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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를 기리며] 자연앞에 겸손하던 건축가, 이타미 준
이타미 준이 2011년 6월 26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일 교포 건축가로 불렸지만, 정작 그는 어떤 한국 사람보다도 한국적 미를 사랑한 사람입니다. 건축가로 치열하게 살면서도 겸손한 배움의 자세를 잃지 않은 그. 옆에서 가장 가깝게 지낸 그의 분신 같은 딸 유이화 씨와 가장 아끼던 제자 진교남 씨가 이타미 준 선생님과 함께 보낸 시간을 추억합니다.


1 딸 유이화 씨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며,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던 홋카이도에 있는 석채의 교회.
2 유이화 씨는 이타미 준 선생님의 장녀로 이화여자대학교 실내디자인과를 졸업 한 뒤, 아버지의 반대에도 아버지와 같 은 길을 선택 해 건축가로 활약중. 현재 ITM 건축사사무소 소장이다.


딸 유이화 씨가 기억하는 아버지 이타미 준
“술과 이야기, 사람 좋아하던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인생 자체가 투쟁이었다. 아버지 위로 형이 둘 있었지만 두 분 다 일찍 돌아가셔서,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몸이 약하던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도쿄에 살던 가족들이 모두 후지 산 근처로 이사를 갈 정도였다. 무송 유庾씨의 34대손으로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컸던 아버지에게 일본에서의 삶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학창 시절 내내 ‘유동룡’이라는 한국 이름을 사용했다. 그 당시 학교에서 전교 10등까지 이름을 벽에 붙여놓았는데 아버지의 이름은 언제나 벽보에서 빠진 적이 없었다. ‘유동룡’이라는 이름이 걸린 걸 볼 때면 어린 시절 동생들에게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에 사는 설움 따위는 깨끗하게 잊을 수 있는 힘이 되곤 했다. 대학 시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어린 동생들을 위해 장남으로서 아버지 역할을 도맡다 보니 본인 스스로에게도 항상 엄격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은 성공한 건축가로 불렀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겸손한 학생의 자세로 노력하셨다. 단 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시지 않으셔서 나도 아버지 앞에 서면 괜스레 긴장이 되곤 했다.

아버지는 맏딸인 나에게도 매우 엄격했다. 건축가가된 뒤엔 자주 불시에 전화해서 “뭐 하냐”고 묻곤 하셨 다. 쉬고 있다고 말씀드리면 버럭 역정을 내시며 “건축일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와의 투쟁인데, 쉴 새가 어딨냐”며 채찍질을 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내가 건축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 무척이나 반대하셨다. 자신의 딸들이 조신하게 있다 시집가길 원하셨지만, 나는 아버지가 바라시는 딸의 모습이 되진 못했다. 아버지가 일 때문에 한국에 오시면 우리말이 서툰 아버지를 대신해, 초등학생인 내가 자연스럽게 통역을 해드리곤 했다. 어린 여자아이가 현장에 나가 지시도 하고, 대신 약속을 잡기도 했다. 현장에서 정열적으로 싸우다 완성되어가는 건축물을 보며 흥분하시는 아버지 곁에서 나도 건축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인테리어를 전공한 뒤, 서구 건축에 대한 동경을 안고 뉴욕으로 유학을 갔다. 아버지는 외국에 나간 딸을 일찍 귀국시키려고 생활비도 제대로 보내주시지 않았다. 덕분에 난 유학 생활 내내 이곳저곳 얹혀살아야 했고, 5년 동안 뉴욕 맨해튼 안에서만 이사를 여섯번이나 했다. 그래도 보베스 베이커리의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일본 JCD(디자인 어워드)에서 금상을 수상했을 땐 동네방네 자랑을 하시며 그렇게 좋아하셨다. 처음엔 반대하시더니 ‘한국의 세지마 가즈요(일본 여류 건축가)’가 되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엄하시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정이 넘치고 가슴 따뜻했다. 워낙 술을 좋아하셔서 일을 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늘 술이 함께했다. 아버지와 함께 홍어회에 막걸리를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많았다. 한참 술을 마시다가 “지금 몇시냐?”라고 물으셔서 “11시요”라고 하면 “우리 10분만 더 이야기할까?”라며 밤늦도록 이야기하는 걸 즐기셨다. 또 주변 사람에겐 자기 물건을 퍼주기 일쑤였다.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주다 보니 이타미 준의 시계를 가졌는지의 여부로 아버지의 지인임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언젠가는 우리 건축사 사무소의 한 직원이 맨 넥타이를 유심히 보시곤, “내가 옛날에하던 넥타이를 좀 줄까?” 하시더니 그다음 날 젊었을 때 하던 넥타이 한 보따리를 가져다주셨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정을 베푸셨다.

초가집 여러 채가 포도송이처럼 하나로 이어진 모습의 포도 호텔.

아버지는 겸손한 건축가셨다.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한낱 인간으로 태어나 위대한 자연에 잠시 잠깐 어울리는 물건을 놓는다”라는 자세로 건축을 행하셨다. 자신의 건축물이 튀게 하기보다는 주변과의 조화, 자연과의 조화를 가장 중요시 여기셨다. 이런 절제된 미학이 일본적이라 비치기도 하는데, 사실 아버지의 겸손함과 절제된 생활이 건축물에 반영된 것이다. 아버지 자신은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고도 평생을 스무 평짜리 집에서 사신 분이다. 그래선지 아버지의 건축물엔 소박하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그중 내가 결혼식을 올린 장소이기도 한 ‘석채의 교회’는 안에 들어설 때마다 엄마 품처럼 포근하다. 내가 아버지의 건축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 아버지의 비서 역할을 하면서 곁을 지키다 보니, 아버지는 나의 아빠요, 친구요, 스승이요, 멘토였다. 이제 나 개인의 아버지뿐 아니라 한 시대의 건축가로서 당신을 기억할 수 있게 돕는 것이 내 역할이다. 내후년 정도에 아버지의 소장품과 건축사를 담은 이타미 준 박물관을 제주도에 설립할 계획이다. 아버지의 열정적이면서도 한없이 소박하던 건축이 영원히 기억되길 바란다.

(오른쪽) 제주에서 가장 흔한 소재인 물, 바람, 돌을 모티프로 건축한 세 개 미술관 중 바람 미술관.


1 자연 소재인 대나무와 절반이 자연 소재인 철을 주제로 하여 일본 도쿄에 건축한 먹의 공간. 이타미 준이 사랑한 공간이며 주말이면 홀로 포도주를 마시며 작품을 구상했다.
2 진교남 씨는 이타미 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건축가이자 애 제자다. 이타미 준과는 도쿄 사무실에서 1992년부터 인연이 시작되었다. 현재 간삼건축에서 이타미 준의 건축 사상을 닮은, 자연과 어우러진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고분분투 중.

3 제주와의 인연을 시작하게 된 핀크스 리조트.
4 마치 추상화 같은 이타미 준의 스케치.


가장 사랑하던 제자 진교남 씨가 이야기하는 스승 이타미 준
“천생 예술가이던 나의 선생님”
선생님의 골동품 사랑은 유별나셨다. 1992년 선생님의 도쿄 사무소 아타미 준 아키텍츠에서 일을 시작하던 때 토요일 오후에 갑자기 차를 마시러 올라오라며 나를 본인의 사설 미술관인 도쿄 하네기 미술관으로 부르셨다. 그때 선생님은 나와 대화를 나누는 중간에도 달 항아리를 꼭 안고 끊임없이 쓰다듬으셨다. 그 후에도 종종 선생님이 도자기를 끌어 안으시고 명상에 잠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선생님께선 당신과 코드가 맞는다며 나를 유달리 아끼셨다. 선생님은 일본의 모든 골동품 가게를 샅샅이 찾아 방문하시곤 했는데, 어느 날 교토의 골동품 가게에 들렀을 때다. 가게에 들어서고 두 시간이 지났는데, 주인과 선생님은 그대로 서서 이야기만 하는 것이었다. 일본어가 아직 서투르던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지루하게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15분에 하나씩 가게 주인이 불상 얼굴, 도자기 등의 골동품을 줄줄이 들고 나왔다. 나중에 선생님께는 “제대로 된 골동품 가게는 친분이 있다고 해도 뜸을 들인다”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골동품을 사러 오는 사람들의 마음 읽기를 하는거지”라고 말씀하셨다.

(왼쪽) 호수를 닮은 하늘의 교회. 제주 서귀포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2년 전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방문한 선생님의 도쿄 사무실은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선생님 방은 골동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통로도 사람이 겨우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최소한의 공간만 남겨놓고 골동품을 놓아두셨다. 설계 사무소라기보다 박물관과 골동품 전시관 사이에서 건축가가 한 공간을 빌려 설계 하는 모습이었다. 골동품 사이사이를 건너 겨우 선생님께 다가가니, 의자 위에 무언가가 보자기로 덮여 있었다. 시선을 느끼셨는지 “보고 싶지? 내가 최근에 산 거다”라며 뿌듯한 미소를 지으셨다. 보자기를 벗기자 고려 때의 금동불상이 나타났다. 선생님은 “혹시나 불상이 추울까봐 보자기를 덮어놓은 거다”라며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길 하셨다. 그뿐 아니라 사설미술관인 하네기 미술관에선 다수의 조선 미술품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선생님의 골동품 수집은 단순한 취미 이상이었다. 특히 중반기 이후 선생님의 건축 작품은 조선 미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선생님의 건축적 사고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조형의 순수성과 물성의 본질이다. 가장 아끼시던 달 항아리가 이 두 가지를 모두 담고 있다. 조선 중기 달 항아리는 미적 의도 없이 실용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만큼 조형의 순수함을 보여준다. 1988년 방배동에 완성한 ‘각인의 탑’과 2001년에 완성한 제주도의 ‘포도 호텔’은 선생님의 건축 사고를 가장 잘 반영한 작품이다. ‘각인의 탑’은 인근 채석장에서 캐낸 돌 그대로의 모습이다. 인위적 구조물보다는 지하 2층에서 솟아오르는 작은 화강석 봉우리 같다. 또 포도 호텔은 제주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오름’과 전통 제주 민가의 지붕 선을 해석한 것으로, 넝쿨에 어우러진 포도송이를 닮았다.

(오른쪽) 제자 진교남 씨가 이타미 준의 건축 세계를 가장 잘 드러낸 작품으로 꼽은 제주의 포도 호텔. 지평선의 한 부분처럼 대지 위에 겸손한 자세로 한껏 몸을 낮췄다.


건축의 의미를 땅과 하늘에 드리는 기원이라고 생각한 이타미 준의 각인의 탑. 산에서 캐어낸 원석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살렸다.


선생님은 건축의 기본이 되는 재료의 물성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다. 화가 곽인식 선생께 받은 영향이다. 두 분 다 자연 재료가 지닌 내면적 특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셨다. 그러다 보니 설계도면으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모두 풀어내지 못할 때가 많았다. 스케치는 물결 흐르는 듯한 표현이 전부였다. 대개 설계도면은 수치상 정확 하게 몇 장, 어떤 높이로 돌을 쌓는지 정확하게 표기한다. 하지만 선생님은 자연석이 지닌 야성미를 끌어내기 위해 도면보다는 직접 돌을 하나하나 만져보며 건축을 진행하셨다. 돌의 표면과 돌 조각의 조합을 이해하기 위해 그 지역 내 최고의 석공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더 많으셨다. 그 장면을 보고 있자면 두 장인이 더듬더듬 돌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같았다.

난 부산 해양박물관, 핀크스 호텔 초안 작업, 태안 리조트 같은 프로젝트를 선생님과 함께 진행했다. 건축가로 함께 일하면서 본 이타미 준은 천생 예술가였다. 선생님은 논리적 개념보다는 추상적 감성에서 설계를 시작하셨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도자기를 만질 때의 느낌. 매끈매끈한 면도 있고 기포의 울퉁불퉁한 면도 느껴지는, 찍어내어 만든 것이 아닌 사람의 손으로 만든 느낌.” 선생님의 이런 추상적 ‘느낌’을 형상화해야 하는 과제를 받은 우리 건축 사무소 스태프는 고생깨나 했다.

나 또한 건축가로서 선생님께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내가 건축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집의 ‘터 닦기’다. 건물과 대지, 사람들 간의 관계 맺기를 의미한다. 그래서 지역의 특성을 먼저 알아야 한다. 현재 흑석동에 짓고 있는 박물관 겸 문화센터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건축이다. 산의 맥을 따라 마치 계단식 논을 닮은 건축물을 만들어냈다. 현대 건축에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던지는 메시지’가 결여됨을 걱정하셨던 선생님의 건축 세계는 이렇게 미약하나마 이어질 것이다.

이타미 준은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고려시대 3대 장군 중 한 분인 유금필 장군의 후예이며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으로 평생 조선의 미를 사랑한 건축가다. 건축과 예술 사이, 일본과 한국 사이를 넘나들며 여러 건축물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국내에 2001년 12월에 완공한 제주 포도 호텔을 디자인했고, 2003년 프랑스 국립 기메 박물관에서 생존 건축가 가운데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다. 2005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 예술 공로훈장 ‘슈발리에’를 받기도 했다.



사진 제공 ITM 건축사사무소, 진교남

구술 정리 최혜민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