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나의 외가는 부산의 소박한 동네에 모여 살았다. 1남 4녀를 데리고 북에서 피난 온 할아버지, 할머니의 자손이 번창해 외손녀 열하나에 외손자 넷까지 15명이나 되었는데, 한 동네에 살다 보니 서로 의가 좋았다. 중·고등학교에 간 사촌 언니 오빠들과 리틀엔젤스 합창단의 카세트 테이프를 듣고 따라 부르거나 주일학교에서 배운 춤을 변형해 추는 것이 놀이였다. 여름방학에 대구에 사는 사촌들까지 더하면 마치 극단의 단원 같았다. 저녁 시간에 온 가족이 동네 학교 운동장에 모여 아이들 장기자랑을 열었다. 박수치고 휘파람까지 부는 통에 인근 아파트에서 항의 전화가 걸려와 당직 선생님이 헐레벌떡 뛰어나오던 장면이 지금도 생각난다.
할머니, 대가족의 유능한 리더
인천에 사는 박정희 할머니 가족을 만나보니, 이들이 살아온 세월도 ‘대가족 극단’의 유쾌한 역사다. 올해 90세인 박정희 할머니는 명절이 되면 대가족이 모여 그림 그리고 놀이하는 이 극단의 설립자이자 유능한 감독이고,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는 최고의 리더다. 대가족이 흩어져 살면서 어린 시절 추억이 ‘기억’으로 남은 내 외가와 달리, 이 대가족의 추억은 박정희 할머니의 ‘기록’으로 남았기에 여전히 현재 진행형을 자랑한다. ‘추억’은 때때로 단절된 기억으로 머물지만, ‘기록’은 춘천으로도, 태평양 건너 캐나다로도 찾아갈 수 있으므로 가족이 어디에 흩어져 살더라도 ‘소통’이라는 열매의 양분이 된다.
할머니의 ‘기록’은 가족의 응원에 힘입어 2011년 다시금 책으로 나왔다. 그리고 90여 년 세월과 명민한 지혜, 풍성한 창의력이 빚어낸 열매에 대한 소문이 가족 관계에서 흉작을 거듭한 사람들에게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방송국 카메라와 잡지사 기자들이 할머니를 찾아가 ‘대가족의 즐거운 삶’이라는 비밀스런 수확 비법을 물으면, 손수 만든 원피스에 지팡이를 집고 의자에 곱게 앉은 박정희 할머니는 “90세 인생에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보너스”라며 흔쾌하게 근 백 년 길러온 지혜를 그저 일러주신다.
(오른쪽) 2010년 명절에 아들 가족, 큰딸 내외와 손주들, 증손주들이 모여 찍은 가족 사진.
1, 2 큰딸 명애 씨와 아들 제룡 씨의 <육아 일기> 표지.
서울의 신여성, 평양 새댁이 되다 89년 전, 박정희 할머니는 우리나라의 오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국 시각장애인을 위해 헌신하며 한글 점자를 만들어낸 송암 박두성 선생과 신학문을 배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박정희 할머니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최고 교육을 받고 여교사가 된 후 평양의 가난한 목사 집안에 시집가면서 대가족의 리더가 되었다. 멀리 평양에 사는 의사 청년을 몇 번 본 후 스스로 혼인을 결정하기 위해 ‘배우자 성품 알아보기’ 앙케트 편지를 평양까지 보냈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자아’를 지닌 서울 아가씨가 큰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평양 생활기는 신여성의 도회적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댁 식구들은 서울말과 아침저녁으로 어른들을 살피는 제 모습이 간사스럽다고 그랬지요. 친정과 집안 분위기가 달라 힘들고 눈물이 났지만 웃으며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가난한 살림에 지친 시어머니가 살림을 넘겨주셨을 때 어떻게든 살아보자 싶어서 멀리 중국인 밭에서 채소를 싸게 사와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팔자는 생각을 해냈어요. 양반은 장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시아버지 때문에 남자들 몰래 시어머니와 둘이서 움직여 여자 둘이 그 많은 가족을 다 먹일 수 있었어요. 딸이 없어 외로웠던 시어머니는 그간의 고생담을 며느리에게 털어놓으셨고, 둘만의 비밀이 생기면서 시어머니와 정이 깊어졌지요.”
평양의 가족들이 새초름한 곁눈질을 할 때도, 아홉 식구의 끼니를 해결할 책임이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도 박정희 할머니의 선택은 ‘한결같음’이었다고 한다. 한결같이 ‘그래, 해보자!’는 긍정과 웃음으로 해내니 시동생들의 태도가 부드러워졌고 눈물 마를 날 없던 시어머니가 웃는 날이 많아지셨다.
성장의 기록, 가족의 역사
남편이 의사였지만 청렴한 성품 때문에 늘 가난했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가족 수가 더 늘었다. 전쟁이 나자 평양에서 온 시댁 가족이 모두 인천의 친정 집에 모이면서 대가족이 두 배, 세배로 확대되었다. 딸 넷을 낳아 길렀고 대가족을 먹이고 입히느라 쉴 틈 없었지만 딸들을 위해 놀이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게 가장 즐거웠다. 모든 것이 귀하던 시절, 좋은 동화책을 구할 수 없어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아이들에게 주었다. 명애, 현애, 인애, 순애가 제각각 일곱 살이 될 때까지의 일에 대해 어머니가 글 쓰고 그림으로 기록한 이 책은 각 아이의 이름이 제목으로 붙인 <육아 일기>다. 자녀들에게 한글을 깨우쳐주었고 저마다 그림 선수가 되는 데도 일조했다. 태어난 날의 묘사, 가족들의 모습, 재미난 성장기, 거기에다 당시의 급변하는 세계 정세까지 그림과 글로 알차게 기록되었으니 읽는 재미는 물론 보는 눈까지 즐겁다. 모든 가족이 피난을 가고 병든 할아버지와 어린 딸들만 전쟁터에 남은 무서운 상황에도 그림을 그리고 놀이를 하느라 인천 집 안방은 놀이터가 되었고, 덕분에 폭격 날에도 포성 대신 행복한 기억만 남게 되었다.
바라던 막내아들 제룡 씨까지 태어나 1남 4녀가 되면서 평안의원 유 원장네 아이들의 육아 일기는 다섯 권이 되었다. “우리 집에는 늘 굴러다니던 그림책이어서 다른 아이도 그렇게 자라는 줄 알았어요. 중학교에 들어 가서야 어머니가 정말 독특한 분이시고, 우리가 특별한 사랑을 누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다른 아이들 앞에서 말을 조심하게 되었어요.” 큰딸 명애 씨의 이야기처럼, 인천 평안의원의 살림집은 1960~70년대 우리 나라의 가장 급진적인 교육 기관이자 놀이터, 문화 공간이자 대안학교였던 것이다.
(왼쪽) 박정희 할머니의 수납장은 원고지 6백 매가 넘는 ‘맏사위’라는 글부터 가족 여행 기록까지, 가족의 추억으로 채워진 보물단지다.
사위들, <육아 일기>에 반하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부모의 극진한 사랑과 어머니의 문화 양분을 듬뿍 받고 자란 다섯 자녀는 모두 유수의 대학에 들어갔다. 시동생과 친정 동생들까지 길러낸 부부는 일찌감치 자녀들에게 “대학에 들어가면 너희가 벌어서 생활을 꾸리고, 결혼도 마찬가지다’라고 일러두었다. 배우자를 결정할 때도 물론이다. 큰딸 명애 씨가 집에까지 따라온 청년을 매몰차게 거절할 때에도, 그 청년이 마음에 쏙 들었던 어머니는 “어머, 이 일을 어째!” 하고 애만 태웠을 뿐이다.
자녀들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명애 씨의 집을 방문해 그 어머니가 글 쓰고 그림 을 그린 <유명애>라는 동명의 육아 일기를 본 그 청년은 꾸준한 구애 끝에 결국 맏사위가 되었고, 훗날 “어머니와 어머니의 육아 일기에 반해 꼭 결혼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장모님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한 맏사위는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 일기>를 집안의 ‘가보’로 귀히 여겼고, 2011년 새 책으로 재단장해 세상에 나올 때 책의 말미에 “나의 장모님, 시편 92편을 떠올리며”라는 글을 추천사로 헌사했다. “자매들은 전부 가난한 집에 시집갔어요. 부모님이 자식의 결혼에 대해 전혀 말씀하지 않으셨지요. 맏딸인 저도 어머니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시부모님과 대가족을 건사하며 시동생들을 가르치고 시집, 장가까지 보냈어요.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훗날 사위들이 우리 나라 국보급 학자와 사업가가 되어 있어요. 부모님이 우리에게 ‘사람의 중심을 보는 눈’을 심어주신 덕분인 것 같아요.”
며느리, <육아 일기>처럼 따뜻하다
맏사위 부부는 은퇴 후 셋째 인애 씨 부부가 사는 춘천에 낙향해 절친한 목사님 내외와 함께 현대사회의 기계적 삶에 지쳐 방황하는 이들이 쉬어갈 수 있는 무료 휴식처를 운영한다.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밥 지어 먹이고 따끈하게 불을 때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일이 대가족을 부양하듯 자연스럽다. 이렇게 따뜻한 휴식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노곤한 영혼이 요즘 더욱 많아졌다.
둘째 현애 씨 부부는 일찌감치 캐나다로 이민갔는데, 몇 해 전 한국어학당에 역유학을 온 손주들이 외가에 머물며 “할머니와 외숙모는 정말 멋있어요!”라는 찬사로 날마다 고부를 기쁘게 해주었다. 또한 둘째 딸 부부는 수채화를 그리는 어머니를 캐나다로 모셔가 전시회를 개최했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할머니의 글과 그림을 늘 보아온 터라 외국에서 자라는 손주들은 온 가족의 역사와 조부모님의 사랑을 온전히 체득하고 있다. 셋째 사위는 유명한 식물학자이자 대학 교수이며, 고등학교 교사였던 셋째 딸 인애 씨는 미혼모와 결손 가정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마음먹고 그들을 위한 쉼터에서 오래전부터 교사로 봉사하고 있다.
“오늘 인애도 오려고 길을 나섰는데, 마침 여름방학 때라 아이들이 평소보다 일찍 쉼터에 왔나 봐요. 그 아이들을 두고 올 수가 없다고 해서 못 왔어요. 섭섭하지 않냐고요? 그렇지 않아요. 인터뷰를 하는 것은 어머니인 나의 일이고,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딸인 그 아이의 일이에요. 우리는 평생 각자의 일과 생각을 존중하며 자유롭게 살고 있답니다.”
인터뷰를 약속한 날, 더 많은 가족이 모이지 못한 데 대해 미안해하면서도 딸들의 자유로운 삶에 대해 설명하는 박정희 할머니의 눈이 유난히 빛났다. 대학의 학과장이자 함초의 유용한 성분을 연구하는 과학자이기도 한 넷째 순애 씨 내외와 현재는 ‘평안 수채화의 집’으로 간판을 바꾸어 단 평안의원 5층에 살며 평생 부모님을 모신 사업가 아들 내외까지. 이처럼 훌륭하게 자란 자녀들을 병풍처럼 세워놓고 자랑해도 부족함이 없지만, 박정희 할머니는 줄곧 겸양했다.
“이 인터뷰는 하나님께 받은 나의 마지막 보너스이니 즐겨야지요. 하지만 아이들은 또 그들이 원하는 삶을 즐겨야지요. 수줍은 며느리는 손님이 드실 음식을 이렇게 마련해주고 올라갔어요. 참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남편은 사랑하는 며느리 품에 안겨서 임종을 맞았는데, 내 소망도 사랑하는 며느리 품에 안겨 하나님께 가는 것이에요. 그만큼 내 며느리가 좋아요.”
할머니의 책에서 ‘평안의원 뒤편의 초가집을 고쳐 아이들 방을 만들며 더없이 행복했다’고 묘사된 안채를 배경으로 큰딸 명애 씨와 박정희 할머니.
참으로 부러운 대가족의 소통법, 기록
사람들이 신문을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깨우치듯 박정희 할머니의 태중에서 난 1남 4녀는 물론 회갑을 넘긴 맏사위와 한국어보다 영어가 편한 손주들, 이제 태어날 증손자들까지 서른여섯 명의 가족들이 할머니의 90여 년 글과 그림을 보며 ‘가족’이라는 신비로운 울타리에 기쁘게 자리 잡고 있다.
“주위에서는 아무리 어려워도, 그녀가 자기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믿기에 힘을 얻는다. 그리고 어려울 때는 찾아와 의논하고 좋은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알리기 위해 바로 달려온다. 아예 가족이 함께 방문하는 것이 보통이다”라는 큰 사위의 글처럼, 그녀의 간결한 글과 아름다운 수채화는 가족에게 삶의 지혜를 깨우쳐주고 자유로운 세계관의 길을 내주는 가장 귀한 삶의 안내서다.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 가족의 기록은 화려한 도시를 일구느라 개인의 소소한 삶을 기록하는 중요한 일을 놓쳤던 한국인에게 보너스와 같은 귀중한 역사서이자 한 세기의 살아 있는 생활서이기도 하다.
(오른쪽) 셋째 인애 씨의 <육아 일기> 중 ‘인애가 자란 화평동의 집’이라는 페이지. ‘아래층은 아버지의 진찰실, 위층은 살림집인 작은 집이었지만 지붕 위와 좁은 방이 인애의 소꿉놀이터로 좋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박정희 할머니는 “자녀들이 나중에 일기를 보고 자기의 존재가 퍽 고맙고 귀하다고 생각하고 기쁘겠기에” <육아 일기>를 썼다고 한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손자손녀, 며느리, 시누이가 저마다 스스로를 가장 고맙고 귀한 존재로 여긴다면, 낮은 자존감과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가혹한 생각이나 차가운 말이 가족의 마음을 괴롭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너는 가장 귀한 존재다”라는 반듯한 직언 대신 매일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인생의 귀한 순간을 글과 그림으로 읽으며 스스로를 가장 고맙고 귀한 존재로 여기도록 만들어준 지혜의 기록. 할머니의 소중한 기록이 있어 세상 어디에 흩어져 살아도 이들은 매일 소통하고 사랑하는 정겨운 ‘가족 사랑’을 유지하는 것이다. 상실의 시대, 참으로 부러운 ‘대가족’의 소통법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잠깐 짬을 내어 어머니에 대해, 내 아들에 대해 몇 글자 적어둔다면 훗날 나의 후손도 세계 어느 곳에서든 그 글을 읽으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복하겠지.
그림 박정희 할머니
- [新대가족_인터뷰2] 육아 일기를 가보로 전하는 박정희 할머니 가족 기록이 대가족의 소통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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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 4녀는 물론 그들이 꾸린 식구까지 서른여섯 명의 대가족이 된 박정희 할머니 댁. 강원도, 캐나다, 인천 등에서 서로 각자의 둥지를 짓고 살지만 이들은 동아줄처럼 굵직한 인연으로 통한다. 그건 바로 할머니의 일기다. 회갑을 넘긴 맏사위와 영어가 더 편한 손주들, 이제 태어날 두 명의 증손자들이 박정희 할머니의 90여 년 글과 그림을 보며 ‘가족’이라는 신비로운 울타리에 기쁘게 자리잡고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