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말숙 씨 그리고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 “음악가? 소설가? 아니, 우린 그냥 암놈과 수놈이야.”
황병기 선생이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던 1974년, 건축가 김원 씨가 “흰 집에도 한 번 살아보세요”라며 지어준 3층 양옥집. 2년마다 페인트를 칠해야 해서 한말숙 씨는 이 집을 ‘2년에 5백만 원씩 잡아 먹는 집’이라고 부른다. 웨스턴 스타일로 꾸며진 1층은 한말숙 씨의 ‘주거 영역’이고, 클래식한 스타일로 꾸며진 2층은 황병기 선생의 ‘작업실이자 휴식처’다. 방송에도 소개된 바 있지만 이 부부가 50년 가까이 불화 없이 잘 살 수 있었던 건, 바로 복층 구조의 집 덕분이다. 목장갑을 끼고 현관문을 열 정도로 결벽증이 심한 한말숙 씨는 손을 잘 안 씻고 담배까지 피우는 황 선생과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스타일로 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밤이 되면 두 사람은 견우와 직녀처럼 안방에서 만난다. 한 평생 한 침대에서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는 부부가 세상에 어디 흔한가. 부부 금슬이 얼마나 좋으면 50년을 한 침대에서 잘 수 있는지 묻자, 그는 쿨하게 답한다. “우린 집에선 그냥 암놈이고 수놈이야. 마누라고 남편이지. 저 사람도 여기 에선 음악가가 아니고 나도 작가가 아니에요. 부부가 같은 침대에서 자는 건 당연한 일이고.” 평소 잠자리에 일찍 드는 남편 때문에 늘 자정이면 침대에 누워야 했던 그는 신혼 시절, 글감이 떠오르면 살금살금 침대를 빠져나와 글을 쓰곤 했다. 그러나 황병기 선생은 잠잘 시간엔 자는 거라며 아내를 침대 밖으로 내보내주지 않았다. 그렇게 ‘길들여져’ 서서히 소설 쓰기에서 멀어졌지만 그런 일이 크게 후회되진 않는다.
사실, 결혼 초기만 해도 한말숙 씨는 유명한 소설가였다. 하지만 어느 시기를 거치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황 선생이 워낙 마스콤을 많이 타잖아. 나는 일체 안 타거든. 저 사람, 대단하지. 다 죽어가는 한국 음악을 세계에 알렸으니까. 따지고 보면 대단한 사람이야. 나는 뭐, 베스트셀라 작가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내 존재가 없는게 아니거든. 문학은 말이 없잖아. 난 나대로의 문학이 있어. 근데 자꾸 대가의 아내 어쩌구 하니까 그 소리가 듣기 싫어. 나 그 얘기 하려고 인터뷰한 거야. 솔직히 내가 더 유명했잖아? 난 1950년대 문학을 휘둘렀거든. 하하하!” 억울한 것도, 맺힌 응어리도 없는 솔직하고 쿨한 성격. 그에게선 아내로서 고단함이나 인고의 세월 같은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왼쪽) 가야금 연주가이자 작곡가인 황병기 씨. 왼쪽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빨리 찍어.” 오늘만큼은 주인공이 아니라 ‘배경’임을 눈치챈 황병기 선생이 사진가에게 던진 한마디. 선생은 촬영 내내 ‘능동적 모델’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사실 그는 누가 봐도 축복받은 인생을 산 사람이다. “유교적 가풍 속에서 서양 문화의 향기를 맡고 자랐다”는 그는 스스로도 “태어나서 노력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평탄한 삶을 살았다. 책이 좋아 책만 읽다 서울대에 입학했고, 넉넉한 집안에서 인품 좋게 자란 남자와 결혼해 가정부도 여럿 부리면서 생활했다. 돈 걱정 없이 만년을 보낼 수 있는 복까지 타고난 그에게 “스스로 좋은 아내였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럼 좋은 아내지. 다른 여자처럼 고스톱을 치기를 해, 바람이 나서 나돌아 다니길 해. 만날 안방이나 지키고 있는데 좋은 아내지. 안 그러오? 황 선생이 불란서다 이태리다 초청받으면 거기 따라다니면서 가방 들어주고. 이 이상 어떻게 더 잘해?”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럼 결혼해서 손해 본 것은 뭐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명쾌하게 답한다. “언젠가 누가 그러대. 당신은 참 좋겠다고. 저런 훌륭한 마에스트로의 가방을 들어줄 수 있어서. 내가 기도 안차서 그랬어. ‘아임 노벨리스트, 페이머스 노벨리스트!’ 하하하. 웃기잖소?”
‘이보다 더 쿨할 수 없는 아내’, 풍요롭고 순탄하게 평생을 산 대신 소설가라는 이름에는 크게 욕심내지 않았던 여자. 여든을 훌쩍 넘겼지만 여전히 소녀 같고 사랑스러운 한말숙 씨의 소설가 인생은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가을 즈음엔 그동안 써둔 소설을 모아 오랜만에 작품집을 낼 작정이다. 그런 아내를 황병기 선생이 흐뭇한 눈으로 바라본다.
천생여자 허성임 씨 그리고 서예가 박원규 씨 “아내는 전생에 내 어머니였을지도…”
“집사람이요? 이마에 ‘순둥이’라고 써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속은 크렘린(비밀이 많고 신비로운 사람)이 따로 없죠. 세상 사람들은 그런 줄 몰라요. 나만 알죠.” 압구정동 작업실에서 아내를 기다리던 서예가 박원규 씨가 입을 열었다.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잠깐 그의 아내와 전화 통화를 했을 때, 나는 그가 평생을 주부로 산 천생 여자라고 생각했다. 39년을 함께 산 남편의 ‘증언’ 또한 내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원규 씨가 아내의 몫까지 넉 잔의 커피를 만드는 사이 문 밖에서 ‘똑똑똑’ 얌전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어이구, 우리 사모님 오셨구먼. 문 열어 드려야지.” 빨간 실내화를 신발장에서 꺼내 아내의 발 앞에 놓아주는 남편을 아내가 자혜로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서예가 박원규 씨는 <행복> 2011년 2월호에서 이미 소개된 바 있는 인물이다. 그는 지난 40여 년간 깊고도 넓은 서예의 세계에 빠져 학문을 연구하고 글 쓰고 예술에 헌신하며 살았다. 그리고 황혼의 길목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서예가로 우뚝 섰다. 인생을 서예에 통째로 바친 결과다. 박원규 씨가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룰 수 있었던 건 8할이 아내의 덕이다. 눈을 감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허성임 씨의 얼굴을 보라. 부처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부처님 형상을 닮은 그가 어떤 아내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날 인터뷰를 통해 난생처음 남편에게 불만을 ‘고백’할 정도로 허성임 씨는 속내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말을 함부로 하면 상대방 기분이 상할 수도 있고,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어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자기주장이 강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사람, 더없이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아내, 타고나기를 그런 여자. 그의 희생은 남편과 자식들을 성하게 했고 가족의 화목을 지켜주었다. 맏며느리가 아니었음에도 반평생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고, 관절염으로 뼈마디가 짓무르기 전까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의 병시중도 도 맡았다. 싫은데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생각하고 그렇게 했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힘든 순간에도 남편에게 악다구니를 쓰거나 불평불만을 늘어놓은 적 없다. 주변에선 너무 참고 사는 것도 병이 된다고 부추겼지만, 괜찮았다. ‘조금만 상대를 배려하면 되는데, 그게 뭐 그리 어려운가’ 하는 생각으로 다시 힘을 냈을 뿐이다.
(왼쪽) 서예가 박원규 씨. 왼쪽 “난생처음 하는 인터뷰예요”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던 허성임 씨는 남편의 손을 잡고 카메라 앞에 서자 부처님처럼 편안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천생 부부다.
“저 사람은 잔잔하게 흐르는 물과 같아요.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고 모든 사람을 품어주죠. 세상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싶어요.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제가 무엇에 반한 줄 아세요? 나를 참 편안하게 해주겠구나 싶었어요. 남자들이 반려자를 찾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목이죠.” 허성임 씨는 ‘다 아는 얘기’라는 듯 물끄러미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여자로서 닮고 싶은 아내, 닮고 싶은 엄마의 모습이다. 그래도 사람인데 한 가지 불만쯤은 있지 않을까 싶어 마지막으로 허성임 씨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어젯밤에 선생님이 본인한테 불만이 없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딱 한 가지 서운한 게 있었는데, 어제 처음 그 말을 했어요. 선생님이 과일을 참 좋아하세요. 집안이 한참 힘들었을 때 그래도 과일을 떨어뜨리면 안 되니까 조금씩 사서 선생님만 깎아드렸거든요. 그런데 저한테 한 번 먹어보란 소리가 없는 거예요. 나는 그게 참 서운하더라고요. 여자는 사소한 말 한마디에 감동하잖아요. 근데 뭐 괜찮아요. 먹는 것에 연연하는 분이 아니라 그랬을 거예요.” 한평생 자신의 존재를 누르고 인내와 헌신으로 가족을 보살핀 아내의 입에서 끝끝내 한 가지 ‘불만’이 터져나왔다. 그 불만은 아내가 아닌 ‘여자’로서의 불만이다. 결혼한 지 40년, 어느새 환갑을 훌쩍 넘긴 이 부부는 아직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시인 김초혜 씨 그리고 소설가 조정래 씨 “내 아내 김초혜는 날로 새롭게 피어나는 꽃이지요”
아귀가 아주 잘 맞는 톱니바퀴는 닳아 없어지지 않는 한 지구 끝까지 나란히 굴러갈 수 있다. 어떤 소음도 내지 않고 서로의 도리를 지켜가면서 열심히, 부지런히.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그런 상대를 만난다면 그보다 더한 축복은 없을 것이다. 바로 그 은혜를 입은 한국 문단의 대표 잉꼬 부부 소설가 조정래 씨와 시인 김초혜 씨. 1967년 동국대학교 국문과에서 캠퍼스 커플로 만나 스물다섯 나이에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 당시 조정래 씨는 군 입대를 앞둔 머리 검은 사내였고, 김초혜 씨는 문단의 촉망받는 신예였다. 가난한 문학도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겠다고 하자 양가 어른들은 도대체 뭘 먹고 살려고 그러냐며 걱정했다. 그러나 김초혜 씨는 부모의 걱정을 뒤로하고 그를 선택했다. ‘현명한 시인’의 바람대로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가 된 조정래 씨는 아내의 굳은 믿음에 화답하듯 평생 그만을 바라보고 살았다. “나는 평생 당신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당신은 아닌 것 같아.” 은근슬쩍 옆구리를 찔러보지만 김초혜 씨는 말 없이 미소만 짓는다.
두 사람이 사는 경기도 분당의 경관 좋은 빌라는 글 쓰는 부부의 집답다. 가구며 그림이 질서정연하게 제자리에 놓여 있고, 거실 창밖에는 수풀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우거져 있다. 하얀 모시 적삼에 부채를 들고 창문가를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조정래 씨와 그를 ‘배경’으로 한 아내 김초혜 씨가 포즈를 취한다. 공기도 숨을 멈춘 듯 조용한 실내 분위기는 단정한 차림의 김초혜 씨와 잘 어울렸다.
(왼쪽) 소설가 조정래 씨. 왼쪽 “사진은 5분 만에 후딱 찍는 것”이라고 ‘독촉’하는 조정래 씨와 머리와 손 모양이 어떻게 나오는지 완벽하게 점검하는 김초혜 씨. 덕분에 사진가의 등줄기엔 식은 땀이 주르륵.
그러고 보니 조정래 씨는 옆모습만으로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아내 김초혜 씨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지만 젊은 세대에겐 다소 낯선 인물이다. 하지만 세상의 명성을 먼저 얻은 것은 김초혜 씨다. 1985년 시집 <사랑굿>으로 1백만 부 작가로 우뚝 섰던 김초혜 씨는 이듬해, 조정래 씨의 <태백산맥>이 출간되면서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그 후 조정래 씨는 <아리랑><한강> 등을 잇따라 출간하면서 대작가의 명성을 이어갔고, 김초혜 씨는 한동안 잠잠했다. 글 쓰는 일만으로는 생활을 영위할 수 없어 교사 생활을 하던 시기였다(조정래 씨는 <태백산맥> 이후 전업 작가의 삶을 살았다).
“남편이 아주 유명한 작가여서 오히려 시인 김초혜의 유명세가 꺾인 것 아닐까요?”라는 질문에 그는 조용히 말했다. “부부는 경쟁이나 질투의 대상이 아니라 지향하는 바가 같은 동반자이다 보니 그런 고민은 필요 없지요. 또 시와 소설은 장르 특성상 완전히 다르므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소설은 독자의 폭이 넓고, 시는 상대적으로 좁다는 것 그리고 내 시집이 1백만 부 이상 팔렸던 시기가 1980년대 중반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사람들이 저를 잊어버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학적 명 성과는 상관없이 사랑은 인간 본질의 문제이므로 나는 유명세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우문현답이었지만 같은 여자로서 그가 가족을 위해 감내했을 인고의 세월을 짐작할 수 있다. “시를 쓰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가족을 불편하게 한 일이 없다. 그래서 좋은 시를 못 쓴 것 같다”는 김초혜 씨의 고백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아내에게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수줍은 연애편지를 쓰는 것뿐이다. “아내는 내게 날로 새롭게 피어나 는 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닭살 부부’라고 부른다. 나는 그걸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김초혜는 살아갈수록 나에게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갈수록 더 넓고 깊어질 수밖에 없다. 김초혜는 내 문학 인생에서 대화자이고 상담자이고 최초의 독자이고 교정자이고 감독자이고 감수자이고 조정자이고, 그런 모든 역할을 충실하게 해준 둘도 없는 길벗이고 삶의 반려다. 그러므로 다시 태어나도 나는 김초혜와 결혼하고 싶다. 진심이다.”
화가 류민자 씨 그리고 고故 하인두 화백 “죽어서도 당신 곁에 머물겠어요”
암세포가 온몸에 퍼지는 극한의 통증 속에서도 초인적 투혼으로 작품에 몰두한 서양화가 하인두 씨. 병상에서 탄생한 그의 작품은 원초적 생명의 강렬함을 보여준다. 죽음 앞에서도 예술의 끈을 놓지 않은 집념의 사나이 곁에는 항상 투병 생활의 고단함을 함께한 아내가 있었다. 서양화가 하인두의 아내 류민자 씨.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스물여섯 나이에 하인두 씨와 혼인한 그는 결혼 직후 7년간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특별한 직장 없이 전업 작가로 사는 남편을 대신해 교사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종일 학교 수업과 업무에 시달리다 퇴근하면(당시 그는 홍제동 산비탈의 무허가 판잣집에 살았다) 칠순이 넘은 시어머니와 백일이 갓 지난 아이 그리고 극도로 예민해진 남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 전, 하인두 씨는 월남한 친구를 재워주고 ‘불고지죄’라는 명목으로 옥살이를 한 적이 있다. 그 여파로 1960년부터 16년간 취직도 못하고 해외여행도 금지된 채 살아야 했다. 그런 남편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것은 바로 아내 류민자 씨다. 하인두 씨가 국가보안법에서 해방되던 1975년 봄, 류민자 씨는 10년간 몸담았던 직장을 그만뒀다. 퇴직금으로 왕복 항공권을 사서 남편을 3개월간 유럽, 일본 등을 여행하게 했다.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남편을 세상 밖으로 이끈 건 그의 몫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남편은 거짓말처럼 증세가 호전되었고, 다시 붓을 들 수 있었다.
(왼쪽) 서양화가 하인두 씨. 왼쪽 류민자 씨가 들꽃을 꺾어 뒷동산에 있는 남편의 무덤가로 가고 있다. 백 번 아니 천 번은 오갔을 이 길은 언제 걸어도 설레고 아프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대한민국 미술계에는 이상한 관행이 있다. 부부가 함께 활동하면 남편이 성공하는 데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아내의 창작 활동에 제약을 두는 것이다. 하인두 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류민자 씨가 개인전을 열거나 대 학원에 진학하는 일을 모두 반대했다. 하지만 예술을 향한 불굴의 의지로 그는 남편 몰래 이 모든 일을 해냈다. 그러는 사이, 그 또한 남편의 명성에 버금가는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고, 잠시 인생의 화려한 시절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렇게 인생의 고비가 모두 지나갔다고 생각할 즈음, 류민자 씨에겐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남편이 수술해도 두 달밖에 살 수 없다는 직장암 선고를 받은 것이다. 매사에 기분파이고 의지가 약한 남편에게 그는 이 사실을 도저히 알릴 수가 없었다. 남편이 알게 되면 여지 없이 무너질 게 뻔했다. 그는 병명을 속이기로 했다. 병원 식구들은 물론 병문안을 찾아오는 지인들에게도 남편이 ‘직장암’이 아닌 ‘직장궤양’을 앓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당사자인 하인두 씨조차 1년 반 동안 자신이 직장궤양을 앓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아내의 끈질긴 노력으로 1988년,하인두 씨는 투병 중에도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아내를 남겨두고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에는 아내를 향한 투정, 불만, 연민, 애정, 사랑이 뒤범벅되어 ‘울고’ 있었다.
“결혼 전에는 내가 아내보다 열두 살 위였고, 결혼 후에는 거꾸로 아내가 열두 살 위로 나를 눌렀다. 나는 아내에게 나이 차보다 더한 기죽임을 당하고 살았다. 어떤 때는 서자처럼 아내의 눈치만 슬슬 봤다. 의식주는 물론이요, 행동하는 매너까지 나는 아내의 지시를 받았다. 결혼 초기에 아내는 목욕 안 가는 나를 집에서 씻겨주었고, 양치질까지 해주었다. 늘 철부지였고, 세상 돌아가는 일도 몰랐던 나는 모든 일을 아내에게 일임하고 살았다. 나는 그렇게 아내의 것이었다.” 살아생전 하인두 씨는 아내를 열렬히 미워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에게 아내는 우주였고, 전부였다. 의지가 박약하고 철부지 같았다던 그. 그의 모든 행동은 이제와 돌이켜 보면 죽도록 아내를 사랑했기에 빚어진 것들이다.
- [대가의 아내를 만나다] 아내, 그 깊고도 뜨거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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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풍미하며 대가大家의 반열에 오른 네 남자가 자신을 지탱해준 버팀목, 그 깊은 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의 곁에서 아내가 웃고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