혼란, 집중과 몰입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시간을 내야 하고, 때로는 돈도 많이 써야 한다. 특히 책을 읽는 일은 어떤가? 진정한 책 읽기는 곤혹스럽고 잔인한 면이 있다. 그것을 통과해야만 진정한 기쁨이 온다. 그 기쁨이란 근원적 존재를 만나는 체험이다. 미학적으로 말하자면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상기(想起: anammesis)”다. 플라톤에 따르면 상기란, 원래 무엇을 안다는 것은 단지 잊었던 것을 다시 기억해내는 것일 뿐이다. 불멸하는 인간의 영혼은 출생 이전에는 참되고 올바른 지식(이데아)을 지니고 있었는데, 태어날 때 망각의 여신 ‘레테 (lethe)’가 ‘망각의 강물’을 마심으로써 이데아를 잊은 것이다. 따라서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것 역시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을 다시 기억하는 행위, 즉 나를 재발견하는 행위인 것이다.

책 읽는 여자는 책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자극하여, 현실을 거부하고 머나먼 동경의 세계로 떠나는 일탈을 감행할 수도 있다. 따라서 책 읽는 여자들은 위험한 동시에 매혹적인 여자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남자들은 책이 주는 환상의 세계에 유혹 당해 멋진 청년과 야반도주를 꿈꾸었던 플로베르의 소설 속 주인공 보바리 부인을 떠올렸을 것이다.

책 읽는 여자들은 살롱 문화가 성행하던 로코코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에 빈번히 그려졌다. 아마도 책 읽는 여자들이 많이 그려졌던 시대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사회였다. 처음에 그녀들은 자아실현의 수단이기보다는 지루하고 비천한 일상을 견디는 방법으로 책 읽기를 선택했다. 그런데 책을 통해 가정이라는 좁은 세계를 상상력과 지식으로 이루어진 무한한 세계와 맞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된 순간, 여자들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아를 발견하면서 가정에 대한 순종을 벗어던지고 독립적 자존심을 얻기에 이른 것이다. 그녀들은 책을 통해 자아실현이라는 거대한 각성의 세계로 진입하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책 읽는 여자들은 위험한 여자로 치부되어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그녀들이 꾸는 기쁘지만 두려운 혁명의 꿈에 기꺼이 동참하고 싶은 마음을 이런 그림을 통해 전했던 것은 아닐까.

(왼쪽) ‘Portrait of a Lady Reading ’.
(오른쪽) ‘Mrs. Duffee on Striped Sofa Reading’.

그림 읽는 기쁨
책을 읽는 일만큼이나 기쁜 일은 그림을 보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그림에 관한 글을 읽는 것은 일거양득이겠다. 사실, 그림을 그리는 일이나 그림을 감상하는 일은 모두 자기의 잃 어버린 감각을 되찾는 일이다. 어떤 식으로든 자기를 구원하기 위한 일인 것이다. 바로 이런 근원적인 느낌을 상기하는 일이야말로 기쁨에 가장 걸맞은 것들이다. 기쁨을 그린 화가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들의 기쁨 역시 고통과 고난의 경험을 남김 없이 통과한 후에 축복처럼 쏟아졌을 것이다. 나는 지금 기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기쁨을 유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아마 가장 큰 기쁨일 것이다. 지금 기쁨의 영원한 순간을 그린 화가들을 만나러 외출할 것이다. 이것이 내게 기쁨을 창조하는 일이다. 그런 존재라면 누구라도 예술가다.

글을 쓴 미술평론가 유경희 씨는 시각예술과 정신분석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요즘은 대학원 최고위과정에서 CEO를 위한 하이브리드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술가의 탄생><테마가 있는 미술여행> 등이 있다. <행복>은 이번호를 시작으로 유경희 씨가 ‘읽어주는’ 그림 이야기를 연재한다. ‘희로애락애오욕 喜怒哀樂愛惡欲’이 그 주제다. 인간이 느끼는 본연의 감정이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되고 삶을 치유하는지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된다. 그 첫 번째 주제는 ‘기쁨’이다.



유경희(미술평론가)

담당 정세영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